#041
세화는 입술을 악물며 터질 뻔한 비명을 겨우 집어삼켰다. 볼 안쪽을 세게 씹는 바람에 입 안에 피 맛이 확 퍼졌다. 여기서 아프다고 소리 지르면 어쩐지 기태정의 말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았다.
“뼈는 안 부러졌어. 인대는 확실히 상했지만.”
손등을 훑던 기태정의 엄지가 느릿느릿 반 바퀴 돌아 세화의 손목 안쪽을 매만졌다. 남자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열이 푹푹 끓었다. 죄 으깨진 머릿속에는 몇 가지 글자만 둥둥 떠다녔다.
기태정, 같은 고아, 사람이 아닌, 닮은 불운, 나를 왜 좋아해, 좆집….
인제 와서 모멸감 같은 것을 따지는 게 민망할 정도로 그에게 실컷 휘둘리는 중이긴 했다. 처음 마주하자마자 살고 싶다고 순순히 배를 뒤집어 깠고, 저의 특이한 체질을 활용해 완제품을 탈취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돕기까지 했고, 또… 결과만 놓고 봤을 땐 그가 빚을 갚아준 대가로 다리를 벌려 준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도…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지금까지 비굴한 태도를 보였다고 해서, 그게 자신의 다른 감정까지 멋대로 재단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약은 이따가 줄 테니까 먹어.”
부드러운 입술이 뺨 위로 내려앉았다. 밀어내려 고개를 이리저리 틀어봤지만, 집요하게 따라와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춘다. 부리로 쪼는 것 같은 상냥한 입맞춤이었고, 그래서 세화는 더욱더 속이 쓰렸다. 이렇게 다정하게 키스하는 법을 알면서 지금까지 저한테 그딴 식으로 굴었던 거다, 이 남자는.
좀 더 격렬하게 고개를 빼며 쏟아지는 키스 세례를 거부하자, 마침내 기태정도 움직임을 뚝 멈추었다. 세화는 고개를 반쯤 돌린 채로 아무 곳에나 시선을 내던졌다. 씹어먹을 것 같은 눈길이 세화의 옆얼굴로, 얕게 할딱이고 있는 목빗근으로 쏟아졌다.
“자기야.”
당장이라도 숨통을 물어뜯을 것 같은 사나운 시선을 유지한 채로, 기태정이 넝쿨처럼 얽고 있던 손깍지를 풀었다. 세화는 눈을 질끈 감았다. 때리겠지. 아니면 이번에야말로 손목을 부러뜨려 놓거나.
그렇지만 기태정이 고른 선택지는 이번에도 세화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는 그저 세화를 조금 더 가까이 끌어당기기만 했다. 엉덩이를 움켜쥐고 주무르는 손길은 단단했지만, 폭력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오히려 조금 전 볼이며 이마에 뽀뽀할 때처럼 부드럽고 상냥하기까지 했다.
“나 지금 자기가 제일 싫어하는 주제로 펑펑 울게 만들 수 있을 것 같거든.”
그렇게 해 줄까, 하며 기태정이 고개를 숙였다. 이마가 톡 맞닿았다. 그리고 그게 전부였다. 키스도, 섹스도, 폭행도 없었다. 그의 몸짓에선 조금의 강제성도 느껴지지 않았다. 언제라도 눈앞의 사냥감을 잔인하게 도륙 낼 수 있는 짐승이 부리는 여유였다.
“가랑이는 잘도 벌리는 주제에 키스는 왜 이렇게 이를 악물고 거부할까, 진짜 창놈처럼?”
기태정은 심통 난 애를 구경하는 것 같은 잔인하고 못된 얼굴을 하고서, 크게 부풀었다 느릿느릿 꺼지는 세화의 흉곽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준장님.”
“내 부하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불러?”
이 와중에도 자기 꼴리는 호칭으로 듣고 싶다고…. 초조함에 내내 씹고 짓이기던 아랫입술의 상처가 투둑 벌어졌다.
“준장님이야말로 저 좋아하세요?”
불쑥 튀어나온 세화의 물음에, 기태정의 얼굴 위에 서렸던 미소가 서서히 걷혔다.
“뭐?”
지금 내가 무슨 소릴 하는 거지, 두려움에 덜덜 떨리는 와중에도 발끝에서부터 짜릿함이 올라왔다. 그가 저에게 한 방 먹은 것 같은 표정을 지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난데없이 자길 좋아하냐고 묻는 거, 좀 이상하잖아요. 평소에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면….”
세화는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손을 억지로 들어, 속눈썹에 맺힌 눈물방울을 털어 냈다. 기태정의 말대로 뼈가 부러지진 않은 것 같은데, 그래도 확실히 심하게 다치긴 했는지 손목 부근이 점점 벌겋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뭐, 덕분에 잔뜩 긴장해서 발발 떨리는 걸 다친 탓으로 돌릴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아이를 갖자고 말할 정도면 상대방을 아주 좋아해야, 쿨럭, 하는 거잖아요.”
멍청하게 목소리가 덜덜 떨리지만 않았어도 좋았을 텐데. 그래도 세화는 속에서 콸콸 쏟아지는 이야기를 전부 늘어놓았다. 고작 이 정도로 상처 입을 남자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제가 품은 가시를 죄 꺼내놓고 싶었다.
“임신 가능한 체질이 아니라는 거 잘 아시면서, 저한테 매번 그런… 그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를 몰랐는데, 혹시 절 좋아하셔서 그랬던 거라면….”
기태정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또박또박 대들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제 마음가짐은 그랬다는 거고,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엉망진창이었다. 약쟁이들처럼 손끝이 덜덜 떨리고 겁먹은 눈 밑은 새파랬다.
세화는 자기 자신을 잘 알았다. 어차피 제가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의 반항은 이 정도일 거다. 그나마도 지금은 욱한 마음에 이렇게 대거리를 하고 있지만, 기태정이 처음처럼 발로 차고 때리면. 혹은 없던 일로 하기로 한 37억 8천에 관한 얘길 다시 꺼내면… 어쩔 수 없이 그의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거다.
사람들 앞에선 언제나 초연하게 구는 척 애썼지만, 조금이라도 덜 아프고 싶었고 살 수 있다면 살고 싶었다. 저의 천성은 성 밖의 하우스나 전전하는 빚쟁이답게 나약하고 비굴하다. 그래도 지금만큼은, 이 오기가 무슨 결과를 불러올 줄 뻔히 다 알면서도 뻣뻣하게 나갈 작정이었다.
굴복할 땐 하더라도 그가 이런 식으로 못되게 굴면 제가 비협조적으로 나올 수도 있다는 것 정도는 알리고 싶었다. 귀찮게도 몇 대 때리는 수고를 들여야 하니 앞으론 이런 식으로 자신을 몰아세우는 건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끔. 가끔 케이크나 먹여주고 빚 얘기만 들먹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괜히 저거 속까지 들쑤셔서 괴롭히는 건 피곤하다고… 그렇게.
“아, 그렇구나.”
기태정은 가만히 세화를 바라보기만 했다. 굴곡 없는 평이한 어조는 앞으로 닥쳐올 비극의 복선이라도 되는 것처럼 서늘하기만 했다. 이 정도는, 아니 이보다 더한 것도 각오하고 있었다. 세화는 결연한 표정으로 그의 말에 담담히 귀를 기울였다. 아니, 기울이는 척했다.
“그렇네. 보통은 누굴 좋아해야 아이 갖게 할 생각을 하겠지.”
그런데… 기태정의 상태가 좀 이상했다. 그는 뺨을 갈기러 손을 드는 대신에 그린 듯 근사한 미소만 지었다. 물론 입꼬리만 보름달 같은 호선을 그리고 있을 뿐, 눈은 조금도 웃지 않는 채였다.
“그래, 내가 자기 좋아하나 보다.”
툭툭 내뱉는 목소리는 얼음장 같아서, 기태정이 하는 말이 단번에 이해가 되질 않았다.
“…네?”
“너 좋아하냐고 물었잖아. 그래, 그런 걸로 하자고.”
허리와 엉덩이를 감싸고 있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아프지는 않았으나, 당장이라도 구멍 안을 찢고 벌릴 것 같은 열기가 느껴졌다. 기태정은 감히 자신에게 반항하는 세화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여태까지 세화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방식으로.
“좋아해, 이세화.”
세화의 입술이 탄식으로 벌어졌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똑똑히 내뱉은 자신의 이름에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졌다. 고의다. 지금 기태정은, 일부러 저러는 거다. 이젠 떨리지도 않았다. 몸이 완전히 굳어, 눈조차 깜빡일 수 없었다. 기태정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입술을 맞댔다. 안쪽의 여린 살로만 다 찢어진 상처를 감싸듯 물고, 흐르는 피를 정성껏 핥아 주었다.
“이제 됐어?”
이세화. 좋아해.
평생 타인에게 들어볼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예쁜 말이, 막연히 상상만 하곤 했던 꿈같은 부름이… 가장 잔인하고 차가운 칼날이 되어 세화의 가슴을 쿡쿡 쑤셔 댔다. 인중 위로 따뜻한 숨이 쏟아졌다. 멍청하게 벌어진 입술 새로 기태정의 혀가 파고들었다. 충격으로 넋이 나가서 어떠한 반응도 되돌리지 못하는 세화의 혀를 톡톡 건드리며 부드럽게 문지른다. 상식적이다 못해 신사적이기까지 한 키스였다.
“이세화.”
입술을 맞댄 채 기태정이 또 한 번 이름을 불렀을 땐, 참지 못하고 눈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왜 울어? 나한테 이런 말 듣고 싶었던 거 아니야?”
아니, 아니었다. 차라리 저더러 구멍이라고 부르는 게, 좆집 취급이나 하는 게 훨씬 나았다. 입에 담지도 못할 난잡한 얘기나 하면서 저를 창부처럼 끌어내리는 쪽이 견딜 만했다. 이건, 이건….
“그, 만하세요….”
이것도 티가 났던 걸까. 돈이 아니라 성 안의 주민증을 탐냈던 것이 쉽게 읽혔던 것처럼… 사쿠라, 삼월이, 홍단이가 아니라 이세화이고 싶었던 마음이, 주제를 모르던 열망이 전부 드러났던 걸까.
세화는 고개를 푹 숙였다. 가장 깊은 곳에 숨겨뒀던 꿈마저 전부 꺼내 부수는 것 같은 놀림을… 더는 견디기 어려웠다. 몸으로 쏟아질 익숙한 폭력을 각오했던 거지, 마음을 두들겨 맞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세화는 이런 쪽의 잔인함에는 그 어떤 면역력도 없었다.
“이상하네. 이름을 불러 줘도 싫다고 하고. 좋아하냐고 묻길래 그런 것 같다고 해 줬더니 울기만 하고.”
기태정이 숙이고 있던 세화의 고개를 치켜올렸다. 물기가 어리다 못해 뿌옇게 막을 두른 것 같은 눈을 보고선, 피식 웃으며 미간에 입을 맞춰 줬다.
“내가 이름 부를 때마다 쌀 것 같은 황홀한 얼굴을 하고선 쳐다봤잖아.”
“…….”
“여태까지 대체 어떻게 하우스에서 살아남았어? 그렇게 표정을 못 숨겨서.”
“…….”
이전 같았으면 빠릿빠릿하게 대꾸 못 하냐며 윽박질렀을 텐데. 원하는 바가 있는 기태정은 끈기 있게 세화가 반응을 보이길 기다렸다.
“…죄송, 해요. 제가…. 다시는 안 그럴게요.”
“뭐가 죄송해. 너 이세화 맞잖아. 좋아하냐고 물어봐서 그렇다고 해줬잖아. 근데 씨발, 해 달라는 대로 해 줬는데도 뭐가 문제라서 처울어, 응?”
“아니에요. 제가….”
“그럼 너 뭐야. 이세화 아니면 뭐냐고.”
기태정이 원하는 대답을 알고 있었다. 건방지게 대든 것을 사과하고, 제 입으로 시인하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당신 좆집이 맞다고. 순간, 동정이든 동질감이든 아주 조금이나마 당신에게 어떤 감정이 일기는 했다고, 미안하다고. 그런데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처음엔 뚱한 낯으로 있던 게 나만 보면 울다가 웃다가 조잘조잘 떠들고 그러더니, 이젠 옛날얘기 좀 들려줬다고 아주 내 애인이라도 된 것처럼 보듬어 주고 싶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데….”
세화의 턱을 움켜쥔 남자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웃기지도 않아서.”
“…….”
“네가 뭔데 날 보고 그런 낯짝을 하냐고, 어?”
겨우 숨만 내뱉고 있던 세화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랬… 었나? 애인이라도 된 것처럼 보듬어주고 싶은 얼굴? 내가 그런 표정으로 당신을 보고 있었나….
“쓸데없는 마음 품지 마.”
“…….”
“네 주장대로 연심이 아니더라도. 호감이든, 동정이든, 그 무엇이든.”
흐윽, 하고 밭은 숨이 목구멍을 비집고 올라왔다. 명령의 숨은 뜻은 명확했다. 잠깐 데리고 노는 장난감 주제에, 대주는 구멍 주제에 나대지 말라고.
“이세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 다시 설명해 줘?”
“아뇨, 대들어서, 흣, 죄송해요….”
세화는 흐느끼며 고개를 툭 떨구었다. 하지 마세요. 잘못했으니까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웅얼거리며 몇 번이고 속삭였다. 애원했다. 제발, 그만하라고.
“착하게 굴면 실컷 귀여워해 준다는데도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을까, 응?”
기태정이 억세게 세화의 뺨을 움켜쥐었다. 턱이 빠질 것 같은 악력이었다.
“다음에도 시건방 떨면, 네 입으로 나는 구멍이고 좆집이라고 복창하게 할 거야. 그러면서 온종일 박히는 건 자기도 싫을 거 아냐.”
“네, 죄송… 합니다….”
“그래, 그렇게 착하게 굴어야지.”
기태정이 검지로 볼을 톡톡 두드렸다. 온통 눈물이 번져 시야에 그의 얼굴이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기태정은… 웃고 있는 건가?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아니, 잘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겠어….
“입 벌려.”
순순히 벌어진 입으로 기태정의 혀가 파고들었다. 다정하게 입술을 맞댔던 조금 전이 거짓말인 것처럼, 깊숙하게 파고든 뜨거운 살덩이가 난잡하고 음탕하게 세화의 혀를 유린했다. 비로소 기태정답게 느껴지는, 진짜 키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