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39)화 (39/144)

#039

평소처럼 놀리기라도 하면 좋겠는데. 기태정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세화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손 사장 밑으론 언제 넘어왔어?”

뻘쭘함에 입술만 감쳐물고 있자, 다행히도 그가 먼저 운을 띄워 줬다. 세화는 반색하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십 년은 안 됐어요. 원래 있던 곳이 망하면서 저도 넘어왔는데….”

그러고 보니 그때 같이 여기로 넘어온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기억을 더듬어봐도 이젠 얼굴조차 희미했다.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닌데도. 세화는 문득 자신의 나이가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한 가지 일을 이십일 년이나 하고 살아온 셈이니까…. 남들은 어리다고 놀려도 정작 세화 본인은 지긋지긋하게 오래 산 기분이었다.

“사장 놈도 처음에는 저 예뻐했어요. 4환으로 이적했을 때도 독기 있어서 좋다고 그랬고. 화투는 잘 못 치는데도 큰 판에 자주 꽂아 줬고….”

열아홉 살 때 실장을 달았다. 세화가 날 때부터 이 바닥을 전전했다고 하더라도, 굉장히 이례적인 처사인 건 맞았다. 물론 삼월이니 사쿠라니 홍단이니 그런 별칭을 갖게 된 건 짜증이 났지만, 승진 자체는 싫지 않았다. 가져갈 수 있는 기본급이 달라지고 그러면 빚이 까이는 속도도 달라지는데 싫을 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지금은 안 예뻐하나?”

“보면 아시잖아요.”

세화는 쓰게 웃었다.

“제가, ……하기 싫다고 해서요.”

“뭐를, 몸 파는 거?”

“…네.”

그래서 더더욱 악착같이 일했다. 손님들이 뻣뻣하다고 욕한다길래 나름대로 사근사근하게 굴려고 애썼다. 약을 놔 줄 때 일부러 야릇한 분위기를 조성해 보기도 했다. 그래도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오면 손님들에게 하우스 전용 창부를, 사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에스코트 서비스를 적극적으로 소개해 주기도 했다.

“어쩌면 다른 애들처럼 순순히 말을 안 들으니까… 그 꼴이 보기 싫어서 그러는 것 같기도 하네요.”

전속 창부들을 이용해 손님들의 관심을 돌렸을 때, 세화는 사장을 포함한 윗사람들이 좋아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꽁씹 같은 거 안 하고, 오히려 하우스에 돈을 더 쓰고 가는 거니까. 기대보다 더 큰 수익을 올렸으니 칭찬해 주길 기대했다. 그렇지만 사장 놈은 갈수록 저를 아니꼬워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민감하게 굴어?”

“네?”

“너 내가 비슷한 주제만 입에 올려도 우는 것 같은데.”

기태정이 소파 옆에 놓인 바구니에서 담뱃갑 비닐을 까며 픽 웃었다.

“창놈, 걸레… 또 뭐였더라? 하여튼 뭐 그런 말 좀 했다고 질질 짰잖아. 심지어 너한테 한 소리도 아니였는데 괜히 혼자 놀라서는.”

“그거는… 사실 제가….”

세화는 훅 달아오른 귓불을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푹 숙였다. 언젠가 식당의 이모에게 짧게 신세 한탄을 한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제대로 속내를 털어놓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기태정에게 고백이라도 하는 것처럼 심장이 벌컥벌컥 뛰었다. 뭐, 어떤 의미론 고백이 맞긴 하지만….

“조, 좋아하는 사람하고는 아직 해 본 적 없거든요….”

담배 연기를 깊게 들이켜던 기태정이 쿨럭, 하고 짧게 기침을 했다. 못 들을 거라도 들었다는 듯이.

“…뭐?”

“아, 제가 경험이 없다는 게 아니라….”

“아니, 그런 환상이 있다고?”

“있을 수도 있죠….”

무안해진 세화는 맨발을 꿈지럭거렸다. 피는 완전히 멎었고, 새살도 돋았고, 심하게 다쳤던 부분에만 딱지가 남았다. 이 정도면 걸어 다니는데 아무 문제 없을 것이다.

“뭐, 그래. 좋아하는 사람하곤 씹질해 본 적이 없어서… 그래서?”

“그런데… 이사님이 티가 다 난다고 하셨잖아요. 그, 많이 해 본 애들은요.”

“아하. 여기저기 대준 적 있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눈치라도 챌까 봐?”

“…여기저기 대준 적은 없는데….”

“어어, 그래.”

기태정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자꾸만 피식피식 웃었다. 이 한심하고 순진한 새끼한테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조언해주면 좋을까, 그런 고민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자기야.”

평소와 다를 것 없는 그 부름에 세화의 심장이 또 덜컥 내려앉았다. 한 번 이름으로 불러 주는 걸 듣고 나니 계속 그렇게 불러 줬으면 했다.

그러다 깨달았다. 제법 긴 시간 동안, 이세화라고 불러 준 사람이 없었다는 걸.

저는 거지새끼였고 약통이었고 삼월이었지, 누군가에게 이세화였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기태정이 제 이름을 불러줬을 때 기분이 이상했던 거다. 약을 빨면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심장이 지끈거렸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기태정이야 급하니 아무렇게나 내지른 부름이었겠지만, 세화에게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멍청, 아니 순진하게 사랑 타령이나 하는, 나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놈 따먹은 게 조금 미안해서 해주는 말인데 그런 소리 하는 새끼 만나면 도망가.”

“네?”

“하우스에서 제법 많이 봤을 것 같은데. 나쁜 놈한테 코 꿰여서 자기 팔자 자기가 꼰 사람.”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랑 할 때? 허깨비 따먹는 소리 작작 하라며 기태정이 코웃음을 쳤다.

“동화에 환상 품는 것도 어느 정도여야지. 너 같은 애들이 몸 주고 마음 주고 다 퍼주다가 신세 조지는 거라고.”

악담 아닌 악담에 세화의 눈썹이 시무룩하게 아래로 휘어졌다. 그렇지만 기태정이 남자 얼굴만 밝혀서 큰일이라고 혀를 찼을 땐 더는 참지 못하고 울컥 대들고 말았다.

“아, 아니에요! 저한테 실망할까 봐 무서운 게 아니라… 그냥 제가 상대방한테 너무 미안할 것 같아서 그래요. 떳떳하게 살아온 건 아니니까…. 저 범죄자 맞잖아요.”

기태정은 아무런 대꾸도 안 했다. 슬쩍 다물린 입술 새로 욕 대신 매캐한 연기만 내뿜을 뿐이었다. 속으로는 멍청하다고 저를 비웃고 있을 게 뻔했다. 세화는 피곤한 척하며 눈을 비볐다. …괜히 말했다. 그냥 구질구질하게 살았던 시절 얘기나 들려주고 끝낼걸. 이런 반응 보일 것 같아서 그간 아무한테도 말 안 했던 건데… 왜 저도 모르게 주절주절 그에게 말을 붙이고 싶었던 걸까.

기태정과 있을 때면 확실히 조금 이상해진다. 평소와는 다르게 어리고 철없이 굴곤 한다. 처음부터 두들겨 맞고 엉엉 우는 모습을 보여서 그랬던 걸까. 기태정의 앞에선 꼿꼿한 척 버틸 필요도 없고 무심한 척, 세상일에 달관한 척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그런지 저도 모르게 한 꺼풀씩 제 속을 벗겨 내보이게 된다. 이러다 피가 줄줄 흐르고 다칠 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처음 봤을 때는.”

반쯤 잠긴 기태정의 목소리에 세화의 고개가 빼꼼 들렸다.

“저거 성깔 좀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연기를 내뱉는 그의 눈이 가느다랗게 좁혀들었다. 이 시선의 의미를 알고 있다. 지금 기태정은 저를 가늠하고 있는 거였다. 어떻게 사냥하고 또 어떻게 갈가리 찢어놓을지.

“어떻게 꺾어서 말 듣게 하나, 고민도 좀 했고. 이렇게 맹탕인 줄도 모르고서.”

얼마 전에 기태정이 그런 말을 했었다. 너 보자마자 예뻐서 박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예쁘다는 말 같은 건 당연히 믿지 않았지만, 꺾고 부러트려서 순종하게 할 생각이었다는 건 진심인 것 같았다.

기태정은 물기가 약간 남은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굵고 검은 시가가 아니라 얇고 하얀 담배가 아슬아슬하게 입술에 물려있는 모습이 조금 어색했다. 익숙하지 않다는 거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아니었다. 필터를 물고 깊이 빨 때 홀쭉해지는 볼이라거나, 담뱃대를 끼우고 있을 때 더욱 도드라지는 손가락의 구부림 같은 게… 어쩐지 시가를 피울 때보다 더 야하게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훔쳐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기태정 또한 이쪽을 바라보았다. 먹먹한 그의 동공에 작게 입을 벌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세화는 순간 목이 간질간질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저, 저도 이사님한테 궁금한 거 있는데요.”

제조에 실패한 마약처럼 뿌연 침전물이 가슴에 고였다. 답답해서 죄다 흔들어 섞어놓고 싶었다. 그래서 세화는 떠오르는 대로 아무 말이나 꺼냈다. 처음 운반책을 맡겠다고 손을 번쩍 들었을 때처럼 참으로 대책 없는 용기였다.

“이사님도 궁금한 거 물어보셨잖아요.”

무엇보다 이대로 대화를 마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시간이 다신 없을 것 같았다. 사무실로 돌아가면 예전처럼 가운만 걸치고서 기태정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그의 말도 안 되는 트집에 시달리며 다리나 벌려주게 될 것 같았다. 앞으론 이렇게 퉁명스럽게 말을 걸어 주지도, 충고를 해 주지도, 또 이름을 불러 줄 것 같지도 않아서… 그래서 마음을 바꾼 그가 제 구멍에나 관심을 보이기 전에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다.

“까분다, 또.”

“정말 궁금해서 그래요. 오늘 왜 데리고 오신 거예요? 솔직히 저 하나도 도움 안 됐잖아요.”

물론 당신의 기행이 너무 심하긴 했다는 말도 덧붙이고 싶었지만, 지금 상황에선 하나도 도움이 안 될 소리여서 속으로 삼켰다.

“짐만 된 건 알고?”

어쩐지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기태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박 소위가 최대한 유리하게 편집하긴 했겠지만, 그래도 군인 티가 덜 나는 사람을 동행으로 삼는 게 좋을 것 같았어. 지나치게 능숙하면 괜한 의심을 살 수도 있으니.”

미니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느라 깊이 숙였던 기태정의 널찍한 등이 잠시 멈칫했다. 뭐지? 의아함에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뭔가가 세화를 향해 휙 날아왔다.

“이게 뭐….”

생수병이었다. 난데없이 세화의 가슴팍을 퍽 후려갈긴 물병이 바닥으로 도로록 굴러떨어졌다. 운동 신경이 둔한 편은 아닌데, 그가 제 몫까지 챙겨 줄 거라곤 조금도 예상 못 했던 터라 당연히 받을 준비를 할 새도 없었다.

“둔해서는.”

졸지에 얻어맞아 얼얼해진 곳을 손바닥으로 문지르자, 자기가 기습한 건 생각도 안 하고서 기태정이 짧게 혀를 찼다.

“무엇보다 그 약이 진짜 완제품인지 확인해 줄 사람이 필요했고.”

아아…. 세화는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제일 중요한 문제였고, 그 이유로 기태정이 저를 여태껏 살려두고 있었던 거였다. 주제 파악. 세화는 또 저 멀리 던져 두고 있던 말을 끌어왔다. 아까부터 정신 똑바로 차리자고 생각은 하는데, 어째 생각만 하는 기분이었다.

“또 있어? 궁금한 거.”

오늘이 마지막 기회라며 기태정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틈이 날 때마다 시가를 피우는 걸 보면서도 생각했지만, 그는 엄청난 골초였다.

“어…, 운동 많이 하세요?”

흩어지는 하얀 연기를 멍하니 보고 있자니 뜬금없는 물음이 툭 튀어나왔다. 이런 거 물어보라고 기태정이 자리 펴 준 건 아닐 텐데…. 그렇지만 당장 생각나는 게 없었다. 얘기는 이어가고 싶은데 그렇다고 군사 기밀 같은 걸 물어볼 순 없으니까.

“아까 엄청 빠르게 달리시길래… 놀랐어요. 골, 아니 담배 자주 피우시는데 폐활량이….”

“빠르기만 해? 솔직히 인간의 수준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음…. 세화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어째 뉘앙스가 묘했다. 평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잘난 척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쩐지 자조하는 것 같기도 해서… 뭐라고 반응을 하기가 어려웠다.

“나도 고아야. 나는 하우스가 아니라 군에서 주워가긴 했지만.”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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