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33)화 (33/144)

#033

“…이사님, 방금….”

묘한 얼굴이었다. 물론 겉에 두르고 있는 거죽은 진짜 이세화의 것이 아니긴 했지만, 저 겁쟁이가 그 아래 숨어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대충은 짐작이 갔다.

기태정에게 하고 싶은 말도, 묻고 싶은 것도 많은데 차마 입 밖으론 낼 수 없어서 망설여질 때…. 그럴 때마다 이세화는 저런 낯을 하곤 했다. 왜 자기하고만 섹스하고 싶은 거냐고 이유를 물어보던 순간에도 이세화는 꼭 이런 표정을 하고서, 울먹울먹한 눈을 하고서 초조하게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하던 대로라면 이세화가 뭐에 버튼이 눌려서 저렇게 몸을 배배 꼬고 있는 건지 추궁하고, 실컷 놀리다가 따먹어야겠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술과 담배와 섹스를 몹시 좋아하는 정상인 기태정은 김석철 같은 새끼와는 달리 일의 우선순위라는 건 알고 있었다.

“쌍피 무늬가 새겨진 자루 찢으면 우리가 찾던 약 나올 거야.”

“…네? 이 안에요?”

어쩐지 촉촉하게 젖은 시선으로 저를 응시하던 이세화가 허둥지둥 포댓자루를 들여다보았다. 단꿈을 꾸다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부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다른 생각에 잠겨있던 게 부끄러웠는지 귓불까지 붉히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이유로 호들갑을 떠는 건지 모르겠지만, 분명 시시한 사정일 것이다. 섹스 한 번에 남은 빚 전부 청산해주겠다고 했을 때는 실감도 못 하는 것 같더니, 고작 케이크 한 판에 감격으로 덜덜 떨면서 구멍을 벌려주던 놈이었으니까.

Z2의 행방까지 확실해지니 점점 일이 지루해졌다. 기태정은 여기서 나가는 대로 이세화를 울려야겠다는 태평한 생각이나 했다.

돌아가는 길에 차에서 해볼까? 그것도 좋겠다. 방금 지나가는 사람이 네 구멍 쳐다본 것 같다고 속삭이면 질질 싸면서 울음을 터트리겠지. 대면좌위로 하다가 몸만 빙글 돌려 앞을 보게 하면, 부푼 젖꼭지를 파르르 떨면서 쩍 얼어버릴 거다. 발기해서 흔들리는 자지를 감추고 싶어 할 테니 손은 적당히 묶어놓는 것도 좋겠다.

좆을 물게 한 채로 회음부를 철썩 내리칠 때마다 좁은 구멍이 옴쭉대는 느낌이 환장하게 좋았다. 다리를 크게 벌리면 안쪽 허벅지부터 곧게 일어서는 근육의 선이 예뻤다. 거길 물어뜯으면 부근의 말캉말캉한 살이, 특히 동그란 엉덩이가 파르르 떨리곤 했다. 아, 씨발. 당장 박고 싶다. 그런데 이세화는 대체 언제쯤 제 자지를 다 받아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임신해야 하니까 구멍을 찢어놓진 않으려고 나름대로 노력은 하고 있는데…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마음속으론 이미 결장까지 꿰뚫고 진탕이 될 때까지 실컷 이세화의 안을 휘젓고 있는데 말이다.

“빨리 끝내자. 지겹다.”

포댓자루를 한 손으로 북 찢자, 이세화가 핼쑥한 낯을 하고 물러섰다. 조금 질린 듯한 기색이었다.

“왜 그래?”

“이걸 어떻게 한 손으로… 아니, 아니에요.”

이세화가 선반 가까이 다가왔다. 마음을 다잡겠다는 듯 결연하게 도리질을 치는 꼴이 웃겼다. 눈에 필터를 끼우고서 저건 씹스러운 범죄자 새끼가 아니라 이세화다, 그렇게 생각을 하니까 이젠 원래 얼굴로 보였다. 와르르 쏟아지는 가루를 훑는 이세화를 보면서, 기태정은 낯뜨겁고 못된 상상을 계속했다. 이세화만 벗겨놓고, 저는 이 탈 그대로 쓰고서 해보면 어떨까. 모욕과 수치심으로 엉망이 된 예쁜 얼굴을 떠올리니 자꾸만 들떴다.

기태정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서, 이세화는 신중히 움직였다. 냄새를 맡고 맛을 본다. 알고 있는 그 물건이 맞는지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그래도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은지 검지로 가루를 푹 퍼 올렸다. 손가락을 쪽쪽 빨면서 이세화가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튼 얼굴만 그런 게 아니라 몸도, 하는 짓도 야해 빠진 새끼였다.

“김 소위가 만들던 약 맞아요.”

드디어 할 일이 생겨서 기쁜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다른 데 집중할 거리가 생겨서 다행이라고 여기는 것 같기도 했다. 자기가 제조했을 때와 달리 뭐가 어디가 조금 달라진 것 같고, 아마도 이쯤 생산한 것 같은데 그 이유가 뭐냐면…, 하고 쫑알쫑알 말을 늘어놓기도 했다. 아까 무식하다고 놀렸던 게 속상했는지, 최선을 다해 자신의 쓸모를 어필하는 모습이었다.

“그거 담으면서 기다리고 있어.”

픽 웃으며 마지막 명령을 내리자, 이세화가 저를 휙 돌아보았다. 여전히 손가락을 입에 문 채였다. 어찌나 눈이 커졌는지 착용하고 있던 렌즈가 툭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기다리고 있으라니… 어디 가세요?”

“국화가 9월이라고 했지? 쌍피는 2점으로 계산하는 패고.”

“…그렇긴 한데.”

“Z2도 그와 연관된 숫자까지 가면 나올 것 같아. 이걸 숨겨 둔 위인이 김석철이라는 걸 고려한다면.”

숫자라는 말에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던 이세화는 선반 위에 적힌 푯말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움직임을 뚝 멈추었다. 여태까지 크게 의식 못 했던 모양이다. 발뒤꿈치를 깡충 들어 앞에 놓인 선반 너머의 숫자를 확인한 이세화는 어쩐지 물기 어린 눈을 하고서 기태정을 올려다보았다. 9-2구역은 여기서 제법 거리가 된다는 걸 깨닫고, 풀이 확 죽어버렸다.

“여긴 8-1인데요….”

“그럼 너 업고서 갈까? 거기까지?”

“그, 그건 아닌데….”

“내가 갔다 오는 게 빠르겠지?”

멀리서 보고 문제없을 정도면 충분해서 세세한 부분까지 위장하진 않았다. 이를테면 귓불이라거나, 손가락 모양이라거나. 그래서 버선코처럼 부드럽게 말려 올라가는 이세화의 속눈썹도 본인의 것 그대로였다. 기다란 속눈썹을 시무룩하게 내리깐 채로 느리게 깜빡이는 걸 보고 있자니, 픽 웃음이 터졌다. 이게 귀엽다, 귀엽다 해줬더니 정말로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금방 올 거야. 어차피 네가 채취한 약 케이스 안에 담아야 끝나는 일이라고 했잖아.”

“그럼….”

뭐라고 되는 줄 아는 시건방진 착각은 망쳐줘야 마땅한데… 답답하고 멍청하게 구는 꼴이 퍽 귀엽기는 했다. 집에 작은 동물을 들이면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싶었다. 조금 관대해진 기태정이 말해보라는 듯 거만하게 턱짓하는데, 갑자기 멀리서 심상치 않은 진동이 느껴졌다. 지잉, 하는 벽의 흔들림과 육중한 물건이 쿵 바닥에 내려앉는 소리.

“이, 이사님…. 방금 그거 뭐예요?”

익숙한 울림이었다. 아무래도 방화벽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뒤질 거면 얌전히 뒤질 것이지, 씨발 귀찮게….”

죽은 놈인지 아직 살아서 숨어 있는 놈인지, 하여튼 누군가가 비상 시스템을 가동한 모양이었다. 도미노가 무너지듯 방화벽이 차례로 내려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안에 갇히게 된다. 물론 기태정은 방화벽이 아니라 무엇으로 가둬놔도 탈출할 자신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세화는 아니었다.

“진짜로 업고 가야겠네.”

이세화는 어쩔 줄을 모르고서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귀먹었어? 업혀.”

등을 내어주고 무릎까지 조금 숙여줬는데도 이세화는 묵묵부답이었다.

“더는 말 안 해. 계속 이딴 식으로 굴면 여기서 뒤지든 말든 너 버리고 갈 거야.”

혼자서 전부 뒤집어쓰고 총살당하고 싶은 거라면 계속 그러고 있으라고 싸늘하게 일갈하자, 그제야 이세화가 주섬주섬 목에 팔을 둘렀다. 핫도그 포장지 같은 거대한 상의가 부스럭대며 구겨졌다. 어찌나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는지, 그 진폭이 맞닿은 기태정의 등까지 고스란히 전해질 정도였다.

“받쳐줄 정신 없으니까 꽉 잡아.”

떨어지면 네 탓이고 구해주지 않을 거라고 속삭이자, 허리에 감긴 이세화의 다리에도 바짝 힘이 들어갔다. 하나도 위협적이지 않아서, 기태정은 작게 웃고 말았다.

***

“박 소위님, 방화벽이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형식으로?”

“전체 차단은 아니고, 한 구역이 닫히면 그다음 구역이 닫히는 식입니다. 구형 시스템이라 속도는 느리긴 합니다.”

“최대한 막아봐. 준장님 혼자가 아니니까.”

“예, 알겠습니다.”

복도를 내달리는 기태정과 이세화를, 아니 이세화를 업고 있는 기태정을 지켜보며 박 소위가 부지런히 컨트롤러를 움직였다. 필요한 화면은 이미 전부 땄다. 여기저기 분산시켜 저장도 했고, 사용한 회선은 전부 태웠다. 이제 약만 챙겨서 빠져나오면 끝이다.

“저, 박 소위님.”

순간 지잉, 길게 진동이 울려대서 어떤 정신머리 나간 새끼냐고 고함을 지르려는데, 최 원사가 머쓱한 얼굴로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세화의 핸드폰을 몰래 복제해둔 것이었다.

“저장된 번호는 아니지만, 내용을 보니 김석철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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