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35)화 (35/144)
  • #035

    “이건 무슨 뜻인 것 같아?”

    기태정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세화는 죔죔 주먹을 쥐었다 펴며 잡생각을 몰아냈다. 주제 파악 잘하자고 다짐해놓고선 또 허튼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지금껏 쉬어본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저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틈이 생기니 자꾸만 허튼 생각이 몰려왔다. 힘들었던 예전 일이라거나. 그때와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요즘의 상황이라거나. 제법 인이 박였다고 자신해왔지만, 실은 사람들의 멸시와 냉대가 아무렇지도 않을 순 없었다는 거나…. 자기 자신을 자꾸만 초라하게 만드는 그런 상념들이 스멀스멀 피어올라 세화를 우울하게 했다.

    주제 파악, 주제 파악. 세화는 입 안으로 열심히 혀를 굴렸다. 며칠 놀았다고 아주 나사가 다 빠져버렸다. 다친 발을 알아봐 주지 않는다고 섭섭한 마음이 들다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 남자에게 말이다.

    “이런 무늬에도 의미가 있나? 아까 쌍피처럼.”

    그가 가리킨 것은 먼지로 뽀얗게 덮인 배지들이었다. Z2를 꺼낸 9-2구역의 선반에는 마약이 담긴 포댓자루는 없었다. 대신 세화에겐 낯선 물건들로 가득했다. 대포를 축소해 놓은 것 같은 박격포와 명칭도 모르는 무시무시한 총기류, 오래된 표창장, 낡은 문서와 앨범… 나머지는 처음 보는 거라서 뭔지도 유추할 수 없었다. 군사 시설이니 군에서 쓰는 물건이겠거니, 할 뿐이었다.

    “화투에서 쓰이는 무늬는 아니에요. 포커도 아닌 것 같고요.”

    “흠….”

    기태정은 엄지로 턱을 받치고선 검지로 코끝을 툭툭 두드렸다. 중지에 지그시 눌린 입매가 삐뚜름해졌다. 낯선 외피 위로 세화가 알고 있는 그의 진짜 얼굴이 덧입혀졌다. 노란 조명과 정신 나간 듯 윙윙 우는 빨간 경고등, 적당히 어두컴컴한 밀실은 기태정의 얼굴에 깊이감을 부여했다. 아름답고 음울하다. 처음 이 남자를 봤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다. 떠오르는 태양보다는 저녁노을이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혹시 모르니 챙겨갈까?”

    형식만 의문일 뿐, 네가 알아서 챙기라는 명령이었다. 세화는 군말 없이 복대처럼 두르고 있던 크로스백을 열었다. 주사기를 넣은 쪽은 잘 피해서 앞쪽의 빈 포켓을 열고 배지를 채워 넣었다.

    “그런데 이사님, 이거요….”

    순간, 천장 쪽에서 뭔가가 콰득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지퍼를 닫으며 배지에 관해 물어보려던 세화는 그대로 얼어버렸다. 지금 지퍼 잠그는 소리가 이렇게 무시무시하게 울린 건가? 타이밍이 너무 절묘하니 엉뚱하게도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 사실 치솟는 불길함을 애써 외면하고 싶어, 뭔지 알 것 같으면서도 부정부터 하고 싶은 마음이기도 했다.

    설마. 아닐 거야. 아무 일 없을 거야. 그러나 그런 세화를 비웃기라도 하듯, 두 사람의 어깨 위로 돌가루가 후드득 떨어졌다. 목을 움츠리고 천장을 흘끔 보니… 실금 같은 균열이 일고 있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실금은 굵직한 선이 되고, 면으로 커져 나갔다.

    “이런 씹…!”

    기태정이 세화의 손목을 휙 잡아당겼다. 천장이 뱀처럼 아가리를 쩍 벌리며 갈라지고 있었다. 무언가를 먹어 치우는 듯 와드득 와드득 망가지고 부서지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복도를 쩌렁쩌렁 울렸다.

    “이거 제, 제가 그런 게 아니라…!”

    하필이면 지퍼를 채우는 타이밍에 뭔가 일이 벌어져서, 세화는 변명부터 했다. 습관이었다. 일단 아니라고, 몰랐다고, 죄송하다고 부정하고 사과부터 하는 것.

    “그냥 저는 가방에 이거 넣으려고….”

    도리질을 치던 세화의 고개가 뚝 멈추었다.

    “무슨 헛소리야. 네가 지퍼 잠그는 거랑.”

    조금 전까지 세화가 서 있던 자리에 철창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저거 떨어지는 게 무슨 상관인데.”

    시커먼 방화벽과는 달리, 쇠창살이 촘촘히 끼워진 말 그대로 철창이었다. 그대로 서 있었다면 꼼짝없이 갇혔을 거다. 아니, 머리 위로 떨어진 쇠봉을 맞고 죽었을지도 모른다.

    “…저게 대체….”

    -아아, 꼼짝 마라. 너희들은 포위됐다.

    사이렌 소리가 잦아들더니, 지직거리며 음성이 흘러나왔다. 살아있는 적이 있다는 뜻이니 놀라야 하는데… 도리어 안심이 되어서, 세화는 가슴을 쓸었다. 누가 시스템을 가동한 거구나. 요즘 별의별 일을 다 겪어서 그런지 혹시 이 배지가 무슨 버튼이라도 되는 거 아닌가, 일순 그런 상상을 했었다.

    -곧 지원군이 올 예정이다. 너희들이 일급 범죄자인 것도 아, 알고 있다. 우리 군은 너희들을 용서치 않을 것이며….

    이런 경고는 처음 해보는지, 말을 더듬는 건 물론 중간중간 음 이탈도 일어났다. 본인도 겁에 질린 모양이었다. 세화는 그제야 긴장이 조금 가시는 기분에, 딱딱하게 굳은 어깨를 풀었다.

    “순순히 투항하면 살려준다고 해도 들을까 말까 하는 마당인데 저 새끼는 잡으면 즉결 처분하겠다는 소리나 하고 있네.”

    기태정이 신랄하게 비웃으며 선반으로 손을 뻗었다.

    “요즘 군대 기강이 말이 아니라니까.”

    그가 고른 것은 대체 어떻게 한 손으로 쥐고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바주카였다.

    “자기. 이번에도 업어주면, 이거 안 놓칠 자신 있어?”

    기태정이 반대편 손에 들고 있던 Z2를 세화에게 내밀었다.

    “제, 제가요?”

    “응. 근데 네가 혹시라도 놓치면 바로 터질 거라.”

    그럼 그 자리에서 너랑 나랑 몸 날아가는 거야, 사이좋게. 그 말을 듣고 사색이 되어 도리질을 치자, 기태정이 그럴 줄 알았다며 손을 물렸다.

    “그럼 별수 없네. 다른 방향으로 네 운을 시험해보는 수밖에.”

    기태정이 바주카로 선반을 툭툭 쳤다. 그 몇 번으로도 두툼한 철제가 우지끈 무너지고 휘어졌다. 바주카의 무게 때문인 건지, 그의 힘 때문인 건진 모르겠다. 기태정은 구부러진 곳을 손잡이처럼 쥐고선 무거운 선반을 반 바퀴 돌렸다. 아주 약간의 틈만 남기고 반대편 복도가 거의 차단되었다.

    “이사님….”

    뭔지는 몰라도 좋은 신호 같지는 않았다. 더듬거리며 그를 부르자, 기태정은 대답 대신 세화의 목덜미를 덥석 움켜쥐었다. 말 안 듣는 어린 동물을 다스리듯이.

    “도망칠 수 있는 만큼 도망쳐.”

    그리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으로 세화를 툭 내던졌다.

    “이거 처리할 거니까.”

    기태정이 손에 든 Z2를 슬쩍 들여 보였다. 세화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현기증이 크게 일어 고꾸라질뻔했다.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산발적으로 솟구쳤다. 너무 많은 말이, 비명이 혀끝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정작 기태정에겐 찍소리도 내지 못했음에도 목구멍이 다 따가워지는 기분이었다.

    “이거랑 비슷한 훈련 많이 해봤어, 괜찮아.”

    “저는 안 해봤어요!”

    겁에 질려 내지른 목소리는 비명에 가까운 하이톤이었다.

    “그런 소리 할 시간에 조금이라도 멀리 도망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기태정은 시끄럽다는 듯 뒤편을 가리켰다.

    “내 발이 그런 상태라면, 나라면 더더욱 그렇게 하겠어.”

    아…. 세화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발 심하게 다친 거, 피가 철철 나고 있는 거… 알고 있었구나. 기태정은 다 알면서도 지금껏 모르는 척한 거였다.

    하긴, 뒤에 숨어 덮치려던 군인들도 다 찾아내서 쏴 죽이던 사람이었는데. 몰랐을 리가 없다. 챙겨주고 돌봐줄 이유가 없으니 눈에 보여도 무시했던 거다. 지금은 섹스하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 아니, 만약 섹스 도중이라고 하더라도 발바닥에서 피가 나는 건 조금도 개의치 않고 좆을 휘둘렀을 것 같았다. 구멍에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니까.

    세화는 크로스백을 받쳐 들고 뒤뚱뒤뚱 달렸다. 다행히도 눈물이 나진 않았다. 그냥…, 제 처지에 낙인이 하나 더 찍히는 기분이라 마음이 좀 안 좋았다. 기태정에게 저는 구멍만 다치지 않으면 되는, 섹스할 때 이상만 없으면 되는 그런 사람이다.

    혹시 자기한테서 오만 정 다 떨어지라고 저러는 걸까? 딱히 기태정과 정 같은 게 쌓일 사이도 아니긴 했지만…. 폭탄에 몸이 찢겨 죽기 전에 세상에 미련 같은 거 단 한 톨도 두지 말라고 이러는 거라면, 신은 저에게 너무나도 잔인한 거였다.

    “헉, 허억….”

    고장 난 몸뚱이를 재촉해봐도 출구는 까마득히 멀었다. 그래도 숨을 좀 돌렸으니 느리게나마 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모든 힘을 끌어다 쓴 세화의 몸뚱이는 말을 듣지 않았다. 완전히 퍼져버렸다.

    꼭 천둥이라도 치는 듯 위에서 우르릉, 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래도 대피소인데 설마 무너지기야 할까 싶다가도, 김 소위가 마약이나 숨겨둘 정도로 방치했던 곳이니 안전하진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건물이 지어진 이래 단 한 번도 가동해본 적 없을 시스템까지 신나게 돌아가는 와중이었으니….

    이제 천장에선 돌가루가 아니라 주먹만 한 콘크리트의 잔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낡은 건물은 온몸을 비틀며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오싹 끼치는 두려움에 꾹 다문 입술이 사정없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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