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27)화 (27/144)

#027

“…그런 애한테 38억을 갚으라고 윽박질렀으니.”

“예?”

“뭘 처묻고 있어, 새끼야.”

장갑 낀 손으로 몇 대 뺨을 후려치자 손병규의 몸이 뒤로 휘청 밀려났다.

“나이를 그만큼이나 먹었으면 심보 좀 곱게 써라, 좀.”

물론 지금 이세화에게 가장 큰 번뇌를 안겨 준 사람은 단연 기태정 자신일 거다. 그렇지만 기태정은 뻔뻔하게도, 이런 새끼들보다야 제가 낫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저는 약은 주지 않았는가. 다른 놈들처럼 병만 주는 게 아니라.

“생긴 게 그 모양이면 마음이라도 고와야지. 그래, 안 그래.”

손병규는 자세를 바로 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다른 놈들이었으면 속으로 씹기라도 했을 텐데, 솔직히 기태정이 그런 말을 하니 반박을 할 수도 없었다.

“그, 그럼요. 제가 본 사람 중에 준장님이 제일 잘생기셨습니다.”

“씨발, 누가 너더러 내 얼굴 평가하래?”

“악!”

흠…. 기태정이 생각하기에도 이세화는, 자신의 얼굴만큼은 확실히 좋아했다. 처음 창고에서 만났을 때도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저만 바라봤다. 다정한 신호만 조금만 흘려줘도 감격하며 입술을 감쳐물었다.

이세화의 얼굴을 떠올리던 기태정은 아주 약간 부풀려던 낯선 마음의 불씨를 훅 꺼트려 버렸다. 그래, 적어도 내 얼굴은 좋아하잖아. 내가 아무리 무리한 요구를 한다고 해도 저런 생기다 만 새끼들보다는 나아. 저런 새끼들하고 난 다르지. 늘 그랬듯 합리화는 쉬웠고, 진심으로 왜곡되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기태정은 마음 한구석을 갉작이던 찝찝함을 치워 버리고 손병규나 툭툭 건드렸다.

“저, 준장님, 그럼 이 일은… 어떻게 마무리 지을까요?”

“뭘?”

“일단 제가 이세화한테 돈 갚으라고 말은 한 상태긴 하잖습니까.”

피로 칠갑을 하고서도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꼴이 기괴스러웠다. 손병규는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지치지도 않고 달려들었다.

“물론 진짜로 받으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그렇게 윽박질러 놓고서 아무 말도 안 하면 이세화도 의심스럽게 생각할 거고….”

“손 사장.”

“예?”

“나 내일 김석철이 뭐 숨겨 뒀던 창고 바로 털러 갈 거거든?”

“아, 네….”

“아마 하루 이틀이면 충분할 거고, 이후 돌아오면 여기는 군부에서… 정확히는 내 부하들이 점거하고 감시할 생각이야.”

“…예?”

꽁으로 먹으려던 38억은커녕 하우스 문 닫을 준비나 하라는 말을 하자, 손병규가 당황스럽다는 듯 어버버했다.

“물론 공짜로는 그렇게 안 해 주지. 소문 쫙 퍼지면 앞으로 손 사장은 이 바닥에서 장사하기 어려울 수도 있는데. 여기 뜨고 멀쩡한 사업 하는 게 꿈이라고 했지?”

처음 접선했을 때. 일에 협력하는 대가로 뭘 바라냐고 했더니, 손병규는 번듯한 사업을 해 보고 싶다고 했다. 아무리 돈을 모아도 성 안으론 진입조차 불가능하다고, 새 신분증을 사도 상류 사회엔 끼어들 수가 없다고 눈물까지 비치면서 읍소했다.

“조만간 군에서 압수한 부지 몇 개가 공개 입찰로 풀릴 거야. 물론 말이 공개 입찰이지, 누구 연줄을 잡고 있느냐의 싸움이지.”

“그, 그럼….”

“힘써 줄 테니까 그거나 준비하고 있어. 2성에 두 개, 3성에 하나.”

관련 서류를 던져 주자 손병규가 무릎걸음으로 후다닥 기어 왔다.

“그, 그렇지만 그것만 챙기고 하우스를 닫아 버리기엔… 물론 저희 하우스 규모가 작지 않으니 대대적인 검문 좀 거쳤다고 망하지는 않겠지만….”

“머리가 이렇게 안 돌아가. 손 사장 말대로 아주 망하진 않을 테니까 이번 기회에 관련 없는 척 손 털고 바지 사장 세우면 되잖아.”

“아….”

“양지로 나갈 거라면서. 어차피 천년만년 하우스 붙들고 있을 수도 없는데, 슬슬 가라 세워 둘 준비 해야지.”

“아, 아아…, 예, 그렇네요, 준장님!”

손병규가 깨달음을 얻은 듯 기태정을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저거 입찰받을 거야, 말 거야.”

“당연히 받아야지요!”

“그럼 박 소위 시켜서 믿을 만한 사람 준비할 테니까, 예탁금 준비해 놔. 120억 정도. 지난번에도 해 봐서 알지? 사람 몇 거쳐서 사야 안전한 거.”

“아이구, 그럼요.”

“그래. 앞으로 잘하자, 손 사장.”

“예, 준장님.”

기태정은 시가를 아무렇게나 떨어트리곤 발로 짓이겼다. 반도 다 못 태운 장초가 치익 소리를 내며 바스러졌다. 어찌나 향이 독한지, 그 자리에선 풀 한 포기도 자라지 못할 것 같았다.

옥상 문을 열고 나가기 전, 기태정은 흘끔 난간 너머를 바라보았다. 메인 하우스인 옆 건물 입구는 사람과 차가 한 뭉텅이로 엉켜 엉망진창이었다. 3, 4성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비싼 차들이 저 멀리까지 아무렇게나 주차되어 있어서, 발레파킹 요원들이 이리저리 메뚜기처럼 뛰어다니고 있었다. 입구를 끼고 조금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가면 흐느적거리며 약 빠는 놈들과 씹질하는 사람들이 엉켜 난장판이었다. 소돔과 고모라가 따로 없었다.

“준장님, 정말 손병규에게 그 부지 넘겨주실 겁니까?”

박 소위를 대신해 기태정을 보필하던 부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미쳤냐?”

“그, 그럼….”

“주는 돈이나 잘 챙겨 놔. 다 쓸 데가 있어서 그러니까.”

알겠다고 대답하면서도 부하는 살짝 갸웃거렸다. 120억이 적은 돈은 아니었어도, 기태정이 이렇게까지 입을 털며 위장막을 칠 정도로 대단한 액수는 아니었다. 기업체에서 싸 들고 찾아오는 뇌물은 단위가 다르다 보니 부하로선 굳이 이런 푼돈까지? 싶었다.

“웃기지 않냐? 얼추 38억 세 배로 불리면 120억이잖아.”

“…예?”

부하가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기태정이 멍청하게 굴면 싫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절로 그런 반응이 나왔다. 혹시 손병규가 이세화에게 부른 금액을 겨냥해서 그렇게 말한 건가? 그렇지만 그건 37억 8천이었고… 38억으로 친다고 하더라도 40억의 세 배인 120억과는 무려 6억이나 차이가 났다.

“그 돈이 결국 이세화한테 갔다고 생각해 봐. 나중에 알고서 저 새끼 얼마나 끙끙 앓겠어?”

실실 웃는 기태정의 얼굴은 악마가 따로 없었다.

“받았다 뺏기면 얼마나 속상한지 손병규 그 새끼도 알아야 해. 그래야 저런 개짓거리를 안 하지.”

난 공명정대한 공직자라고, 하면서 기태정이 어깨를 으쓱였다. 소심하고 현명한 수하는 영혼 없는 목소리로 맞다는 대답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안에는?”

“무전 받기로는, 준장님 나가신 이후로 훌쩍이는 소리만 들렸다고 합니다. 그것도 잠깐이고 지금은 울지도 않고, 뭘 정리하고 있는지 바스락대는 소리 정도만 들린다고 합니다.”

“알았어, 가 봐.”

옥상에서 삼 층 내려가면 사무실이 나온다. 기태정은 휘파람을 불며 계단을 내려갔다. 밖에 선 놈들에게 피 묻은 쇠 파이프와 가죽 장갑을 내던지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이세화는 무릎을 모으고서 소파 위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여기저기 번쩍이는 도금 장식을 달아 둔 집기 사이에, 새하얀 가운을 입고서 저러고 있으니 꼭 제단 위에 놓인 산 제물처럼 보였다.

“약 먹고 있으라고 했더니….”

옆에 털썩 주저앉자 이세화가 슬금슬금 몸을 물리려고 했다. 무시한 채 허리에 손을 감고 쭉 끌어당기자, 말랑말랑한 몸이 옆구리에 와서 착 감겨 붙었다. 결국 이렇게 될 거 알면서 매번 뭐 하러 힘을 빼는지 모르겠다.

“왜 이렇게 말을 안 듣지?”

“…서요.”

빠릿빠릿하게 대답 안 하면 괴로운 일만 생긴다는 걸 학습한 이세화는 작은 목소리로나마 즉각 대꾸했다.

“뭐라고?”

“이거, 정리해야 해서요…. 사장이, 사장님이 또 와서 시비 걸까 봐….”

“왜. 이거 망가뜨린 것도 빚으로 달 것 같아서?”

“…네.”

“어디, 얼굴 좀 보자.”

이세화의 턱을 잡고 휙 돌렸다. 기태정의 배려 없는 손길에 조금 인상을 썼지만, 착하게도 반항하진 않았다. 잘했다고 칭찬해 주고 싶었다. 내내 사람 썰다가 와서, 눈앞에서 반항하는 꼴을 보면 습관적으로 손이 나갈 것 같았다. 물론 그동안 충분히 내키는 대로 이세화를 대하긴 했지만, 지금은 조금 불쌍하니 봐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야. 볼때기 빵빵한 햄스터 같네.”

열을 펄펄 내며 울었던 건지, 희미한 땀 냄새가 났다. 시큼 텁텁한 땀내는 아니고… 신나게 뛰놀다 땀 뻘뻘 흘린 어린애처럼 우유 향이 뒤섞인 그런 체취였다. 진짜 어려서 그런가.

“눈도 붕어처럼 팅팅 붓고.”

손병규가 눈을 후려치진 않았을 테니, 울어서 이렇게 된 걸 거다. 참아 보겠다고 자꾸 문지르고 닦아 내고 했을 거고.

“배 다 꺼졌겠네.”

“…….”

“또 사 오라고 하길 잘했다.”

호출 버튼을 누르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하가 파스텔 톤의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이세화는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핑크색, 하늘색 구름으로 범벅이 된 상자를 안겨 주자 더더욱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바보 같은 표정만 지었다.

“여기 케이크도 맛있다더라. 먹어. 오늘은 더 안 팔겠다는 거 내가 존나 갈궈서 하나 더 구우라고 했어. 잘했지?”

“…….”

“케이크 잘 먹었다며. 나도 직접 보고 싶어. 자기가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감시 용도로 찍은 영상 같은 게 아니라 눈앞에서 보고 싶었다고, 크림을 쪽쪽 빨아 먹는 혀가 미친 듯이 꼴렸다는 부연 설명은 쏙 빼놓은 채였다. 그런데….

“…흐, 으….”

상자를 꼭 안고서, 이세화가 또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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