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31)화 (31/144)
  • #031

    아까보다 사이렌 소리가 커졌다. 천장에 달린 벌건 경고등이 빙글빙글 돌았다. 보안 단계가 상향된 모양이었다. 내달리는 다리가 천근만근이었다. 한쪽 신발은 이미 벗겨진 지 오래였다. 까진 발바닥이 쓰리고 아팠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기태정은 이미 세화를 한참이나 앞서가고 있었고,

    “저기 있다!”

    뒤에서는 대피소를 지키고 있던 군인들이 쫓아오는 중이었다. 저를 향해 달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여러 개의 군화가 대피소의 복도를 내달리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세화는 새파랗게 질린 채 겨우 발을 뗐다. 뒤에서 뻗어온 손이 당장이라도 머리채를 붙들 것만 같았다.

    “미친… 헉, 새끼, 진짜….”

    조금 전, 대피소의 입구가 가까워지자 기태정은 걷는 걸음에 서서히 속도를 입히기 시작했다. 조금 빠른 정도였던 발걸음은 어느새 달음박질로, 무시무시한 질주로 돌변했다. 그게 전부였다. 기태정은 그렇게 맨몸으로 군인들에게 돌격했다. 쏟아지는 총알을 전부 읽는 재주라도 있는 건지 잘도 피하더니, 정확하고 빠르게 누군가의 목을 조르곤 총을 빼앗았다. 처음부터 그 사람을 노리고 있었다고 해도 그렇게 재빠를 순 없을 것 같았다.

    그 이후론 기태정의 일방적인 살육에 불과했다. 건물 내부로 진입한 이후론 세화보다 앞서 나가며 앞에 놓인 장애물과 군인들을 해치웠고, 가끔 세화가 붙잡힐 것 같다 싶으면 와서 구해주었다. 물론 고마웠다. 그렇지만 이왕 친절을 베풀어 줄 거라면, 살려주겠다고 약속까지 했으면… 조금만 더 인심을 써주면 안 되는 걸까? 기태정은 정말로 딱 죽을 것 같다 싶을 때만 불쑥 나타나서, 최소한만 처리해주고는 다시 사라졌다. 키도 크고 체격도 좋은 사람이 내달리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미사일이라도 쏜 것 같았다.

    “이사, 님….”

    겨우겨우 내뱉는 목소리는 사람의 음성이라기보다 히싱(수신기에 들어오는 잡음 중에서 ‘슈, 슈’ 하는 연속성 잡음. 혹은 뱀의 쉭쉭 거리는 울음소리.)에 가까웠다. 어차피 기태정에겐 들리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세화는 몇 번이고 그를 불렀다. 기태정이 자신의 속도와 맞춰서 걸어주길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아주 조금만 앞서 가준다면 좋겠다. 뒤에서 따라오는 놈들을 쉽게 물리쳐줄 수 있을 정도로만. 이렇게까지 불안에 떨지 않을 정도만….

    “진짜 나쁜…, 놈, 헉….”

    데리고 가준다더니. 살려준다더니. 숨이 모자라다 못해 배가 찢어질 것 같았다. 세화는 옆구리가 결려서 뛰기는커녕 걷는 것도 버거웠다. 말할 기운도 없었다. 그렇지만 기태정 욕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대로 주저앉아버릴 것 같았다. 짜증과 원망이라도 동력으로 삼아야 죽지 않고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후, 흐윽….”

    잠시 무릎을 짚고서 숨을 고르던 세화는 다시 힘을 내어 기태정과의 거리를 좁혔다. 물론 달팽이가 기어가는 것보다도 느린 속도라서… 이걸 좁혀가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대피소는 단층이었고, 내부도 단순했다. 방공호로 활용하기 썩 좋은 구조는 아니라서, 아마 창고 같은 것으로 쓰다가 대충 용도를 변경한 게 아닐까 싶었다. 이 구역엔 어차피 사는 사람들도 별로 없었고, 그나마도 99%는 신분을 은폐하고 살아가는 범죄자들이었다. 여기 주민들을 정성껏 대피시켜줄 생각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을 거다.

    어쨌든 오랫동안 관리가 안 된 건 사실인지 복도의 양옆으로 철제 선반이 세워져 있었다. 물론 안을 채우고 있는 건 방독면이나 소화기처럼 대피할 때 필요한 물품들이긴 했지만, 복도에 이렇게 짐짝처럼 쌓아두면 이동할 때 방해만 될 뿐이었다. 하다못해 하우스의 비상 통로도 이렇게 짐을 산적하진 않았다.

    복도는 다소 산만했지만 그나마 다행이라면 길은 복잡하지는 않았다. 혹시 기태정과 길이 엇갈리면 어쩌나 걱정할 것 없이 일직선으로 쭉 난 복도를 따라가기만 하면 됐다. 다만 그 말은 적들에게 자신의 위치를 고스란히 노출한 채로, 물건들로 좁아진 복도를 비집으며 앞으로 내달릴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끝에 뭐가 있을지도 모르는 채로.

    “으아악!”

    잠시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자마자, 쌔액하고 공기를 찢는 소리가 세화의 정수리를 스쳐 갔다. 깜짝 놀라 고개를 치켜드니 언제 이만큼 다가왔는지 기태정이 총부리를 겨누고 있었다. 까딱하면 자신이 총을 맞을 수도 있었지만, 세화는 감히 그에게 따져 묻지도 못했다. 제법 가까운 곳에서 총성과 낯선 비명이 연달아 울려 퍼진 탓이었다.

    “흐이익!”

    최대한 용기를 내어 뒤를 돌아본 세화는 무릎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눈을 부릅뜬 남자 둘이 이마에 구멍이 뚫린 채로, 세화의 코앞에서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놈들의 손에 들려있던 두껍고 단단한 곤봉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언제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 건진 모르겠지만 저걸로 자신을 뒤에서 내리칠 생각이었나보다.

    “거의 다 처리한 것 같으니까 이제 좀 천천히 걸어도 돼.”

    “저, 정말요? 그걸 어떻게….”

    “이만큼이나 죽었으면 남은 인원 별로 없을걸.”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세화는 수척해진 몰골로 비척비척 기태정 곁으로 다가갔다. 뒤에 쓰러진 시체에서 최대한 떨어지고 싶었다.

    “그나저나 아까 그거 다시 해봐.”

    “네?”

    “흐이익, 하던 거.”

    너한테서 그런 소리는 처음 들어 보는 것 같다며 기태정이 입맛을 다셨다.

    “몸 거의 접다시피 했을 때도 그렇게는 안 울었잖아.”

    세화의 입이 떡 벌어졌다. 어이가 없어도 너무 없으니 무슨 반응을 보이면 좋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지금 이 상황에서도 섹스 생각을 하고 싶나?

    “아. 천천히 걸어도 된다는 말 취소. 너 너무 느려.”

    “…이사님.”

    나름대로 화가 절절 끓는 목소리로 부른 거였는데, 기운이 하나도 없는 탓에 어린 짐승이 칭얼대는 것처럼 들렸다. 세화는 여러모로 속이 터질 것 같았다. 기태정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민간인이라는 걸 참작하면 이 정도는 느리다고도 할 수 없는 거고, 물론 지금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있긴 한데 제 몸이 그렇게 된 이유를 좀 생각해줬으면 좋겠고, 무엇보다 눈앞에서 사람 죽어 나가는 걸 보고 기겁하고 있는 사람한테 너랑 섹스하던 거 생각나니 조금 전 그 신음 다시 내질러보라고 하는 게 정상이냐고.

    그렇지만 기태정은 하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은 세화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혼자서 무슨 상상을 하는지 세화를 보고 음흉하게 턱을 쓸다가, 이내 쓰러진 남자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군더더기 없는 손길로 허리춤에 차고 있던 권총을 갈취하고는, 뒤를 향해 마구 갈겨댄다. 보지도 않고 대충 쏘는 것 같은데 기태정이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크고 낮은 비명이 복도를 쟁쟁 울렸다. 철퍼덕 육신이 허물어지는 소리가 멀리서도 생생했다.

    “좀 쪽팔리려고 하네. 그래도 명색이 군사 시설인데 이렇게 허접해서야….”

    남은 탄환의 개수를 헤아린 기태정은 천장 쪽으로 모조리 난사하고는, 미련 없이 총을 던져버렸다. 몇몇 경고등이 박살 나버린 탓에 더더욱 을씨년스러운 풍경이 되어버렸다.

    “내가 자기 볼 면목이 없잖아?”

    소중한 총알을 왜 저렇게 낭비하는 건지 아직도 이해할 순 없었지만, 세화는 기태정에게 설명이나 상식 같은 걸 바라지 않게 되었다. 탄환 꽉꽉 채운 새로운 총 쏘고 싶어서 그러나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약은 저기다 숨긴 게 확실한데….”

    “네? 어디요?”

    기태정이 선반 안에 들어있던 자루를 툭툭 쳤다. 소화기의 분말 가루가 다 떨어지면 보충할 수 있는 보충제인 것 같았다. 세화의 얼굴이 밝아졌다.

    “위장하기 딱 좋잖아. 하얗고, 가루고.”

    그 말을 듣고 선반을 살펴보니 필요 이상으로 포대가 많았다. 이 선반만 하더라도 소화기는 한 대밖에 없는데, 보충제를 담은 자루는 열 개가 넘었다.

    “그럼 지금 담을까요?”

    “아냐. 여기서 약을 밀봉하는 것까지 보여줘야 해. 박 소위가 홀로그램으로 뽑을 수 있게.”

    “밀봉이요?”

    “그래야 김석철한테 협상 카드로 내밀 수 있지. 주사기만 덜렁 보여 주면 오리발 내밀걸. 어디서 가져온 물건인지 알 수 없다고.”

    “그, 그래요? 어떡하죠? 딱히 가져온 게 없는데….”

    “담아가기 적당한 물건을 하나 알고는 있는데…. 보통은 이 정도 거리에서 상황실이나 간이 부스가 나오고, 거기서 보관하는 게 보통이거든.”

    그런데 보이질 않는다며 기태정이 턱을 매만졌다.

    “그게 뭔데요?”

    “폭탄.”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