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32)화 (32/144)

#032

기태정에게 합리적이고 친절한 설명 같은 건 포기한 지 오래였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포장 용기 대신 뭘 쓰겠다고?

“이사님, 죄송하지만 저 지금 이사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이해가 좀… 안 되는데….”

“폭탄이 뭔지 몰라?”

“아니, 제가 그게 뭔지 몰라서 이러는 게 아니라….”

세화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귓가에 씩씩대는 제 숨소리만 울렸다. 가볍게 과호흡이 온 것 같아서 다급히 손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아파서 그런 건지 화가 나서 그런 건지도 구별이 어려웠다.

“사람이 무식할 수도 있지. 그거 가지고 뭘 울고 그래.”

“안 울어요!”

호흡을 고르던 세화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맹세코, 눈물조차 머금은 적 없었다. 울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고,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누구누구 때문에 죽어라 달리느라 땀을 폭포처럼 쏟아내서 울 수 있는 수분기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진짜 안 울어요! 저 그렇게 맨날 울고 그러지 않, 아…!”

죽겠다 싶은 상황에 부닥치니 용기가 절로 샘솟았다. 처음으로 기태정 앞에서 크게 소리를 내질러봤지만, 상황이 썩 좋지 않았다. 늑골 사이마다 칼이 콱콱 박히는 느낌에 세화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서 쌕쌕 숨만 내쉬었다.

“와, 이 낯짝 하고 있으니까 나한테 소리도 막지르네?”

기태정은 그렇게 남자 얼굴만 밝히다가 신세 조지는 거라면서 세화를 놀려댔다. 세화는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짜증이 솟구치다 못해 왈칵 서러움이 밀려왔다.

“…네, 죄송해요. 그냥 가요.”

“알았어. 설명해줄게. 폭탄이라고 해봤자 이런 데서 갖추고 있는 건 Z2 계열… 그러니까 그렇게 위력이 크지 않은, 위급 상황에서 문 몇 개 부술 수 있는 정도의 화력일 거고. 보통은 이 정도 크기야.”

기태정이 손으로 대략적인 크기를 가늠해주었다. 말마따나 가져온 주사기 5개를 담으면 꽉 찰 크기였다. Z2인지 뭔지 하는 폭탄은, 쉽게 비유하자면 투명한 플라스틱 상자 안에 동그란 까만 공 같은 게 들어 있는 생김이라고 했다.

“너 좋아하는 장난감처럼 생겼어.”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보내줬던 인형 포장 중 그와 비슷한 게 있기는 했지만, 귀여운 인형 포장을 폭탄에 비유할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런 설전이 무슨 소용일까 싶어서, 세화는 지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구형 Z2 케이스에 달린 잠금장치는 재사용이 가능해.”

Z2처럼 탈출 등을 목적으로 하는 폭탄은 빠르게 터트리고 보는 게 우선이라서, 보통은 잠금을 해제하자마자 통째로 던져버린다고 했다. 케이스의 재사용 빈도가 전혀 없다 보니 요즘 나오는 신형 모델부터는 이전과 같은 잠금장치는 부착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김 소위네 외가에서 신형 모델 디자인 뽑혔을 때 반대 많이 했었지.”

“김 소위요?”

“어. 그 새끼들이 그 좆같은 잠금 기술에 투자 많이 했거든. 에코 전투 같은 씨발 말 같지도 않은 개소리나 하면서.”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Z2의 변천사를 늘어놓길래 뭔가 했더니… 기태정이 궁극적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였나보다.

“Z2 케이스에 담아가면 김석철도 어쩌지 못할 거야. 외가에서 투자한 기술도 함께 욕보이는 셈이 될 테니까.”

“그럼 안에 든 폭탄은 어떻게 해요?….”

“터트리고 가야지.”

기태정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덤덤하게 대꾸했다.

“어차피 케이스 안에서 폭탄 꺼내는 순간 터져.”

“…터진다고요? 꺼내자마자?”

“있다가 보면 알 거야.”

“아니, 그게 아니고요… 여기서…, 그러니까 박 소위님이 해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밀봉하는 홀로그램도 따야 한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응.”

“그런데 폭탄 꺼내는 순간 터져 버리는 거면… 저희도 위험해지지 않아요?”

“방화벽 셔터 내리면서 그 안으로 던질 거야. 폭탄치곤 그렇게 위력이 큰 것도 아니라 도망칠 시간 정도는 벌 수 있을걸.”

폭탄을 삼킨 방화벽이 불꽃과 사투를 벌이는 동안 우리는 문을 열고 나가면 다 끝나는 거라고, 기태정은 무슨 라면 끓이는 법이라도 설명하듯 쉽게 말했다. 이세화의 얼굴이 또 보기 좋게 일그러지는 것은 모르는 척했다. 원래 몸으로 부딪쳐서 하는 일은 대개 감각에 의존해야 한다. 이쯤이면 됐겠다 싶었을 때 폭탄을 던질 생각이었다. 늘 그렇게 해왔고, 몸에 배 당연한 감각을 어떻게 하나하나 더 설명해주고 있단 말인가.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닌데.

“문제는 김석철이 그 폭탄의 보관 위치를 바꿔놓은 것 같다는 거야.”

지표가 될 만한 간이 부스도 다 치워 버리고, 상황실도 철거해놨다. 여기에 어떤 의도가 있는 거라면 차라리 낫다. 모든 전략에는 근거가 있기 마련이니, 숨겨진 규칙을 찾아내면 답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그렇지만 김석철은 그렇게까지 머리를 굴릴 수 있는 놈이 아니었다. 약 숨겨 놓을 공간이 좀 부족하다 싶으니 치워도 되는 것들은 헐값에 팔아넘겼을 거고, Z2처럼 처분하기 영 찜찜한 물건들만 어디 구석에다 대충 처박아뒀을 것이다.

약이야 진작 찾아냈다. 대피소 안에 들어서는 순간 선반에 깔린 수상한 포댓자루를 보고, 저거다 싶었다. 이 많은 보충제가 전부 약일 순 없을 테니, 중간 간이 부스에서 Z2를 확보한 다음, 천천히 들여다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구역으로 넘어가는 순간, 수상쩍은 부분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그럼 그렇지. 김석철 그 멍청하고 게으른 새끼가 고안해 낸 위장술은 달려가면서도 확연히 눈에 들어올 정도로 티가 났다. 포댓자루 일부에만 제조사 이름 아래 무슨 도장 같은 게 찍혀 있었던 거다. 군에서 사용하는 양식은 절대 아니었다. 달려가는 동안 흘끗 다른 선반도 살펴보니, 역시 몇몇 자루에만 그 표식이 찍혀 있었다.

생각보다 쉽게 해결될 것 같았다. 혹시나 꺼내기 어려운 곳에 숨겨놨을까 봐 이세화에게 빠르게 손 놀릴 수 있도록 연습해놓으라고 했던 거였다. 저렇게 큼지막한 자루에서 이세화가 약을 빼돌리는 건 무리하는 수준도 아닐 거다. 이세화가 낯선 곳에서 긴장할 수도 있다는 걸 염두에 두더라도 말이다. 그러니 이제 Z2만 확보하면 된다.

그 뒤로 기태정은 설렁설렁 움직였다. Z2가 있을 만한 곳을 뒤져 보다가, 멀리서 수상한 기척이 느껴지면 도로 돌아가 이세화를 구해주었다. 귀찮아서 그렇지 힘들지도 어렵지도 않았다.

그런데… 아무리 앞으로 나아가도 보이는 게 없었다. 간이 부스는커녕 대기 중인 군인들을 위한 패닉룸조차 보이지 않았다. Z2의 행방 또한 당연히 묘연했다.

기태정은 삐딱하게 다리를 짚은 채 널브러진 시체들을 바라보았다. 입구를 봉쇄한 탓에 그 뒤는 온통 어둠이었다. 불길한 빨간 등이 정신없이 천장 위를 수놓고 있었다.

전투에서 쓸 수도 없는 구형 모델을 가져다 팔았을 것 같지는 않은데…. 게다가 Z2는 김석철의 집안에서 언급조차 꺼리는 실패작이었다. 식구들 말이라면 껌뻑 죽는 김석철이 굳이 그 물건을 세상 밖에 다시 내놓진 않았을 거다.

시간을 들여 뒤져 보면 당연히 나오기야 하겠지만, 그럴 수 있는 여유까진 없었다. 아무리 한미한 곳에 방치하고 있는 시설이라지만 군인들이 습격당했다. 당연히 지원 병력 요청이 들어갔을 거다.

“어?”

선반을 짚은 채 숨을 고르던 이세화가 돌연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어쩐지 반가운 기색까지 느껴졌다.

“이거 쌍피네요?”

Z2 생각에 잠겨있던 기태정의 고개가 번뜩 들렸다.

“쌍피?”

“네. 화투 칠 때 한 장으로도 2점 가져갈 수 있는 패가 몇 개 있는데 그중 하나에요. 이건 국화 쌍피 같은데. 쌍피는 이렇게… 보통 국화보다 생긴 게 더 화려해요.”

이걸 여기서 보네, 하며 이세화가 신기해했다. 기태정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국화. 쌍피….

“하하….”

어이가 없어서 허탈하게 웃으니, 놀란 이세화가 입을 헙 다물었다. 눈치도 없이 화투 얘기나 꺼낸 거 아닌가, 지레 겁먹은 모양이었다.

“아냐. 잘했어. 잘 찾았어.”

그래. 이 또한 규칙이라면 규칙이었다. 도박과 약에 미친놈의 입장에서 바라봤어야 했는데, 저는 술 마시고 담배만 피울 줄 아는 정상인이라서 화투를 이용해 암호를 만들 생각까진 못했다.

“네가 3월이지?”

“그렇… 죠.”

이세화가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기태정이 또 심술을 부린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럼 국화는 몇 월이야?”

“국화요? 9월이요.”

9월. 가을의 초입이고, ‘추수’가 시작되는 계절이었다. 씨발. 기태정은 욕을 삼키며 선반 위에 적힌 숫자를 살폈다. 여기가 8-1. 그렇다면 9-2구역쯤 가면 원하는 물건이 있을 것도 같았다. 아니, 분명 거기에 있을 거다.

“이세화.”

포댓자루에 새겨진 쌍피를 들여다보던 이세화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이름을 부른 기태정조차 바로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강렬한 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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