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34)화 (34/144)
  • #034

    “김석철?”

    “네. 어제 손 사장이 김석철 지시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까, 그 주제로 이세화를 떠보려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메시지 내용이 좀….”

    “내용이 왜?”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박 소위는 화면 속 기태정을 응시하다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특별한 문제는 없어 보였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잠시 내용 확인하고 있을 테니까 이상 생기면 바로 말하고. CCTV 회로는 지금처럼 태워. 한 번에 차단하지 말고 조금씩, 천천히. 그게 이 새끼들 원래 수법이니까.”

    “예, 알겠습니다.”

    엄지와 검지로 아이홀을 꾹꾹 누르던 박 소위는 이내 빠르게 고개를 털고, 가장 최근에 온 메시지를 열었다.

    이세화의 핸드폰은 단출했다. 오직 연락 용도로만 쓰고 있는 건지, 제대로 작동하는 기능이라곤 하나도 없는 고물이었다. 저장된 번호는 하우스 직원과 마약 관련 업자들, 그리고 단골손님이 전부였다. 하다못해 자주 시켜 먹는 음식점 전화번호 같은 것도 없었다. 하우스 선수라면서 게임도 안 했다.

    깨끗해도 너무 깨끗해서 처음엔 어디서 보낸 첩자가 아닐까 의심했을 정도였다. 김 소위와 손을 잡았다는 마약 유통업자. 기태정이 반응하지 않을 수 없는 주제였고,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훌륭한 미끼였다. 다행히도 이세화의 행동반경이 넓지 않았던 터라 그간의 행적을 전부 살펴보고 난 이후엔 조금 마음을 놓긴 했지만… 그래도 박 소위는 이세화가 마뜩잖았다.

    기태정은 외모를 배반하는 이세화의 맹한 성격에서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박 소위의 상관은 피가 끓고 좆이 서면 아무하고나 잤고, 개중엔 이세화만큼 출중한 외모의 연예인도 여럿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도 결국 하룻밤 상대에 불과했다. 이렇게까지 호감을 보인, 그리고 오래 관계한 섹스 파트너는 이세화가 처음이었다.

    심지어 기태정은 이세화에게 잘해주기까지 했다. 이세화가 들으면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기태정은 뒤가 안 풀린 상대에게 연고를 발라주기보다는, 구멍을 완전히 찢어 피로 윤활제를 삼고 마는 성격이었다. 게다가 이세화는 여태까지 섹스 도중 팔이고 다리고 어디 한 군데도 부러진 적 없었다. 재판 끝나자마자 바로 유산시킬 거라는 소리만 안 했어도 혹시 제 상관이 드디어 마음을 주는 상대가 생긴 건가 했을 거다.

    하지만 기태정이 이세화를 그저 필요한 상대 정도로만 여기고 있는 거라면…. 그렇다면, 박소위가 보기엔, 기태정이 마음에 들어 하는 이세화의 그 성격은 심히 위험했다.

    관사에는 위장 인형 하나를 가져다 놓고 기태정과 여기저기 파헤치고 다니는 동안, 무서우신 상관께서는 가끔 핸드폰을 보다가 크게 웃곤 했다. 하우스의 사무실에 설치했던 CCTV를 보는 중이라고 했다. 영상을 보여주진 않아서 기태정의 설명을 듣고 짐작할 수밖에 없었지만, 장난감 좀 안겨주니 이세화가 좋아했다고 한다. 기태정에게 심한 취급을 당했으면서, 옷 한 벌도 허락받지 못해 알몸으로 갇힌 채로 말이다.

    당장 어제만 해도 그렇다. 탈진할 때까지 기태정을 받아내다가도 케이크 조금 먹여주니 울면서 웃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성정이라면 기태정이 아니라 다른 누가 조금만 얼러줘도 금세 넘어가지 않을까? 내부 사정도 제법 많이 알고 있고, 중독되지 않고도 마약류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도 있고, 김 소위의 장난질로 인해 이제는 임신까지 가능하게 된… 세상 물정 모르는 미인. 기태정을 꺾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이세화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어떻게든 그를 회유하려 들 게 뻔했다.

    역시 부하 된 도리로 상관에게 슬슬 조언을 올려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빨리 이세화를 임신시키고 치우시든지 하라고.

    그리고 이세화도 본인의 상태를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기태정이 임신 타령을 할 때마다 저 또라이는 발정 났다는 말을 저런 식으로 하나 보다, 딱 그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던데.

    “…이게 뭐야?”

    한숨을 쉬며 메시지를 읽어내려가려던 박 소위의 미간이 콱 구겨졌다. 저장된 번호는 아니었지만, 발신인은 확실히 김석철이었다. 하는 얘기를 보니 그랬다. 그런데 그 내용이라는 게….

    [어제 손 사장한테 무슨 일 있었는지 연락받았다. 너한테 수수료를 못 받았다~~ 뭐 그런 얘기던데. 잘은 모르겠지만 돈 문제로 뭔가 트러블이 생긴 모양이지?]

    [우리 집이 어느 정도인진 대충 얘기해준 적 있으니 잘 알겠지만 돈 몇 푼 빌려주는 건 나에게 어려운 일 아니니까~^^ 만나서 이야기하자.]

    [다만 이 일을 계기로 우리 사이도 조금 변했으면 좋겠다. 그간 몇 번이나 말하려고 했지만... 네가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아서 망설였는데... 솔직히 이 정도 금액을 그냥 주기는 그렇고. 그렇다고 스폰 뭐 이런 말을 쓰기엔 우리가 그런 사인 아니잖아?^^ 그래도 뭔가 확실하게 결정이 되어야 나도 집안 어른들께 부탁을 드릴 수 있으니까. 무슨 뜻인지 알지?]

    [근데 이거 나만의 생각은 아니었겠지?^^ 날 볼 때마다 웃는 너를 보면서 같은 마음일 거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어^^...]

    “이 새끼가 진짜 미쳤나….”

    김석철 이 새끼는 약에 미친 약쟁이 정도가 아니었다. 추태도 모르고 자기 나이보다 반절은 어린 애한테 추근거리고 있었다니. 그러면서도 그까짓 돈 자기가 다 주겠다는 말도 못 하고 집안이 어쩌고 핑계를 대는 게 역겨웠다.

    “그럼 손님 보고 웃지, 우냐? 미친 새끼.”

    박 소위는 혀를 차며 자신의 핸드폰을 활성화했다. 예전에 기태정으로부터 전달받은 게 있었다. 혹 이세화의 복제폰으로 김석철에게서 연락이 온다면 토씨 하나 틀리지 말고 이 내용 그대로 전송하라고.

    [아저씨랑 더는 연락 안 할래요 새로 알게 된 잘생긴 손님이 자기하고만 거래하자고 했어요]

    기태정도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서 지시를 내렸던 건 아니었을 거다. 그런데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어째 불난 집에 기름 붓는 꼴이 되어버렸다.

    “박 소위님!”

    혀를 차던 박 소위는 다급한 최 원사의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메시지를 보낸 즉시 복제폰이 굉장한 기세로 울려댔지만, 이 이상은 박 소위의 소관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시스템에 오류가 생긴 것 같습니다!”

    블록 쌓듯 차곡차곡 떨어지던 방화벽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원래 순서를 건너뛰고, 한참 떨어진 곳에서 천장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기태정과 이세화가 있는 곳 부근이었다.

    ***

    기태정이 빠르다는 건 입구에서 군인들 다 죽여놓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아까 자신을 뒤에 둔 채로 저 앞까지 갔다가 구해주러 되돌아오곤 하던 때에도, 사람이 어떻게 저런 속도를 내는 건지 신기했는데… 지금 보니 여태까지는 그냥 설렁설렁 걷는 수준이었다.

    미리 경고했던 대로 기태정은 세화를 세심하게 받쳐주진 않았다. 체력 훈련이라도 하듯, 세화를 덜렁덜렁 매달고서 그대로 질주할 뿐이었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업혀보는 거여서, 기태정이 몸을 숙이며 등을 내어줬을 땐 조금 찡하기도 했다. 배 안쪽이 따끔거리고 간질거리고 그랬다.

    그렇지만 제법 긴 거리를 짧은 시간에 주파하는 동안… 뭐랄까, 세화는 자기 자신이 꼭 훈련을 위한 모래주머니가 된 기분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거지? 군인은 원래 다 이런가? 적어도 김 소위는 확실히 아니었는데. 신체의 한계를 아득히 넘어선 기태정의 움직임은 조금 오싹할 정도였다.

    어쨌든 그가 날 듯이 달려와 준 덕분에 목표로 하던 9구역까지 여유 있게 오긴 했다. 쿵쿵대며 천장에서 방화벽이 떨어지는 소리는 아직도 멀게 들렸다.

    약을 채운 다섯 번째 주사기까지 무사히 챙겨 넣고 고개를 빼보니, 기태정 역시 원하는 물건을 손에 넣은 듯했다. 그가 말했던 것처럼 투명한 상자 안에 포장된 까만 공 같은 생김이었다. 아까 인형 얘기를 해서 그런지 완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안에 든 건 무시무시한 폭탄인데도.

    “저, 이사님….”

    “다 했어?”

    “네. 혹시 몰라서 하나 더 담았어요.”

    이제 할 일은 방화벽이 이 근처까지 떨어지길 기다리는 거였다. 기태정이 그 틈새로 Z2인지 뭔지 하는 폭탄을 던져넣으면… 사실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진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그러면 여기서 나갈 수 있다.

    기태정이 손을 까딱였다. 선반 어딘가를 뚫어져라 쳐다보느라 이쪽으론 시선도 주지 않은 채였다. 세화는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아까 기태정의 등에 업힌 채 달리던 때 나머지 신발 한 짝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물론 그는 세화가 맨발이든, 발바닥이 찢어졌든 그런 사정은 조금도 봐주지 않는 사람이었으니 욕먹기 싫으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세화는 거대한 상의 밑단을 괜히 구기면서, 이정표로 삼은 남자를 훔쳐보았다. 사실… 조금 서운했다. 섹스할 때는 거칠게 굴었어도 다친 곳은 없는지 꼭 확인해줬는데…. 그렇게 봐주는 건 몸을 섞을 때뿐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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