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30)화 (30/144)
  • #030

    “응. 증거가 필요하다고 했잖아.”

    세화는 사무실에서 기태정이 일러줬던 이야기를 더듬더듬 꺼내 보았다. 놀라서 그런지 차분하게 굴 수가 없었다. 와르르 쏟아진 기억들이 흩어진 퍼즐 조각처럼 정신없이 머릿속을 배회했다.

    ‘김 소위가 거기에 허튼 물건을 숨겨뒀다는 게 포인트야. 오늘 빼낸 물건이 그 증거가 되어줄 거고.’

    ‘자기는 주사기 딱 다섯 개만 채워. 그거면 돼. 알았지?’

    “혹시 이 사람들이 김 소위와 손잡은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아니지, 그러면 설정 오류잖아. 이 새끼들은 그냥 어디서 정보를 접했을 뿐이야. 김석철이 수상쩍은 약을 만드는 약쟁이라는걸.”

    그건 딱히 숨겨진 일도 아니었으니까. 김 소위에게 바치는 사과 상자 안에는 현금이 아니라 마약이 들어있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그리고 그건 높은 확률로 사실일 거다.

    “마침 놈들은 군부와 협상할 카드가 필요했어. 동료들이 다 잡혀가서 총살당하게 생겼으니까. 그러던 와중에 제법 믿을만한 소문을 듣고, 오늘 모험을 강행한 거지. 뭔진 몰라도 김 소위가 숨겨둔 물건을 빼돌려보기로. 그걸로 김석철네 집안을 협박할 수도 있고. 여차하면 해외에 찌를 수도 있겠지. 오히려 국내보다 국외 루트가 훤한 놈들이니까.”

    그러니까 기태정은 자신의 흔적을 철저히 지우고서, 어차피 죽을 게 뻔한 일급 범죄자들의 마지막 발버둥 정도로 몰아갈 생각인 것 같았다.

    “그렇게 작전에 성공한 놈들은 고민하다가 일단 나에게 그 물건을 가지고 온 거야. 군대 내부 사정에 관심이 있는 놈들이라면 나와 김 소위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충분히 알고 있을 테니까. 어색한 흐름은 아니지.”

    “그럼 이 사람들은 지금 감옥에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이렇게 돌아다니면….”

    “아니. 내가 빼돌렸지.”

    아직은 안 죽었다고 했잖아, 하며 기태정이 무심하게 대꾸했다.

    어떤 흐름에서 기태정이 이런 계획을 세웠는지는 이해했다. 기태정은 내내 증거를 강조해왔다. 뭔진 몰라도 그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그 무엇보다 당위성이 중요하다는 것도 잘 알겠다.

    세화를 답답하게 하는 건 그래서 이 계획의 실현 방법이 뭐냐는 거다. 지금껏 기태정이 보여준 건 이 사건을 터트리기 위한 설계 도면 정도에 불과했다. 가장 중요한 ‘어떻게’가 빠져있었다. 그 ‘어떻게’가 당장 코앞에 닥쳐왔는데도, 건물 지을 방법은 알려주지도 않고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태평한 소리나 하고 있다. 크레인은커녕 조그만 주사기 몇 개만 쥐여주고서.

    벙커도 아니고 대피소긴 하지만 그래도 군사 시설을 외부인이, 그것도 고작 둘이서 어떻게 잠입할 것이며, 또 어떻게 탈출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세화는 민간인이었다. 기태정이야 전투라면 이골이 났을지 몰라도, 저는 하우스 다찌 한 명조차 이기기 버거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대체 뭘 어떻게….

    “아, 씨발. 차도 존나게 후져가지고….”

    낯선 얼굴을 한 기태정이 투덜거리며 기어를 조작했다. 사람이 손을 댈 일이 없는 최신 차량과는 달리, 고물 자동차는 권외 장소까지 오자 제대로 조작하기도 어려웠다.

    아까 분장을 다 마치고 주차장으로 내려왔을 때. 과묵한 박 소위가 웬일로 어, 하고 반가운 소리를 내며 이 차를 가리켰다. 10년 전에 군대에서 쓰던 차종이었는데, 이걸 여기 하우스에서 만날 줄 몰랐다면서. 낡았어도 제법 튼튼하고 짐도 사람도 많이 실을 수 있어서 성 밖에선 중고 구매로 선호하는 차량이었다.

    “이걸 돈 주고 파는 새끼들은 양심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원래 그가 타고 가려고 했던 건 세화는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고급 차량이었다. 딱히 차에 관심이 없는 저도 슬쩍 만져보고 싶을 정도로 잘빠진 외관이었다. 그런데 기태정은 바로 그 점이 불만인 것 같았다.

    ‘지나치게 고급 기종이고, 실용성도 떨어지는데, 그 와중에 너무 새것 같기까지 해.’

    ‘차의 종류는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습니다. 범죄자들은 과시하는 성향이 크기도 하고요.’

    박 소위도 고물 자동차를 몰고 가는 건 다시 생각해보라고 했다. 만약 목적지가 군사 시설이라는 걸 알았더라면 세화 또한 말렸을 거다.

    “저…, 이사님. 정말 우리 둘만 가는 거예요?”

    “박 소위랑 애들이 주변 시설 해킹하고 있을 거야. 이 낯짝을 한 놈들이 쑤시고 다니는 순간을 따내야 하니까.”

    어쨌든 내부로 진입해서 물건을 빼내는 건 온전히 둘이서만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심지어 기태정은 딱히 지참한 무기도 없어 보였다. 흘끔 뒷좌석을 돌아봤지만, 총은커녕 몽둥이도 보이지 않았다.

    “곧 내릴 거야.”

    세화는 목을 쭉 빼고서 두리번거렸다. 버려진 시설이라는 건 사실인지, 보통의 검문소처럼 삼엄한 경계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털털거리며 차 굴러오는 소리가 나자 안에서 군인들 몇몇이 걸어 나왔다. 낯선 차종이 아니라서 그런지 당장 총을 갈기진 않는다는 게 천만다행이었지만… 상황이 바뀌는 건 순식간일 터였다.

    세화 같은 성 밖의 주민들에게는 평생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있었다. 그중 가장 무시무시한 것이 검문소였다. 실수로 금이라도 밟은 순간 지키고 선 군인들이 머리통을 죄 으깨놓을 테니까. 그런데 이렇게 자기 발로 군사 시설을, 심지어 발견 즉시 사살감인 범죄자들의 탈을 쓰고서 걸어오게 될 줄이야.

    “내가 신호 보내면 내려서, 뛰어.”

    기태정이 시동을 끄고 바깥을 살폈다. 수상함을 감지한 군인들이 자기들끼리 수신호를 주고받았다. 귀 부근을 매만지는 걸 보니 무전이라도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이쪽을 향해 장전하는 건 정말 곧일 거다.

    세화는 눈을 질끈 감았다. 기태정의 지시를 따라 내려야 한다는 걸 아는데, 안 그러면 군인들의 총에 맞기 전에 기태정에게 먼저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아는데… 도저히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너 남자 얼굴 더럽게 밝힌다.”

    “……네?”

    누구 손에 죽는 게 나을까. 생과 사의, 아니 사와 사의 갈림길에 서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기태정이 돌연 뚱딴지같은 소리를 했다. 난데없는 비난에 고개를 들자, 기태정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고서 세화를 훑어보았다. 뒤집어쓰고 있는 거죽은 생판 모르는 남인데도, 그 밑에서 기태정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훤히 그려졌다.

    “이 낯짝 달고 있으니까 아까부터 내 말 하나도 안 듣잖아, 너.”

    “그게 무슨….”

    “가기 전에 한 번 박아줘? 그럼 나인지 실감이 날 것 같아?”

    “아, 아뇨!”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기태정이었다. 그라면 이런 상황에서도 충분히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 위인이었다.

    “간단해. 내 뒤만 따라서 와. 그리고 약만 챙겨. 내가 몇 개까지 채우랬어?”

    “다섯 개요….”

    “그래. 내가 뭔 지랄을 해서라도 살려줄 테니까 시키는 대로만 해. 알겠어?”

    한 번만 더 토 달면 여기서 그냥 죽여버리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세화는 세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꾹 깨문 입술에서 낯선 화장품 냄새가 났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원래 이렇게까지 잘 울진 않았는데, 어째 기태정과 엮이고 나서는 하루하루가 눈물 바람이었다.

    기태정은 한쪽 귀에 무전기를 착용하고, 볼륨을 체크하듯 톡톡 두드렸다. 다찌들도 저런 비슷한 물건을 착용하고 있긴 했는데, 기태정의 물건은 조금 다르게 생긴 것 같았다. 아니, 그러길 바라는, 제발 리시버에라도 뭔가 장치가 있기를 바라는 자신의 소망일지도 모르겠다.

    “이, 이사님!”

    그대로 기태정이 자리를 박차고 나갈 것 같아서, 세화는 저도 모르게 불쑥 그를 부르고 말았다. 품 안에서 뭔가를 꺼내려던 기태정이 눈동자만 돌려 세화를 바라보았다. 욕먹을 거 뻔히 알면서도 그래도 딱 한 번만 더 확인받고 싶었다. 그러면 무서움이 조금은… 아주 조금은 가실 것 같았다.

    “…저…, 살려주실 거죠?”

    “…….”

    “끝까지 데리고 가주실 거죠?”

    사실 기태정에게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은 저 버리지 말아 주세요, 였다.

    의중을 알 수 없는 시선이 세화를 관통했다. 컬러 렌즈를 껴서 고유의 색마저 변한 기태정의 눈동자 속에 낯선 제 얼굴이 비쳤다. 그 또한 세화의 눈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 것 같았다.

    밀도 높은 침묵에 손끝이 절로 움찔거렸다. 세화는 뭐라도 움켜쥐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것을 간신히 견뎌냈다.

    “…그래.”

    기태정의 입술이 열린 건 두 사람의 몸이 왠지 모르게 서로에게 기울고 난 이후였다. 아까보다 미묘하게 좁혀진 거리를 순식간에 벌리며 그가 운전석 문을 열었다. 고물 자동차는 고작 그 정도의 움직임으로도 시끄럽게 삐걱거렸다.

    차 문이 열리자, 이전까진 작게 들렸던 바깥의 소리가 확성기라도 단 것처럼 세화의 귓가에 크게 꽂혀 들어왔다. 찢어지게 우는 사이렌, 경고음, 열 맞춰 달려오는 발소리…. 세화는 태어나고 세 번 가봤던 검문소의 풍경을 떠올렸다. 여기에서도 그때 맡았던 죽음의 냄새가 느껴졌다. 거기까지 떠올리니 가슴이 또 철렁 내려앉으려는데,

    “살려줄게.”

    기태정이 속삭이듯 말했다. 여기서 제일 믿을 수 없는 남자가 세상 모든 소음을 파훼하며 세화를 두드렸다.

    “끝까지 데리고 가줄게, 너.”

    그의 속내가 뭐 어떻든 간에 세화가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확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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