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37)화 (37/144)
  • #037

    차가 속력을 올릴 때마다 글자의 검붉은 광택이 번들번들 빛났다. 조금 전까지 세화를 공포에 떨게 했던 그 폭탄을, 그 불길을 닮은 빛깔이었다. 이런 차는 난생처음 타보는 세화였지만, 저 버튼을 함부로 누르면 위험해질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설마 차가 폭발하진 않겠지만,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 건드려봤자 딱히 좋은 그림이 나올 것 같진 않았다.

    여기서 밖으로 나가려면 지금이라도 핸들을 틀어야 한다. 공터가 좀 넓긴 하지만 지금 이 속도로 계속 직진한다면 담벼락에 들이박는 것도 순식간일 거다. 심지어 담벼락 위에는 무시무시한 경고문이 붙어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전기 충격이 가해질 수도 있다, 뭐 그런 내용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기태정은 핸들을 돌릴 생각이 없는 듯했다. 지금껏 그가 벌였던 무모한 일을 생각해본다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세화는 오들오들 떨며 이 최신형 차량에 탈출 기능 같은 게 있기만을 빌고 또 빌었다.

    “준비됐어?”

    기태정은 콘솔에 받쳐두고 있던 바주카를 제대로 움켜쥐고는 몸을 일으켰다. 세화는 순간, 어떤 불길한 예감이 끼쳐와 고개를 내저었다. 안 돼….

    “이, 이사님…!”

    저 미친놈이, 여기서 저 총을, 그것도 조그만 피스톨도 아니고 바주카를 쏘면 어쩌자는 거야? 무기류는 잘 모르지만, 크기가 크면 반동도 그만큼 크다는 것 정도는 안다. 심지어 저건 바주카다. 이런 상황에서 샷을 날리면 차체에도 당연히 충격이 갈 수밖에 없을 거다. 그런 와중에 속도 설정은 줄여놓지도 않고…. 진짜 같이 죽자는 건가? 아니면 죽이고 싶은 건가? 약은 무사히 빼냈으니 이제 저는 쓸모없다는 걸까?

    “운전은 차가 알아서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리고 그거 안 누르면.”

    생략된 말은 아마도 ‘너랑 나 둘 다 죽어.’ 일 거다. 오늘 가장 많이 들은, 그리고 세화의 숨을 턱턱 막히게 했던 말이기도 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기태정은 세화의 마음에 드는 소릴 단 한 번도 한 적 없었지만, 저건 그중에서도 제일이었다. 시키는 대로 안 하면 여기서 너랑 나 둘 다 끝이라는 말.

    그리고 기태정의 반협박을 도와주기라도 하듯 뒤쪽에서 귀가 멀 것 같은 굉음이 꽝꽝 울렸다. 오래된 건물이 더는 버티질 못하는 것 같았다.

    “이세화!”

    무슨 신호를 어떻게 주겠다는 건지 물을 것도 없었다. 바로 지금이었다. 세화는 어떤 판단도 내릴 수 없었다. 그저 기태정의 기백에 놀라 절로 버튼을 꾹 눌러버렸다. 일순 몸이 뒤로 훅 쏠렸다 앞으로 튕기어 나왔다. S가 스포츠 모드를 뜻하는 버튼이었는지, 엔진이 위협적으로 벌컥거리기 시작했다.

    “이, 이러다가, 이사님…!”

    새빨간 스포츠카가 무서운 속도로 질주했다. 까마득히 멀게 느껴졌던 담벼락이 전면 유리창의 프레임 안으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충돌한다. 세화는 이런 차를 운전해본 적도 없었고, 뭘 눌러야 멈출 수 있는지도 몰랐다.

    “이거 부딪… 혀요!”

    기태정은 세화의 비명을 배경음악 삼아, 건물을 향해 바주카를 조준했다. 점점 멀어지는 출구, 그것도 틈을 적당히 벌리고 나온 철문의 좁은 틈으로. 원리는 이전과 비슷했다. 목표를 설정하고, 어떻게든 이루겠노라 생각하면 몸이 알아서 움직인다. 장전하고 방아쇠를 당기자, 기분 좋은 반동이 온몸을 훑고 갔다.

    철문의 틈새로 탄환이 쏙 미끄러져 들어갔다. 기태정은 안에서 작게 번쩍이는 불길을 확인하고 바주카를 내던졌다. 그와 동시에 심상치 않은 흔들림이 느껴졌다. 아까 뚜껑을 까놓았던 기름통이 드디어 제 역할을 하려는 모양인지, 용오름이라도 하듯 검은 연기가 너풀너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몸을 내려 운전석에 착석하자마자, 뒤에서 귀를 찢을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다소 거리를 벌리고 있음에도 차체가 불안하게 흔들릴 정도였다.

    “이, 이사님, 이러다가, 저기에…!”

    폭음에 잠시 정신을 빼앗겼던 세화가 새파랗게 질린 입술로 다시 비명을 내질렀다. 정말로, 담벼락이 코앞이었다. 기태정은 그게 뭐가 대수냐는 듯한 얼굴로 센터페시아의 버튼 몇 개를 연달아 눌렀다. 핸들을 쥐는 손길이 태연하기만 했다.

    “……!”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맹렬하게 내달리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차체가 가볍게 떠올랐다. 품에 끼고 있는 케이스가 흔들려서, 세화는 그 와중에도 더듬더듬 한 손으론 물건을 움켜쥐었다. 얼굴에 붙이고 있던 스킨과 가발 같은 건 전부 벗겨져 나동그라진 상태였다. 찝찝하고 텁텁한 눈물이 주룩주룩 쏟아졌다. 세화는 몸을 잔뜩 웅크렸다. 죽을 거다. 이번엔 틀림없이 죽는다. 기태정은 어떻게든 빠져나가고, 저는 이대로 차와 함께 불에 타버리고 말 거다. 먹먹한 눈물에선 재와 기름의 맛이 났다.

    “……?”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각오하고 있던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담벼락과 충돌하는 소리도, 오늘 질리도록 들었던 폭발음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뭐…, 지. 의아함을 느낀 세화가 그제야 실눈을 떴다.

    “왜 이렇게 겁이 많아?”

    어이없어하는 기태정의 목소리가 정수리 위로 내려앉았다. 세화는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차가… 날고 있었다. 난다, 고 하는 것보다는 낮게 떠 있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지만, 그래도….

    “이게 대체….”

    “요즘 차량은 비상 비행 기능 다 달고서 나오잖아.”

    그런 게 있다고만 들었지, 요즘 차는커녕 옛날 차도 가져본 적 없는 세화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담벼락과 그 위에 설치된 무시무시한 전기 장치를 피해, 잘빠진 스포츠카가 나비처럼 사뿐사뿐 날아다녔다. 우중충한 회색 건물 틈새를 아슬아슬하게 질주하자, 탁 트인 평야와 하늘이 펼쳐졌다. 비록 다 죽은 누런 풀이긴 했어도 1원에 이런 너른 풍경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바다 본 적 있어?”

    “…아니요.”

    “저 밑으로 내려가면 나와. 곧 절벽이거든.”

    “…이사님, 제발.”

    더 놀랄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기태정은 숨 쉴 틈도 주지 않고서 사람 진을 빠지게 했다.

    “별로 대단한 걸 하지도 않았는데 맨날 울고 놀라니까 미리 말해주는 거잖아.”

    사이좋게 시야를 반씩 나눠가지고 있던 하늘과 땅이 점점 벌어진다. 잡아먹을 것 같은 새파란 하늘이 점점 유리창을 꽉 메웠다.

    “내가 말 안 했나?”

    뒤집어쓰고 있던 스킨을 떼어내면서, 기태정이 잔뜩 짓눌렸던 머리칼을 헝클었다.

    “나 전투비행단장이라고.”

    목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닦으면서, 그가 후련하다는 듯 웃었다. 전투비행단장이라는 게 준장이라는 계급과 뭐가 다른 건진 모르겠지만, ‘비행’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걸 보니… 아마도 기태정이 공군이라는 뜻 같았다. 뉴스 같은 거 잘 안 보는 세화도, 공군이 군대 내에서 가장 서열이 높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총을 쥐었을 때처럼 기태정이 무심하게 핸들을 툭툭 건드릴 때마다 차의 높낮이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제법 유려한 솜씨긴 했다.

    “겁이 많은 건 알겠는데, 이번엔 정말로 믿어도 돼.”

    결 좋은 머리카락을 따라 빛무리가 너울너울 춤을 췄다. 쏟아지는 빛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기태정은 부드럽게 속력을 높였다.

    “하늘 위에선 무적이니까.”

    뒤에서는 여전히 폭음이 아련하게 울리고 있고, 옆에 앉은 무정한 남자는 저 너머로 함께 추락하자고 속삭이고 있다. 세화는 하늘과 땅의 경계가 사라지는 지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온통 새파랗기만 해서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

    “앗, 따거!”

    기태정이 건네준 분말 연고는 효과는 좋았다. 벌써부터 물집이 가라앉고 새살이 돋았다. 대신 그만큼 따갑고 화끈거렸다. 세화는 쓰읍, 하고 미간을 찌푸리며 파닥파닥 손부채질했다.

    절벽을 가로질러 도착한 곳은 작은 벙커였다. 말이 벙커지 공군 전용 숙소 같은 거라고 했다. 전투 비행 훈련 도중 불가피한 사정이 생기면 여기서 쉬다 가고, 놀다 가고 그러는 곳이라고. 그래서 그런지 군사 시설인데도 집처럼 아늑하고 깨끗했고 있을 것도 다 있었다. 기태정은 후미진 곳에 있어 그런지 너무 좁다고 투덜거렸지만, 세화가 보기엔 궁궐이 따로 없었다.

    “뭐하냐?”

    씻고 나온 기태정이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며 시큰둥하게 물었다.

    “좀 아파서요.”

    “약 줄까?”

    세화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몸을 딱 굳혔다.

    “…아뇨, 괜찮아요.”

    “속 안 좋을 때 먹으면 나아지기도 해.”

    “그런 게 아니라… 익숙해지면 안 되니까요. 저는 아프다고 그런 약 매일 같이 먹을 수 있는 사람도 아닌데….”

    세화는 그 망할 대피소 안에서 했던 다짐을 다시 한번 속으로 중얼거렸다. 주제 파악, 주제 파악….

    “그리고 어차피 효과도 없잖아요. 지금은 그, 까만 거… 패치 안 감았으니까요.”

    “그건… 아아…. 그랬던가.”

    무언가 대꾸하려던 기태정이 의뭉스럽게 말을 흘렸다.

    “잠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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