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36)화 (36/144)
  • #036

    기태정은 이세화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름대로 애쓰고 있긴 한데, 솔직히 기태정이 몇 걸음만 성큼 다릴 뻗어도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속도였다. 어쨌든 이세화는 부지런히 걸었다. 그러다 잠깐 천장을 올려다보기도 하고…. 아마도 울지 않겠다고 용을 쓰는 중인 듯했다. 뭐 저렇게 서글픈 일이 많은지. 눈물도 많고 아래도 잘 젖고…. 어쩌다 입술이 눈에 들어와서 보면 거기마저 늘 촉촉했다.

    “귀찮게 됐네.”

    살려주겠다는 약속은 괜히 해서. 무릎 아래부터는 좀 망가져도 애 가지는 데 문제는 없을 것 같았지만, 저를 포기하지 말아달라던 이세화의 부탁에는 ‘무사히’라는 애원 또한 숨겨져 있었다는 걸 잘 안다. 끝까지, 무사히. 혼자서야 어려울 건 하나도 없었지만, 이세화가 문제였다.

    기태정은 Z2의 잠금장치에 시계를 가져다 댔다. 군인들이 차고 있는 시계는 단순한 시계가 아니었다. 신분 증명부터 보안 센서, 카드, 핸드폰, 태블릿…. 그야말로 모든 전자기기의 역할을 해낼 수 있는 손목 위의 슈퍼컴퓨터였다. 그리고 무려 준장인 기태정의 시계로는 군대 내에서 해제하지 못할 것이 없었다. 물론 지금 뒤집어쓴 탈의 주인은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해킹 중인 박 소위가 이런 장면은 알아서 삭제하는 중일 거다.

    딸각, 뚜껑을 여는 것과 동시에 최대한 어깨를 틀었다. 거리가 조금 짧긴 했지만, 훈련에서든 실전에서든 이와 비슷한 일을 몇 번이나 해본 적 있다. 그리고 언제나 성공했다. 기태정은 신체의 모든 감각을 한계까지 끌어냈다.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 건지는 기태정 자신조차 몰랐다. 저를 데려온 군부 사람들도 나중엔 징그러워했고 무서워했다. 그렇지만 이 사람 같지 않은 감각의 제어 덕분에 기태정을 여태 죽지 않을 수 있었다.

    귀를 따갑게 했던 온갖 소음이 사그라든다. 기태정은 자신의 숨소리마저 지운 채 폭탄의 궤적에만 집중했다. 쌔액, 동그란 구체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소리만 생생했다.

    잠시 내려두었던 바주카를 챙겨 들고, 몸을 날린다. 모의 훈련부터 실전까지 전부 지켜본 박 소위가 이렇게 말한 적 있었다. 세상은 전부 멈추고, 오직 준장님만 몇 배속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고. 이번에도 부디 그러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옆에 진열된 철제 선반을 아무렇게나 잡아당기며 쓰러트렸다. 그래봤자 두어 개 정도라 실질적인 방패는 되어주지 못할 것 같았다. 얼마나 남았지? 공기를 가르던 구체의 속도가 서서히 느려진다. 높게 치솟았던 곡선이 슬슬 하향할 타이밍이었다.

    더욱 속도를 붙였다. 이젠 제법 익숙해진 청승맞은 뒷모습이 눈앞에서 흔들거렸다. 기태정은 앞에서 거북이처럼 기어가고 있던 이세화의 목덜미를 붙들었다. 덥석 움켜쥐자 켁, 하고 기침하며 버둥거린다. 손이 커서 다행이었다. Z2의 케이스와 이세화를 동시에 움켜쥘 수 있어서. 물론 케이스는 뚜껑 부분만 덜렁거리며 손가락 틈에 끼우고 있는 채였지만.

    놀라 저를 돌아보는 눈이 동그랬다. 음, 역시 렌즈는 끼우지 말 걸 그랬지. 그런 태평한 생각을 하는 것과 동시에 펑, 하고 폭탄이 터졌다.

    아무리 위력이 작다고 한들 폭탄은 폭탄이었다. 뒤에서 훅 끼쳐오는 열풍에 기태정과 이세화의 몸이 앞으로 확 떠밀렸다.

    “아윽…!”

    특히 이세화는 비명도 제대로 내지르지 못하고 바닥으로 크게 나동그라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폭탄이 철창과 부딪히느라 뒤쪽으로 힘이 쏠렸다는 거고, 선반에 쌓여있던 화재 진압 도구들 덕분에 불길이 생각보다 크게 일어나진 않았다는 거다. 물론 어디까지나 ‘생각보다’ 그랬다는 거고, 여기서 조금 더 망설였다간 금세 화마에 잡아먹힐 터였다.

    “쿨럭….”

    이세화는 넘어지면서 가볍게 뇌진탕이라도 왔는지 정신을 못 차리고 헐떡였다. 아까까지는 살갗만 까져있었는데, 인제 보니 발목도 퉁퉁 부어있었다. 저렇게 약해서 어디다 써먹어, 저걸.

    “약.”

    혀를 차며 물건을 내놓으라고 하니, 이번엔 되묻지도 느릿하게 굴지도 않고 잽싸게 상의를 들어 올린다. 기특하게도 지금이 다급한 상황이라는 건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퍼를 열 정신머리까지는 없을 것 같아, 이후로는 기태정이 직접 했다. 크로스백을 열어 안에 든 주사기를 Z2의 케이스 안에 쓸어 담았다. 뚜껑을 닫자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잠금장치가 실행되었다.

    기태정은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올리며 천장을 향해 물건을 흔들어 보였다. 귀에 끼고 있던 인이어에서 툭툭, 노크하는 것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확인 완료했다는 신호였다.

    “거의 끝났어.”

    기태정은 구형 바주카의 상태를 확인했다. 어찌나 고물인지 선반 몇 번 쳤다고 벌써부터 골골대고 있었다. 앞으로 두어 발 쏘는 게 한계지 싶었다. 그 이상은 바주카를 쥔 제가 위험해질 것 같았다. 기태정은 아래 선반에 놓인 비상용 기름통의 뚜껑을 전부 열어놓고, 이세화를 돌아보았다.

    “들고 있을 수 있지? 이젠 폭탄 아니니까.”

    끄덕이는 고갯짓에 영혼이 없었다. 열기로 들떠 벗겨지기 시작한 스킨 아래로 검댕이 묻어있었다. 꼬질꼬질한 몰골이 아주… 공장에서 사는 똥개도 저거보단 멀끔할 거였다. 기태정은 자신의 입매가 부드럽게 허물어지는 것도 모르고서 속으로 혀를 찼다.

    “이번엔 못 업어줘.”

    그리고 이번엔, 이세화의 답 또한 필요하지 않았다.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Z2 케이스를 꼭 끌어안은 이세화를 어깨에 들쳐메고, 기태정은 다시 달렸다. 9-5쯤에서야 복도를 채우고 있던 지긋지긋한 선반들이 사라졌다. 여기서 조금만 더 나아가면 출구였다.

    그와 동시에 천장이 불안하게 흔들거렸다. 숨어서 지켜보던 쥐새끼가 마지막으로 발악하는 모양이었다. 기태정은 짐짝처럼 두르고 있던 이세화를 잠시 내려놓고, 철제 선반을 세게 걷어찼다. 넘어지려던 선반은 막 아래로 뻗어오던 철창과 절묘하게 맞물려, 의도치 않게 두 사람에게 시간을 벌어주었다.

    “이세화!”

    아직도 안에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그를 부르자, 충격으로 흐리멍덩하던 눈동자에 조금이나마 총기가 살아 돌아온다.

    무서운 기세로 선반을 우그러뜨리려는 철창 아래를 통과할 땐 봉사처럼 눈을 감고 허우적거리긴 했지만, 피로 흠뻑 젖은 발을 하고서도 이세화는 기태정을 향해 열심히 걸어왔다. 뭐, 자기 나름대로는 달려오는 중일 거다.

    사실 가서 도와줄 수도 있었다. 아니, 그편이 확실히 빠를 거다. 업고 안을 것도 없이 질질 끌고 나가버리면 그만이었다. 발이 다쳤으니 아프다고 징징댈 수도 있겠지만 이세화는 그보다 죽는 게 더 싫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절뚝거리며 저를 향해 걸어오는 이세화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철제 선반을 있는 힘껏 내리찍고 있는 철창, 계속되는 폭발음, 저 너머로 붉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불길…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뒤로하고 오직 저만 바라보고 있는 이세화를, 그 얼굴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기태정은 잠시 길을 잃은 듯한 눈길로 이세화의 어설프고 서러운 걸음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정신을 차린 건 핫도그 포장지 같은 상의가 손끝에 걸렸을 때였다. 기태정은 그대로 이세화를 세게 당겨 안고, 출구를 열었다. 잠금쇠가 걸려있는 철문이었으나, 발로 퍽퍽 까서 밀어젖히니 둘이서 나갈 수 있을 만큼의 틈새는 벌어졌다.

    그와 동시에 위에서 쏟아지는 철창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철제 선반이 반쯤 우그러졌다. 골이 다 울리는 흉측한 소리에 이세화가 흠칫 몸을 떨었다.

    “…끝, 이제 끝….”

    마약이 담긴 케이스를 꼭 안고서 이세화가 초조하게 두리번거렸다.

    “이제 끝난 거예요?”

    “거의.”

    출구 바로 뒤는 공터였는데, 상주 군인들이 주차장으로 쓰고 있던 건지 차량 몇 대가 보였다. 비상시 탈출 장비를 설치하라고 설계할 때부터 비워놓은 공간일 터였다. 그걸 자기들 주차장으로 쓰고 있다니. 진짜 정신 빠진 새끼들이었다.

    기태정은 가장 가까이에 주차된, 아마도 누군가 영혼까지 끌어다 할부로 샀을 고급 스포츠카를 점찍었다. 이미 뒤졌을지도 모르는 놈의 절규가 들리는 듯했다. 그러게 누가 여기다 주차하랬나.

    차의 상태를 확인하려 보닛을 짚은 것과 동시에 툭툭툭, 하고 인이어를 통해 신호가 왔다. 필요한 자료는 모두 확보했고 CCTV 회선도 다 망쳐놨으니, 이젠 눈치 볼 것 없이 마음껏 날뛰어도 된다는 허락이었다.

    기태정은 도어의 센서에 시계를 가져다 댔다. 군인 명의로 등록된 차량은 개인 재산일지라도 비상시 징집 대상이었다. 혹시나 미등록 차량이라면 조금 골치 아플 뻔했는데, 다행히 수월하게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기태정이 버튼을 눌러 시동을 걸고, 선루프를 젖히는 사이 이세화는 너덜거리는 가짜 얼굴 거죽을 붙들고 조수석으로 향했다. 센터페시아에 휘황찬란한 자동차 로고가 번쩍이더니, AI가 경쾌한 목소리로 자율 주행 모드로 설정되었음을 알렸다.

    “이제 출발할 건데.”

    기태정은 세워둔 바주카를 끌어오며 운전석의 문을 닫았다. 기다랗고 커다란, 무시무시한 물건이 콘솔을 쿡 찍어누른 채 선루프 밖으로 위풍당당하게 솟아있었다. 세화는 저도 모르게 총신 아래를 붙들었다. 불안하게 흔들흔들하는 것이, 어째 저를 향해 쏟아질 것만 같았다.

    핸들까지 바투 붙은 좌석이 불편한 듯 기태정이 신경질적으로 버튼을 이것저것 눌러댔다. 씨발 다리도 짧은 새끼가 뭐 이런 차를 사서, 하고 짜증을 냈던 것도 같다. 액셀을 밟자마자 차가 쏜살같이 쏟아져 나갔다. 활짝 열린 선루프를 타고 무시무시한 배기음이 흘러들어왔다. 안전벨트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탓에 세화의 몸이 앞으로 퍽 쏟아졌다. 가뜩이나 너덜거리던 스킨이 크게 펄럭일 정도의 충격이었다.

    “너 고양이야? 뭐 그렇게 몸이 흐물거려.”

    핀잔을 준 기태정이 세화의 손을 잡아끌었다.

    “벨트 매고, 내가 신호 주면 이 버튼 꼭 눌러.”

    손가락이 닿은 곳은 기어 부근에 S라고 쓰인 버튼 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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