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40)화 (4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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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

“너도 빚이나 갚으라고 하우스 사장이 주워 간 거라며. 나도 그렇게 군에서 끌려간 거야. 부모가 팔아먹은 건지, 있기는 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기태정이 덤덤하게 말했다. 네가 눈을 떠보니 하우스의 창고였던 것처럼, 나도 군부 깊숙한 곳의 폐쇄된 수용소 안에서 정신을 차렸다고.

“아….”

작게 탄성이 터졌다.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지고 안타까워하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뒤늦게 건방져 보일 수도 있겠다고, 기태정의 입장에선 그를 동정하는 것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도는 절대 아니었는데.

“뭐가 아, 야.”

“죄송해요. 좀 놀라서….”

동정이라니. 감히 누가 누구에게 그런 마음을 품는단 말인가.

“남들보다 몸을 잘 썼어. 단순히 운동 신경이 좋은 정도가 아니라, 아까 봤던 것처럼 이게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한계가 없었지.”

부러진 뼈는 약이 없이도 깨끗하게 붙었다. 지치는 일도 없었고 여러 번 총과 칼에 맞았는데도 죽지 않았다. 작정하고 절벽에서 떠밀었을 때도 살아남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거고. 아니, 살아남은 정도가 아니지. 다 죽여 버리고서 준장까지 달았으니까.”

기태정이 너른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별 모양의 자수가 새겨진 부근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입은 실내복은 세화의 것과 미묘하게 달랐다. 재질도 더 고급 같고. 별을 포함해서 이런저런 자수도 새겨져 있고.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라고…. 세화는 기태정이 방금 흘려 준 몇 가지 문장에서 필사적으로 단서를 찾아보려 애썼다. 흔치 않게 보이는 성긴 틈으로 그가 슬쩍 흘린 감정을 핥아 보려 기웃거렸다. 덤덤하게 말하는 그의 음성에서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상실과 먹먹함을 읽었노라 말한다면… 그건 기태정에 대한 기만일까. 남에게 동정받고 싶은 마음이라곤 전혀 없을 것 같은 남자에게 안쓰러움을 느껴도 괜찮은가. 또 이건… 정말로 건방진 말이긴 하기만, 기태정에게 아주 약간의 동질감 같은 걸 느꼈다고 한다면. 물론 그는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높은 계급이지만, 결이 같은 그림자가 읽힌다고 하면, 그러면….

“흠….”

담배를 피우는 건지, 한숨을 쉬는 건지 모호한 음성이었다. 지금 세화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꿰뚫어 보는 것 같다는 건 확실했다. 그제야 와글와글 소란했던 마음이 차분해졌다. 눈동자만 슬쩍 굴려 기태정을 보니, 그는 찬물이라도 뿌린 것처럼 시린 눈매를 하고 있었다.

“죄송… 해요….”

정신없이 샘솟는 생각의 늪에 잠겨있던 세화는, 저도 모르게 활짝 열 뻔했던 마음의 빗장을 꼭꼭 걸어 잠갔다.

나도 너와 비슷한 처지라고 말해준 사람은 기태정이 처음이었다. 그럼 그냥… 비록 기태정이 저를 심하게 괴롭히긴 했어도, 다 떠나서 그저 고마워하고 말았어야 했는데. 부끄럽게도 그의 불행에 지나치게 반색하고 말았다. 기태정이 툭 내던져 준 아주 약간의 불우한 과거를 끌어안고 퍼즐 맞추듯 이리저리 끼워보면서 위안이나 삼으려고 들었다. 주제 파악도 못 하고서 어떻게 하면 힘들었을 그를 위로해 줄 수 있을까… 그런 어이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자기야. 내가 건방지게 굴지 말라고 했지.”

피를 토하도록 걷어차였던 그때와 똑같은 서늘한 음색이었다. 다소 편하게 대하는 것 같았던 태도는 싹 가신 채였다. 변명을 궁리하던 세화의 낯이 허옇게 질렸다. 다시는 아까처럼 대해주지 않겠구나. 그래도 그와 조금은 관계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세화는 자신의 멍청함으로 날려버린 기회가 아까워 작게 탄식했다. 그리고 기태정에게 정말로 미안해졌다.

“저는 다른…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고….”

반들반들한 세화의 눈을 빤히 쳐다보면서, 기태정이 담배를 물었다. 허구한 날 눈물을 뽑는 저 눈깔이 이번엔 언제쯤 물기로 부풀어 오르려나, 가늠이라도 해 보는 것 같았다.

입술이 벌어지고 하얀 연기가 그의 가슴께에서 흩어진다. 나른하게 소파 등받이에 몸을 묻고 있는 기태정은, 돌이킬 수 없는 혁명을 결심한 투사 같았다. 몰랐는데 얼음장 같다고 생각했던 눈동자에선 새카만 불길이 들끓고 있었다.

세화는 순식간에 바뀐 분위기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눈만 슴벅였다. 주제에 감히 자길 동정한다고 기분이 상한 걸까. 그렇지만 동정 같은 건 아니었는데…. 굳이 꼽자면 이 느낌은 동질감에 가까웠다. 곁에 앉아 나도 그런 적 있어, 하고 어깨를 짚어주고 싶은 그런 따뜻한 감정. 물론 기태정 입장에선 그것도 기분이 상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화를 낼 일은 아니지 않나….

“내가 귀염이나 떨라고 했지….”

“…….”

“언제 나 좋아하라고 했어.”

…뭐라고? 세화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좋아한다고? 내가 당신을? 얘기가 왜 그렇게….

“네?”

깊이 생각할 것도 없었다. 세화는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아뇨, 아니에요. 부정하는 말은 제대로 된 목소리로 나오지도 못했다. 가느다란 미풍 같은 숨결은 기태정의 담배 연기에 뒤덮여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에게 짓눌린다. 압사당한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빼앗겨 버리면, 그대로 끝나 버릴 것 같았다. 기태정이 저에게서 가져가려는 것이 무엇인진 몰라도, 이렇게 순순히 내어주면 전복되어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신 건진 모르겠지만….”

막 불을 붙인 장초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기태정은 이내 담뱃대를 부러뜨리듯 내리눌렀다. 깨끗하던 테이블 위로 불로 지진 자국이 남았다. 아마도 다시는 지워지지 않을 새카만 흔적이.

“뭐 해?”

무례한 속단에 충격을 받은 세화는 거들떠보지도 않고서, 기태정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세화는 꾸물꾸물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의지로 하는 일이 아니었다. 남자가 두 번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걸 뼛속까지 새기고 있는 몸이 주인의 의지를 반하고서 멋대로 움직였다.

그가 가리킨 곳은 돌덩이처럼 단단한 그의 허벅지였다. 그 위에 걸터앉으라는 거였다. 입으로, 뒷구멍으로 기태정이 떠주는 생크림을 받아먹어야 했던 그때처럼.

세화는 애꿎은 옷만 쥐어짰다. 가기 싫었다. 구멍 취급이나 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고 있다. 순순히 굴지 않으면 더 모진 말이 쏟아질 걸 아니까. 느닷없이 왜 나를 좋아하냐는 어이없는 말이나 하는 남자에게 더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안 그래요.”

금이 가다 못해 부서진 자존심을 그러쥐며, 세화가 슬쩍 중얼거렸다.

“저 이사님한테, 그런 거… 아니에요.”

무슨 이유로 그런 생각을 하셨는진 모르겠는데, 하고 계속 웅얼거리자 기태정이 코웃음을 쳤다.

“뭐가 안 그러는데?”

“저 이사님, 아니 준장님, 안…, 좋아해요.”

당기는 손길에 어정쩡하게 버티고 있던 몸이 무너졌다. 독한 향수에 중화된 쓰디쓴 담배 향이 세화에게 훅 끼쳐 왔다.

“자기야. 이번에도 강간하기 전에 묻는 건데.”

커다란 손이 헐렁헐렁한 바지를 순식간에 끌어내렸다. 속옷을 입지 않아 민둥한 자지가 툭 튀어 나왔다.

“넣고 싸도 돼?”

“대체 왜… 물어보시는 거예요.”

어차피 자기 마음대로 할 거면서. 숨은 뜻을 읽은 기태정이 씩 웃었다. 악랄한 미소 위로, 조금 전 함께 하늘을 날던 때가 겹쳐졌다. 창공을 두르고서 소년처럼 웃었던 그 얼굴이.

“이번엔 안 봐줄 생각이거든. 자기 구멍 다 찢어져도 끝까지 전부 처박을 거야.”

세화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기태정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절대로, 절대로 아니었다. 그에게 품은 감정은 그런 예쁘고 애달픈 마음 같은 게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과는 별개로… 저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기태정은 왜 저렇게 못된 말을 하는 걸까?

“…싫다고 하면 안 하실 거예요?”

“아니.”

양 손목이 붙들렸다. 세화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숨을 들이켰다. 이제 상의가 들리고 젖꼭지를 빨릴 거다. 기태정은 색이 옅은 세화의 유두가 붉게 물들 때까지 괴롭히는 걸 좋아했다. 납작하던 살덩이가 자신의 혀에 뭉개져 도톰하게 융기하면 보람마저 느끼는 것 같았다.

그다음이야 뻔했다. 개처럼 엉덩이만 치켜든 채로 구멍을 벌리게 되겠지. 옆에 생수통이 있으니 이번엔 그걸로 대충 뒤를 적실지도 모르겠다. 엉덩이나 회음을 얻어맞으면서, 기태정이 손으로 쑤시기 좋게 볼기를 쫙 벌리고 있어야 할 거고, 그리고….

진력이 빠지는 그와의 섹스를 복기하고 있는데…, 각오하고 있던 희롱 대신 기다란 그림자가 얼굴을 뒤덮었다. 의아함에 실눈을 뜬 세화는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기태정의 입술이 지나치게 가까이 있었다.

“…아.”

기태정은 반쯤 눈을 내리깔고서, 입술을 자연스럽게 벌리고 있었다. 이마부터 콧대와 턱 끝까지, 미려한 굴곡 덕분에 풍부해지는 음영을 저도 모르게 관조하던 세화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비틀었다. 이건, 어떠한 암시였다. 바보라도 모를 수가 없었다.

싫었다. 키스라니. 여태까지 했던 것 통틀어서 가장 못된 조롱을 퍼부으면서 입을 맞추려고 하다니…. 세화는 기태정에게 휘둘리지 않으려고 허리에 잔뜩 힘을 주며 버텼다. 우습게도 그 때문에 기태정의 허벅지를 감고 있던 다리에도 절로 힘이 실려, 뒤로 자지를 물듯 조여 대는 꼴이 되었다는 것도 모르고서.

“구멍 조이는 걸로도 모자라서 여기로도 이러고 있네.”

기태정이 기가 막힌다는 듯 조소했다.

“네? 아, 이건… 그러니까….”

똑 분지르기라도 할 것처럼 세화의 손목을 꼭 쥔 채로, 기태정이 상체를 숙였다.

“이러니까 네 팔자 네가 꼬는 거라고 한 거야. 널 좆집으로 여기는 사람을 왜 좋아해.”

세화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둔통에 눈을 홉 떴다. 방금, 뭐라고…?

“안… 좋아해요.”

충격으로, 반사적인 부정이 튀어 나왔다. 좆… 집이라니. 들어 본 적도 없는 저속한 품평에 결국 눈물이 고였다. 언제부터인가 기태정이 제가 우는 걸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아서. 또 그의 앞에서 너무 자주 울었던 건 사실이라 더는 눈물 같은 거 보이지 않으려고 했는데…. 구멍도 아니고 좆집이라니…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안 좋아해요. 대체 왜 그러시는 거예요?”

훌쩍이지 않으려 애쓰며, 이번엔 오기를 꾹꾹 담아서 말했다. 기태정의 말 그대로였다. 저를 좆…, 하여튼 그런 취급이나 하는 남자를 대체 왜 좋아한단 말인가.

“그래?”

“네, 제가 그럴 이유가 없… 아읏…!”

붙들고 있던 손목을 뒤로 완전히 꺾으며, 기태정이 억지로 깍지를 꼈다. 우두둑, 정말로 뼈가 부러지는 것 같은 끔찍한 소리가 났다.

“그래. 알겠으니까 이번에는 꼭 임신해야 해.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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