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8
“왜… 그러세요?”
“아니, 별거 아니긴 한데.”
말은 아니라고 하면서, 기태정은 세화의 발목을 쥐고 아래로 쭉 잡아당겼다.
“좀 이상해서.”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세화는 저도 모르게 상의 끝단을 꼭 붙들었다. 기태정이 수시로 가운을 벌려대는 바람에 생긴 습관이었다.
숙소처럼 쓴다는 말이 사실이었는지, 다행히 벙커엔 실내복도 갖춰져 있었다. 도저히 눈 뜨고 봐줄 수 있는 꼴이 아니라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씻기는 씻었는데, 옷은커녕 가운도 없는 것 같아 절망하던 와중이었다. 아래만 두르고 나가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발바닥에서 피가 너무 심하게 나서 수건부터 꺼내려고 선반을 뒤적인 순간, 옆에 곱게 놓인 실내복이 눈에 들어왔다. 심지어 새것인지 비닐 포장까지 되어있었다.
‘못 찾을 줄 알았는데.’
모락모락 김이 나는 세화의 싱글벙글한 얼굴을 보고서 기태정은 아깝게 됐다는 듯 혀를 찼다. 박 소위가 데리러 오기 전까지 알몸으로 있어도 되지 않아 다행이긴 했지만, 여전히 속옷은 입지 못한 상태여서 조심스러웠다. 직전까지 그렇게 고생해놓고선 설마 섹스하자고 덤빌 것 같진 않은데…. 그래도 모를 일이었다. 기태정은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세화의 예상대로 움직여준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김석철이 너한테 먹인 건 마약 아니었잖아.”
섹스 생각이나 하던 세화를 꾸짖기라도 하듯, 기태정은 사무적인 태도로 세화의 발바닥만 들여다보았다.
“실어다 나르면서 먹기는 했는데요….”
“그러니까, 그 새끼가 만들고 싶어 한 약은 마약 성분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텐데?”
살점이 너덜거렸던 아까와는 달리 매끈매끈해지기 시작한 세화의 발바닥을 들여다보며, 기태정이 중얼거렸다.
“그렇긴 한데….”
제조 과정을 실제로 본다면 누구도 마약에 쉽게 손을 뻗지 못할 거다. 타르, 독, 죽은 동물의 피나 가죽, 정체를 알 수 없는 화학물질, 임상 시험을 거치지 못한 의학 폐기물… 뭐 그런 것들을 끓이고 빻은 다음, 흡입하든 혈관에 쏘든 하는 거다. 그딴 걸 먹고 몸이 망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김 소위는 좀 더 안전하지만, 효과는 끝내주는 유사 마약을 만들고 싶다며 세화에게 도움을 구했다. 대마와 필로폰을 몇 번 김 소위의 손님들에게 운반해주고 난 다음이었을 거다.
“너 정확히 체질이 뭐야. 안 좋은 거 처먹으면 몸에 쌓이긴 해도 너는 느끼질 못하는 거야, 아니면 몸에서 자체적으로 해독이라도 하는 거야.”
“그, 글쎄요….”
기태정의 말을 듣고 나니 세화도 의아해졌다. 여태 의식하지 않았던 부분이기도 했고… 딱히 그걸 구별할 일도 없었다. 어릴 때부터 운반책을 자처하며 온갖 마약에 손을 대긴 했어도 그로 인해 크게 앓았던 적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기태정이 패치를 감아줬을 때도 최음제에는 확실히 반응했지만, 직전에 먹은 마약 성분들이 갑자기 혈관 안을 날뛰고 역류하고 그러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멀쩡히 살아있는 거 보면 큰 문제는 없는 거 아닐까요?”
“글쎄…. 돌아가면 확인 좀 해봐야겠는데.”
“왜, 왜요? 뭔가 이상한 거예요?”
“정상은 아니지.”
기태정이 심각한 낯으로 제 발바닥을 들여다보기에, 세화도 덩달아 긴장했다. 이 일 하면서 먹고살기 딱 좋은 체질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도 모르는 문제가 있었던 걸까?
“뒤만 잘 젖고 임신은 못 하면 큰일이라고.”
“네?”
저 임신 타령 좀 제발 그만 할 수 없나? 상처를 가늠해보듯 발바닥 여기저기를 꾹꾹 눌러보던 기태정의 손길이 발가락을 툭 건드리고, 순식간에 발꿈치와 발목까지 타고 올라왔다. 세화는 평생 문제가 없었던 제 몸의 체질보다는 이 남자와 함께 있는 지금이 더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왜 그러세요….”
도저히 기태정의 좆을 받아낼 자신이 없었다. 그건 너무 크고, 힘들고… 무엇보다 그의 음담을 견뎌낼 기력이 없었다. 이 상태로 기태정의 헛소리를 들으면 꼴사납게 엉엉 울 것 같았다. 미약하게 몸을 뒤틀자, 의외로 기태정이 쉽게 손을 풀었다.
“발목이 약하네.”
‘도망은 잘 못 치겠다, 너.’ 하면서 기태정이 악덕 포주처럼 웃었다. 순간 오싹해져서 소파 등받이로 몸을 딱 붙였더니, 그가 일부러 발을 잡아당겼다가 놓으며놓으며 장난을 쳤다.
“어, 곧… 데리러 온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 박 소위라는 분….”
분위기를 환기하려 필사적으로 다른 주제를 입에 올리자, 기태정이 봐준다는 듯 몸을 물려주었다.
“이쪽이야 벙커 안으로 무사히 들어왔고, 물건도 확보했으니까… 거기 상황 완전히 정리되는 거 확인하는 게 우선이지.”
기태정은 어쩌면 대피소 일은 반나절 이상 걸릴 수도 있다고 대꾸했다. 그러냐며 고개를 끄덕이던 세화는, 문득 그의 말투가 예전과는 조금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실없이 놀리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건 똑같은데… 뭐랄까. 더 투박하고 거칠긴 해도, 희롱하는 느낌이 많이 사라졌다. 시도 때도 없이 자기라고 불러댈 때는 저를 사람으로도 봐주지 않는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조무래기 정도로는 여겨주는 것 같았다. 물론 이것도 세화만의 생각이긴 했지만… 그래도….
세화는 무릎을 세워 웅크리고서, 기태정이 실컷 가지고 놀아 붉어진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러면. 조금은 가까워진 것 같으니까…. 아까 무슨 의도로 자기 이름을 불렀던 건지 물어봐도 되려나? 물론 기태정은 아무 생각 없었을 것 같긴 한데, 여태까지는 제 이름이 뭔지 알면서도 단 한 번도 그렇게 불러준 적 없었으니까….
“어떻게 알았어?”
“네?”
말을 꺼낼 틈을 엿보고 있던 세화가 화들짝 놀라자, 그가 수상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죄, 죄송해요… 잠깐 다른 생각 하느라고요. 뭐라고 하셨죠?”
“중독 안 되는 체질인 거 어떻게 알게됐냐고. 약을, 그것도 여러 번 해보고 나서야 깨달았을 거 아냐.”
아… 왜 약에 손을 댄 건지 물어보는 거였구나. 세화는 곰곰이 처음 마약에 손을 댔던 때를 떠올렸다.
“하고 싶어서 한 건 아니고요…. 태어날 때부터 저는 그냥…, 이런 곳에 있었는데요….”
나이를 다 헤아려도 열 손가락을 넘기지 못하던 어린 시절엔 철부지처럼 형이나 누나들의 사연을 부러워하곤 했다. 집이 망해서, 사기를 당해서, 꿀꿀해서 어쩌다 도박에 손을 댔다가, 사업을 준비하다가, 원래 노는 걸 좋아해서 막살다 보니까…. 하우스 밖에서 자기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쩌다 이 꼴이 되었는지 털어놓으며 술을 들이켜는 게 부러웠다. 고단하고 쓸쓸하게 눈을 감을 때마다 드리우는 캄캄한 그림자가 어쩐지 멋있어 보였다.
“제가 성이 이씨잖아요. 그것도 사실 별 이유 없어요. 2원에서 태어났으니까 이씨라고 하는 거고… 존나 센 화투패 잡으라고 세화, 그렇게 지어준 이름이래요. 어떤 화투 선수가요.”
세화에겐 그런 사연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워할 하우스 밖의 삶도, 추억도 없었다. 창고 같은 곳에서 눈을 뜨면 하루가 시작됐다. 남들이 먹고 남은 찌꺼기나 눈치 보면서 얻어먹다가, 하라는 일이 있으면 쭐레쭐레 따라가서 하고 왔다.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그 하우스의 꽁지꾼은 세화가 너무 어려서 죽일 수 없다고 했다. 회수할 돈은 많은데 아직 몸이 덜 자라서, 장기 같은 걸 떼기도 어렵다면서.
“그렇게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쩌다 기회가 생겼어요. 운반책을 할 수 있는 기회가요.”
동그란 사탕 같은 걸 삼키고 있다가, 주는 약을 먹고 다 토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라고 했다. 다른 어린 애들은 전부 미적거리며 아저씨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지만, 세화는 용감하게 손을 들었다. 같은 방을 쓰는 형들이 매일같이 두들겨 패고 저에게 침을 뱉는 게 싫어서, 그 형들과 하루라도 떨어져 있을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그렇게 몇 번 성공하니까 아저씨들이 저 못 건드리게 했거든요. 덜 맞고, 따뜻한 밥도 많이 주니까… 좋았어요. 그래서 계속하다 보니까, 뭐….”
어느 날, 평소 하던 것처럼 꿀꺽 동그란 것을 삼켰는데 어떤 아저씨가 뒤늦게 난리를 쳤다. 포장 잘못했다고, 패킹 한 번 더 해야 했는데 몰랐다고. 약 그대로 묻은 겉봉을 저 어린 게 꿀떡 삼켰다니 오늘 초상 제대로 치르게 생겼네, 하고 다들 혀를 찼는데… 놀랍게도 세화는 죽지 않았다. 그런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면서 제 체질이 조금 특이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 구질구질한 얘기에요.”
피곤해서 그런가. 말을 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자기 사연에 취해서, 주절주절 묻지도 않은 얘기까지 끄집어내고 말았다. 기태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세화를 바라보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