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
“이게 뭐야….”
세화는 욕실 문에 달린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다 울상을 지었다.
“핫도그 포장지도 아니고.”
2주가 넘는 시간 동안 샤워 가운만 입다가, 드디어 옷을 허락받았다. 다만 여기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 번째로 속옷은 여전히 주어지지 않았다는 거고, 두 번째는 고동색 상의가 세화 체격의 두 배는 될 정도로 크다는 거였다. 하의는 딱 붙는 베이지색이어서 전체적으로 보면 핫도그 포장지 안에 꽂힌 나무 막대기, 딱 그 꼴이었다.
어젯밤 기태정이 자신의 취향을 존중하기 위해 애썼다고 중얼거릴 땐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었는데… 혹시 이 얘기였나? 세화는 좀 억울해졌다. 물론 자신의 첫인상이 매우 강렬했을 거라는 건 인정한다. 그렇지만 그건 검문을 피해 보려는 수작 중 하나였지, 자신의 취향이 그렇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어, 자기 나왔….”
사과를 아삭 베어 물며 뒤를 돌아본 기태정이 작게 기침했다. 입가를 씰룩이는 것을 보니 역시 놀려먹으려고 이런 옷을 준 게 분명했다. 조금만 수틀려도 무섭게 구는 남자인 걸 알아서 최대한 건방 떨지 않으려고-기태정의 표현에 따르자면- 노력은 하고 있는데, 대놓고 저렇게 반응하니 눈매가 뾰족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음, 그래…. 잘 어울린다.”
“이사님. 저 평범한 옷 좋아해요. 처음 마주쳤을 때 이상한 옷 걸치고 있었던 건 일종의 꼼수였고….”
“그럼 이것도 꼼수 비슷한 거라고 생각해.”
“그게 무슨….”
“돌아오면 출장 같이 가자고 그랬잖아.”
세화는 그제야 부산스러운 사무실 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소파 근처에는 거대한 메이크업 박스가 몇 개나 쌓여있었고, 바로 옆에선 박 소위가 홀로그램을 여러 개를 띄우고는 뭔가를 분석하는 중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심각한 얼굴로 테이블을 둘러싸고 있었는데, 말씨름하는 와중에 얼핏 제 이름이 들린 것도 같았다.
“이게 뭐, 헉!”
궁금한 마음에 깨금발을 들고서 삐죽삐죽 근처로 다가간 세화는 소파 테이블 위에 떡하니 놓인 사람 얼굴을 보곤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펄쩍 튀었다. 사람 죽은 건 몇 번 봤지만 저렇게 잔인하게 포를 떠 놓은 건 처음 봤다. 심지어 그걸 아무렇지 않게 테이블 위에 전시해놓고 쑥덕거리고 있다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시, 시체를….”
“아니야.”
“얼굴을, 포를….”
“아니라니까.”
기태정은 와들와들 떨고 있는 세화의 뒷덜미를 낚아채고는 사람들 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앉아. 특수 분장이니까 헛소리 작작 하고.”
“…분장이요?”
“응. 우리 둘이서만 어디 좀 쳐들어가야 하거든.”
그런데 내 얼굴도 네 얼굴도 눈에 좀 띄잖아, 하며 기태정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세화는 훅 열이 오르는 뺨을 손등으로 꾹꾹 눌렀다. 아니,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얼굴 자랑을…. 민망한 건 세화뿐인 모양이었다. 옆에 선 사람들은 기태정의 저런 태도가 익숙한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하긴 다들 그의 졸개들일 테니 감히 준장님 하시는 말씀에 태클을 걸 순 없었겠지.
“어? 잠깐만요. 그러고 보니까 같이 출장 가는데 왜 저만 이런 옷 입는 거예요?”
부끄러움은 저만의 몫이라며 속으로 혼자 부산을 떨던 세화가, 퍼뜩 무언가를 떠올리곤 기태정에게 따져 물었다. 어찌나 억울한지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허벅지를 팡 내리쳤는데, 그 바람에 자루처럼 거대한 상의 속으로 공기가 유입되어 일순 몸이 풍선처럼 동그랗게 부풀었다. 아니, 부푼 것처럼 보였다. 기태정은 더는 참지 못하고 배를 부여잡고 크게 웃었다.
“이사님….”
“아… 죽겠다. 음, 이 얼굴의 원래 주인이 그런 스타일로 옷을 입어서 그래.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둘 다 안 죽었고.”
혹시라도 세화가 엉뚱한 오해를 할까 싶었는지 기태정이 한 차례 더 강조했다.
“최 원사. 얘 눈 아직도 좀 부은 것 같은데 분장 가능한가?”
“예. 이 정도는 문제없습니다.”
기태정은 웃음기를 머금은 채로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음, 그래도 눈가는 조금 따끔거릴 수도 있겠다.”
그리고 별다른 말은 없었다. 아파도 별수 없으니 참으라는 뜻일 거다.
어제, 그러니까 섹스하던 중간중간 기태정이 비싼 약을 먹여준 덕분에 겉으로 보기엔 다친 곳 하나 없이 멀끔해 보였다. 다 터졌던 입 안도 멀쩡해졌다. 그저 큰 손에 붙들려 내내 뒤틀리고 접혔던 허리만 징징 울릴 뿐이었다. 기태정은 그것도 감각에 사로잡혀서 뇌가 착각하는 것일 뿐 고통을 주는 요인은 전부 해결됐다고 했다. 의식하지 않고 있으면 곧 아무렇지 않아질 거라고.
아니, 그런 거라면… 사람이 회복을 느낄 시간을 좀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어제의 기태정은 평소보다 조금 짓궂었다. 생크림을 듬뿍 떠서 볼이며 코끝에 잔뜩 묻히고서 뽀뽀하듯 빨아주다가도, 금세 몸을 뒤집고는 망치로 머릴 내려치는 것 같은 음란한 말을 늘어놓았다.
위아래로 다 먹여주겠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을 때, 차라리 다른 걸 하겠다고 비는 게 아니었다. 어차피 매번 빨리는 구멍인데. 그냥 얌전히 내주고 말걸….
기태정이 세 번째로 사정하고, 자신이 싼 횟수는 가물가물해질 때쯤 세화는 아예 정신을 놓아버렸다. 의식이 끊기기 전 기태정이 작게 혀를 찬 것도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잠도 편안히 자지 못하고 내내 긴장하던 중이었는데, 불쑥 찾아온 사장 놈의 개소리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있었다. 그 상태로 몸까지 축났으니 세화로서도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아침이었다. 정확히는 기태정의 단단한 가슴 위에 뺨을 대고서 누워있었다. 눈만 굴려 살펴보니 여전히 그 흉한 침대방이었고, 소파 테이블 위에는 세화가 좋아하는 도시락이 차려져 있었다. 온갖 체액과 크림 따위로 더러웠던 몸은 찝찝한 곳 하나 없이 뽀송뽀송하기만 했다. 세화는 더 견디지 못하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뾰족한 바늘이 심장을 쉴 새 없이 찔러대는 기분이었다.
“이거 정말 효과가 있는 거예요?”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 민망해진 세화가 괜히 중얼거렸다. 사람들은 신중한 손길로 얼굴 거죽을 덧입혀주기만 했다. 기태정의 눈치를 보는 건가?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아서 세화는 의기소침한 낯으로 쭈굴쭈굴 목을 움츠렸다.
“티 하나도 안 나. 나 여장도 몇 번 해봤어.”
“여장이요? 이사님이요?”
그나마 기태정이 참견해줘서 더 민망해지진 않았는데… 그 내용이 가관이라 절로 목소리가 커졌다. 여장? 기태정이 여장을 했다고?
“나밖에 잠입할 수 없는 상황이었거든. 혼자 다 죽이고 나와야 해서.”
기태정은 키나 골격 자체가 남달랐다. 눈에 띌 정도로 장신이었고, 옷을 걸치고 있어도 잘빠진 몸 선이 도드라졌다. 우락부락한 근육질까지는 아니라지만, 그래도…. 아무리 얼굴이 저렇게 생겼대도 그렇지 여장을 하고서 임무를 수행했다는 게, 심지어 여러 번 성공했다는 게 믿기질 않았다.
“왜. 관심 있어?”
“네? 아, 아뇨. 그냥 신기해서….”
다리를 꼰 채 분장을 받고 있던 기태정이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피식 웃었다.
“이번 일 잘 마치고 돌아오면 상으로 한 번 해줄게.”
“뭐를요?”
“내가 여장하고 박아줬으면 하는 것 같아서.”
기겁할 말에 세화는 참지 못하고 몸을 버둥거렸다. 신중하게 작업 중이던 사람들이 쓰읍, 하고 주의를 시키기에 도로 소파에 주저앉긴 했지만….
“저는, 전 그런 이상한 취미 없어요!”
“처음으로 나한테 관심 보이길래 그런 거 좋아하나 싶었지.”
자기는 좀 무정한 구석이 있다며 기태정이 입술을 쭉 내밀었다. 정말 삐쳐서 저러는 게 아니라 세화를 놀리려고 그러는 거였다.
세화는 말을 말자는 듯 도로 눈을 감았다. 무정하다니. 그건 오히려 이쪽에서 하고 싶은 말이었다. 생각해보니까 기태정은 저더러 자기라고는 불러주면서 이름은 한 번도 불러준 적 없었다. 젖꼭지와 뒷구멍은 빨아주면서 키스는 해주지 않는다. 그럴 거면서 너하고만 하고 싶다고 말하고, 임… 신 시키겠다는 둥 말도 안 되는 소리만 늘어놓는다.
“이번에 자리 비운 동안 김석철이 완제품 숨겨둔 것으로 추정되는 곳 살펴보고 왔는데….”
기태정과 키스, 뭐 그런 거나 생각하고 있던 세화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기태정은 눈을 감고 있어서 제 멍한 얼굴을 보지 못했을 텐데도 조금 부끄러워졌다. 일전 분위기를 살피다 눈 감았다고 놀림을 받았던 게 생각보다 뇌리에 깊이 각인된 모양이었다. 주제 파악. 세화는 기태정이 저에게 주문했던 네 글자를 단단히 가슴에 새겼다.
“짐작 가는 곳이야 뻔해서 어렵진 않았어.”
“거기 가시려는 거예요? 저랑?”
“응.”
애초에 마약을 보관할 수 있는 장소 자체가 한정적이었다. 남의 눈에 띄지 않아야 하는 건 당연하고, 습도도 중요했다. 그러면서도 약을 실어다 나르기 편해야 했다. 근처에 항구든 헬기 시설이든 운송 통로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김석철 그 게으른 돼지 새끼가 언제고 쉽게 이동할 수 있는 거리로 동선을 따다 보니, 답은 금세 나왔다.
군대에서 현재 사용하지 않는 시설. 거기만큼 안전한 곳도, 무언갈 보관하기 좋은 환경도 없을 거다. 마침 육군 병력을 축소하는 바람에 놀고 있는 시설이 몇 개 있었고, 외곽을 중심으로 뒤져보니 쉽게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아… 혹시 그래서 약 옮겨 담는 연습 해두라고 하신 거예요? 오늘 가서 약 빼내려고요?”
“오, 정답.”
세화는 당황했다. 생각보다 큰일이 주어졌다. 기태정이 김 소위에게 초대를 받고 가는 것은 아닐 테니, 당연히 몰래 빼내야 하는 걸 테고….
“그런 거라면 여기서 제가 만드는 게 안전하지 않을까요? 어차피 그 완제품 제가 제조한 거 따다가 생산했을 텐데….”
“김 소위가 거기에 허튼 물건을 숨겨뒀다는 게 포인트야. 오늘 빼낸 물건이 그 증거가 되어줄 거고. 다른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기태정이 컬러 렌즈를 끼고는 눈을 깜빡였다. 한쪽 눈만 색이 달라지니 이전과는 다른 묘한 분위기가 풍겼다. 고작 그 정도로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된 것 같은 눈앞의 남자가 삐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자기는 주사기 딱 다섯 개만 채워. 그거면 돼. 알았지?”
***
세화는 볼이며 목을 만지작거렸다. 겉으로 보기엔 경계선이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거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당사자에겐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아무도 기태정의 여장을 의심하지 않았다는 건 여전히 믿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특수 분장 기술이 몹시 훌륭한 건 사실이었다. 렌즈까지 착용하고 눈동자 색도 감추니 정말 다른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몰래 이런 기술이나 배워둘 걸 그랬다. 여차하면 분장하고서 멀리 도망이나 가게.
“저, 이사님. 아까 이 사람들 안 죽었다고 하셨잖아요.”
계속 거울만 들여다보던 세화는 문득 궁금한 것이 떠올라, 운전석의 기태정을 돌아보았다. 아까 분장 다 끝나면 물어보려고 했는데 제 모습이 신기해서 깜빡하고 있었다.
“그랬지.”
“혹시 아는 사이신가요? 이렇게 신분을 빌려서….”
“모를 수가 있나. 내가 잡아 온 일급 범죄자들인데.”
“…네?”
“특수 강도 전문 집단인데, 문화재부터 보안 기술까지 국외로 안 빼돌린 게 없었어. 죽어 마땅한 새끼들이지.”
“어어….”
세화는 혼란스러워졌다. 아직 죽지는 않았는데… 지금 죽어 마땅한 일급 범죄자들의 얼굴과 신분을 뒤집어쓰고서… 물건을 빼돌리러….
“그, 김 소위가 완제품 보관하고 있는 곳으로 간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렇다니까.”
“…거기 어딘지 여쭤봐도 돼요?”
“음? 내가 말 안 했나? 1원에 있는.”
기태정은 콧노래를 부르며 내비게이션을 확인했다. 곧 자동화 운전이 불가능하다는 알림음이 들렸다.
“대피소.”
“대피소, 라면….”
“육군들이 쓰던 거라 좀 허접하긴 해도 어쨌든 군사 시설이긴 해.”
고장 난 로봇처럼 세화의 목이 삐걱삐걱 돌아갔다. 군사 시설?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그럴싸하지 않아? 보통 사람들은 절대 접근할 수 없으면서 김석철 그 새끼는 쉽게 드나들 수 있잖아.”
“자, 잠깐만요, 이사님. 저희 지금 군사 시설을… 일급 범죄자 탈을 쓰고서 가고 있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