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26)화 (26/144)
  • #026

    “협의? 무슨 협의.”

    “그, 그게….”

    이세화는 아프게 해 놓고선 곧장 치료제를 내미는 기태정을 잔인하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상처 주고, 낫게 하고, 또 상처 주고. 물론 그게 심문의 정석이긴 했지만, 이세화한테는 가장 약한 루틴 한 번 돌린 적 없었다. 그런데도 그 어린 것은 어찌나 겁이 많은지 매번 ‘낫게 하고’ 정도에서 멈췄는데도 저만 보면 덜덜 떠는 중이었다.

    “아악! 준장님!”

    꿇고 있는 허벅지를 세게 짓누르자 손병규가 꽥꽥 비명을 내질렀다.

    확실히… 이세화는 많이 봐주는 중이었다. 얼굴도 몸도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 때리는 것보단 다른 방식으로 울리는 게 더 재밌으니까. 진짜 사람 피 말리는 건 이런 짓이었다. 관절이 뒤틀리고 뼈가 부러질 정도로 처맞는 도중에도 상처는 끊임없이 재생되도록 하는 거.

    느껴지는 고통은 그대로인데, 아픔이 느껴지는 부위를 보면 멀끔하기만 하다. 닦아 낸 손엔 분명 핏방울이 묻어 있는데 더듬어 보면 상처는 온데간데없다. 거기에서 오는 인지 부조화는 사람의 몸뿐 아니라 정신까지 서서히 흩어지게 했다.

    “내가 뭐만 잘하라고 했지?”

    “분위기 맞춰서… 젊은 사기꾼한테 완전히 속아 넘어간 것처럼, 으아악!”

    “그래. 내가 손 사장한테 그것만 부탁했잖아.”

    발을 떼어 내자 손병규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철퍼덕 엎어졌다. 물론 이대로 끝내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기태정은 뒤의 부하가 들고 있던 쇠 파이프를 빼앗아 들었다.

    “끝까지 그 연기만 잘해 주면,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던 성 안의 땅 주겠다고, 했잖아, 내가.”

    퉁퉁하게 살이 오른 손등을 콱콱 내리찍을 때마다, 내뱉는 음절이 툭툭 끊겼다. 손병규는 이번엔 비명도 못 지르고 거품만 물었다. 돈으로 매수한 놈에게 대단한 충정을 기대했던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계약 이행 중에 멋대로 굴었다간 아주 피곤해질 거라는 걸, 이번 기회에 제대로 알려 줄 생각이었다.

    “먹여.”

    뒤에 서 있던 부하 중 하나가 기절한 손병규 입에 약을 쑤셔 넣고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목울대가 꿀렁이는 걸 확인한 부하는 손병규의 뺨을 몇 대 후려쳤다. 몇 번 발작하듯 몸을 튀던 손병규는 어흐흑, 울며 다시 바닥에 엎어졌다.

    “이세화 빚 갚아 주겠다고 갑자기 통신 넣었을 땐 잘만 받아치는 것 같더니. 지금은 왜 시키지도 않은 짓거리를 하고 있어? 누가 이세화 패래? 응?”

    처음엔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김 소위가 자주 접촉하던 성 밖의 사람들을 잡아들여 족치고, 졸로 쓰는 패들이 움직이는 루트를 파악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처음부터 선명했고, 쉬웠다. 박 소위와 지겹게 말했듯 이 일은 증거의 정확성과 정당성이 문제일 뿐이었다.

    슬슬 끝을 보자며 핵심 인물인 이세화에게도 손을 뻗기로 한 이후로는 밑바닥에서 활동하는 새끼 조폭인 양 위장했다. 돈은 많은데 살짝 어수룩한 놈들이 있다고 여기저기 소문을 흘리고, 손병규를 낚았다. 의심이 많았던 놈은 군부 인사를 소개받을 수 있다는 말에 그제야 무거운 몸을 움직였다.

    신분 확인을 시켜 주려 검문소 인근으로 불러내 포트를 태워 주자, 손병규는 감격으로 몸을 떨었다. 놈은 원래도 원대한 야망이 있었다. 군인을 포함한 상류 계급과 인맥을 쌓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반드시 이세화를 거쳐야 김 소위와 소통할 수 있는 게 자존심이 상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그토록 바라던 군인이, 그것도 준장이나 되는 사람이 저에게 은밀한 계획을 제안하니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선 바라지도 않던 충성을 맹세했다.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손병규는 기태정이 김 소위와 이세화 모두를 처단해 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놈은 이세화를 증오하고 있었다. 이유를 물으니 그냥 얄미워서 그렇다고 했다. 기태정이 보기엔 그냥 자신의 자격지심을 다른 사람들보다 약해 보이는 이세화에게 표출하는 것에 불과했다.

    만약 이세화가 지금보다 더 순하게, 자포자기하고 살았더라면 손병규에게 미움받지 않았을까? 글쎄. 기태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랬더라면 맹하고 멍청하다고 더 구박하고 함부로 대했을 거다. 그냥 손병규는 그렇게 생겨 먹은 새끼였다. 추접스럽다. 그 말이 딱 맞았다.

    어쨌든 쓰고 버리기엔 나쁘지 않은 패였으므로, 기태정은 손병규에게 협상안을 제시했다. 제가 써 준 시나리오대로만 움직이라고. 대본이라고 해 봤자 사람들에게 새끼 조직 하나와 같이 사업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됐다고 말해 달라,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이 씨발 놈의 새끼가 그거 하나도 제대로 못 했다. 자신의 명령도 없이 이세화를 두들겨 패고 있었다. 그것도 기태정이 이미 다 갚아 준 빚을 들먹이면서.

    “주, 준장님. 일단 제 얘기를 좀 들어 보시고….”

    “말해.”

    거만하게 턱짓하자 손병규가 주섬주섬 무릎을 꿇었다. 도로 멀쩡해진 몸을 보고 끄으으, 하며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면서.

    “그, 그게… 얼마 전에 박 소위님 통해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세화 계약서 뒤져 보고 꼬투리 잡을 거 생각 좀 해 두라고…. 실제로 박 소위님이 제 사무실로 와서 도움을 주시기도 했고요.”

    “그런데?”

    “그, 그런데 바로 어제 김 소위가… 그러니까 김석철이 연락을 해서는 준장님과 같은 지시를 내렸습니다!”

    “같은 지시?”

    “네, 어젯밤에 급하게 연락이 와서는 이세화가, 크흡, 빚 다 갚고 관두겠다고 하지 않았냐, 근데 그거 그렇게 내보내면 안 된다, 계약서에 있는 말 중 아무거나 문제 삼아서 주저앉혀라… 뭐, 그래서, 쿨럭, 이거 뭔가 있구나 싶었습니다.”

    “이세화를 놔주지 말라고 했다고? 김 소위가?”

    “예예. 저한테 직접 연락한 일이 손에 꼽는데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이거 빨리 실행에 옮겨야 준장님께도 도움이 될 것 같은 마음에 그만….”

    기태정은 턱을 쓸었다. 김석철이 이세화의 향후 문제에 신경 쓰는 건 당연했다. 가장 중요한 공범이요, 추후엔 잘릴 꼬리로 내밀 생각일 테니까. 그런데 대뜸 구체적으로 지시를 내린 게, 그것도 빚이나 왕창 지우라고 했다는 게 좀 이상했다.

    “김 소위가 정확히 뭐라고 했어.”

    “원래는 손님이 하우스를 통해 값을 치르고, 거기서 수수료를 떼고 선수들에게 정산해 줍니다. 그 과정에서 뗄 돈 있으면 더 떼구요. 그런데 김석철은 그렇게 여러 사람 걸치는 거 싫다면서 이세화에게 바로 돈을 줬습니다. 조금이라도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겠죠, 김석철 입장에서야.”

    “아하. 그래서 아까 수수료 타령을 한 건가?”

    “그, 그렇죠…. 그런데 김석철한테 약식으로나마 서류 받아 둔 게 있거든요. 본인 서명까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이세화한테 이 금액 넘겨줬다는… 하여튼 그런 서류도 있고 해서, 그래서 수수료가 문제가 될 부분은 아니긴 합니다.”

    “그렇지만 따지고 들 구석은 있으니까 그걸 핑계 삼으라고?”

    “네네. 김석철이 정확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박 소위는 뭐라고 도움 줬는데? 걔도 그랬어?”

    “아, 아뇨… 박 소위님은 보안 부분을 문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보안을 준수한다는 내용이 없으니까… 이거 해결이 될 때까지 하우스 밖으로 못 나간다고….”

    “으음.”

    기태정은 쇠 파이프를 잡고서 껄렁하게 몸을 굽혔다. 하는 행동만 봐선 동네 양아치가 따로 없었다.

    “나 갑자기 궁금해져서 그러는데. 그래서 우리 손 사장은, 이세화한테 그 돈 다시 다 토해 내라고 할 생각이야?”

    “예? 에이, 아닙니다. 소문 돌면 다른 애들 사기만 안 좋아질 거고… 그냥 윽박 좀 질러 본 거예요. 정말입니다.”

    “얼마였는데?”

    “예?”

    “이세화한테 수수료 얼마 불렀냐고.”

    필사적으로 부정하던 손병규의 얼굴이 일순 밝아졌다. 기태정이 대신 그 돈을 줄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밑에 지저분한 건 다 떼고 37억 8천이었습니다.”

    37억 8천도 이번 주까지만 계산한 금액이고, 거기에 매일 이자의 이자가 더 붙는다는 얘기는 쏙 감췄다. 손병규는 돈과 관련한 일에선 눈치가 빨랐고, 받아먹을 수 있을 때 치고 빠지는 게 이익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37억 8천이라고.”

    “예에, 딱 그것만 받으려고 했어요.”

    일전에 남은 빚이 얼마냐고 물었을 때 이세화는 2억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차 떼고 포 떼고 사납금까지 다 합쳐서 그것만 갚으면 된다고 했다. 그나마도 몇 달 뒤에 나갈 것을 예정하고서 계산한 금액이라고. 그런데 이세화가 김석철 손잡고 약물 돌린 게 뭐 몇 번이나 된다고 저 정도로 빚이 불어난단 말인가.

    “37억 8천….”

    이세화는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본인도 모르는 것 같았지만, 기태정이 보기엔 그랬다.

    이세화는 섹스에, 정확히는 매춘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몸 팔았냐는 물음에 유독 날을 세우며 변명하던 것도 그렇고, 엉엉 울던 것도 그렇고… 하여튼 그 주제엔 굉장히 민감했다. 저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또 그간 어떤 일을 이겨 냈던 건지 충분히 이해했는데도 이세화는 몇 번이고 변명하듯 자신은 창부가 아니라는 얘기를 꺼내곤 했다. 누군가 물어보면 이렇게 답해야지, 연습한 것처럼 보일 정도로. 오랜 시간 이 주제에 깊이 매몰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잠자리 좀 갖는 거 별것도 아닌 듯 말하면서도 정작 몸을 열면 엉망으로 눈이 떨렸다.

    이세화를 대면하기 전, 하우스 사람들을 통해 들은 이야기도 비슷했다. 그거 창놈 아니냐는 물음, 결국 웃음 팔아 약도 파는 거 아니냐는 조롱, 걔가 언제까지 안 대 주고 살 수 있을 것 같냐는 비웃음…. 그간 주변에서 이세화를 어떻게 바라봤는지, 내심 그를 어떻게 망치고 싶어 했는지 여실히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그렇게 남들의 저주대로 살지 않겠노라 용을 써 온 이세화였는데, 결과적으론 기태정에게 뒤를 대 주고 빚을 갚은 셈이 되어 버렸다. 그것도 어설픈 내기 같은 거나 하다가 얼결에 허락하는 형태로 말이다.

    김석철이 완성품을 숨겨 뒀을 만한 곳을 확인하느라 밖으로 잠시 나와 있는 동안, 기태정은 짬을 내어 이세화의 동태를 엿보았다. 군부에서 쓰던 카메라를 써서 그런지 소리까지 생생하게 다 잡혔다. 이세화는 기태정이 보내 준 음식과 장난감에 감격했고, 즐거워했다. 그러다가도 문득 내가 여기서 지금 뭘 하는 걸까, 그런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곤 했다. 여기서 안락함을 느끼는 자신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아니 용서할 수 없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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