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
“어? 어, 언제 왔어?”
사장이 웬일로 말을 더듬었다. 주인 없는 사무실에 들이닥친 게 머쓱했던 모양이다.
“기 이사, 내 말 좀 들어 봐. 삼월이 저게 글쎄….”
“나가서 담배라도 한 대 태우실까요? 많이 화나신 것 같은데.”
그럴 때가 있다. 인지가 시선보다 느릴 때.
분명 똑똑히 지켜보고 있는데도,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혹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을 때. 눈물이 줄줄 흐른다는 것도 모르고, 지금 꽤 다쳤다는 것도 모르고, 사실 지금 아픈 건 몸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도 모르고서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한 박자 늦게 뿌옇던 잔상이 선명해지고, 꽃이 만개하듯 사방의 소리가 확 트이고, 그러고 나서야 날 것의 울음이 둑처럼 터져 버리는 때가.
“휴…. 내가 기 이사 얼굴 봐서 지금은 그냥 가는데! 기 이사도 삼월이 저거 봐주지 말고 잘 가르쳐, 어? 오냐오냐해 주니까 저게 아주 머리 꼭대기까지 기어오르려고!”
“네, 그러겠습니다.”
홀연 나타난 기태정은 능숙하게 사장을 달랬다. 세화는 멍하니 울기만 했다. 그 와중에도 퉁퉁 부은 뺨이 아파서, 슬쩍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눈물이 부푼 살갗에 닿지 않도록. 아픈 건 싫어서 익숙한 꼼수를 부리는 자신의 본능이 우스웠다.
“마침 드릴 말씀도 있었어요.”
밑에서 툭툭 소리가 났다. 흘끔 눈만 드니, 멀끔한 구두코가 저를 부르듯 소파 아래를 두드리고 있었다. 무뚝뚝하게 느껴질 정도로 클래식한 디자인의 고급스러운 구두. 신발의 주인은 당연히 기태정이었다. 세화는 물로 흠뻑 젖은 속눈썹을 간신히 깜빡였다. 이번엔 기태정인가. 저 남자는 또 무슨 말을 해서 제 상처를 헤집어 놓으려는 걸까. 내가 불쌍하지도 않나. 그게 아니라면 구질구질해서 보고 있기 좀 짜증 나지 않나. 뭐든지 간에 절 좀 가만히 내버려 뒀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기태정은 세화가 아는 그 누구보다 집요한 사람이었다. 세화가 고개를 들어 쥐어 터진 얼굴을 고스란히 보이기 전까지, 그는 거기 못 박힌 듯 서 있기만 했다.
결국 세화가 먼저 백기를 들었다. 가운 소매로 눈물을 꾹꾹 누르고, 볼 테면 보라며 고개를 쳐들었다. 뜻대로 움직일 때까지 기태정은 저렇게 버티고 있을 거고, 기다리다 지친 사장은 또 지랄해 댈 거다. 만약 여기서 사장 새끼가 소리라도 지르면 저도 더는 못 참고 진짜 눈이 확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사고라도 치기 전에 그의 뜻대로 굴자고 생각했다. 다 벗고 울고불고 매달리기도 했는데 이게 뭐가 부끄럽다고.
“…….”
그렇지만 집요하게 얼굴을 보이라고 요구했던 남자는 의외로 아무 말도 없었다. 그저 엉망이 된 세화를 가볍게 훑어보고는, 그대로 돌아설 뿐이었다. 그러면서,
‘아프겠다.’
입 모양으로만 저렇게 벙긋거렸다.
‘약 챙겨 먹고 있어.’
…그게 전부였다.
두 사람분의 발소리와 사장이 시부렁시부렁 욕하는 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세화는 손에 쥔 장부를 힘껏 구기며 소파 위로 무너졌다. 약이나 챙겨 먹으라는 위로를 들으니 간신히 움켜쥐고 있던 마지막 마음 조각마저 전부 부서진 기분이었다.
잠시 투견처럼 거친 숨만 몰아쉬던 세화는 박스 안에 놓인 거즈를 여러 장 뽑아 들었다. 몇 개를 겹쳐 한꺼번에 입 안에 문 채로, 그게 사장 놈이라도 되는 것처럼 까득까득 깨물었다.
전부 좆같았다. 다 죽여 버리고 말 거다. 치졸한 수를 들고 와 제 속을 뒤집어 놓은 사장은 물론이고 갑자기 나타난 기태정도 미웠다. 다 싫다. 끔찍해, 전부 다….
“…하아.”
길 잃은 원망을 곱씹던 세화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이성을 찾으려 애썼다. 결국은 자기 자신의 문제였다. 억울한 일 한두 번 겪나. 뺨 맞은 게 뭐 하루 이틀인가. 서러워해 봤자 나만 손해였다. 이럴 시간에 돈 벌 궁리나 하는 게 나았다. 울지 말아야지. 울면 배만 꺼지니까. 아까 먹은 케이크 맛이 어땠더라….
세화는 피와 침으로 척척하게 젖은 거즈를 빼내고, 멀쩡한 면이 나오도록 도로 이리저리 접었다. 특히 피가 많이 묻어 나오던 곳으로 다시 천 쪼가리를 욱여넣고서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빠르게 눈을 깜빡이면서 자꾸 비집고 나오려는 눈물을 삼켰다. 누구 좋으라고 울어. 왜 울어.
왜….
“…흐, 윽….”
아 씨발…. 애써 잠잠해지려던 마음이 또 펑 터져 버렸다. 평소엔 눈물이 나도 쉽게 그치는 편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원래 이런 일 매번 겪지 않았느냐고 자신을 달랬던 게 문제였을까? 세화는 거즈를 악물고서 짐승처럼 울었다. 목구멍으로 꼴깍꼴깍 넘어오는 피와 침을 삼키면서, 텅 빈 손을 부서질 듯 말아 쥐었다.
그러게. 왜 나한테는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일어나는 거지?
하우스에는 성직자도 자주 드나들었고, 스님이며 무당도 찾아왔다. 그들은 헌금과 공양물을 화투 패 혹은 마약과 교환하며, 세화에게 훈수를 두었다. 네 이번 생이 고단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다 전생의 업보다, 지금이라도 반성하며 잘 살면 죽어서 천국 갈 거다, 극락왕생할 거다, 아니면 좋은 팔자로 환생할 거다….
한때는 세화도 그런 말을 듣고 위로를 받은 적도 있었다. 금전으로 살 수 있다는 공평한 구원이 저에게도 오리라 믿었다. 조상님께 제사를 올려 보라고 해서 백중날 제사 지낼 돈도 내 봤고, 크리스마스나 부처님 오신 날에 헌금도 내 봤다. 맨발로 가시밭길을 헤쳐 나가는 기분이 들 때마다 언젠가 가게 될 천국과 극락을 생각했다. 사장 놈을 비롯해 저를 힘들게 한 사람들이 지옥 불에 떨어지는 상상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억울함이 밀려왔다. 천국이나 환생 같은 거 바라지도 않으니까, 지금 조금만 덜 괴로울 순 없는 건가? 평범하게 살다 죽고, 평범하게 또 태어나면 안 되는 건가. 천국 같은 곳은 바라지도 않으니까.
손님들은 정성껏 기도하면 언젠가는 응답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렇지만 성 밖에 사는 꾀죄죄한 어린 양의 마음은 신에게도 썩 쓸모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점점 지쳐 버린 세화는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은 무엇도 믿지 않게 되었다. 종교라거나. 신념이라거나. 혹은 타인의 마음이라거나….
헌금이니 공양이니 하는 걸 다 그만뒀던 게 몇 살 때였더라? 13살이었던가? 세화는 눈물을 그쳐 보려 쓸데없는 생각이나 했다. 그러면서 널브러진 주사기를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습관이었다. 저 주사기 하나에 5만 원씩 떼어 간다. 망가지면 물어줘야 하니 큰일이었다. 하긴. 지금 주사기가 문제가 아니긴 했다. 망할 사장 새끼가 여기다 장부를 내던지는 통에 마약 일부를 못 쓰게 되었다. 이건 또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차피 손님한테 나갈 건 아니긴 하니까 기태정도 모르는 척 넘어가 주지 않을까.
“…넘어가 주기는.”
허튼 생각을 하는 자신을 꾸짖듯 세화가 중얼거렸다. 다 갈라져 형편없는 목소리였다.
“내 빚으로 달아 놓으려나….”
이것저것 베풀어 주는 것처럼 보였어도, 결국 본인이 원하는 건 반드시 손에 넣는 남자였다. 아니, 손에 넣는 정도가 아니라 어떻게든 이윤을 남기고야 말았다. 섹스만 해도 그렇다. 안 넣겠다고 해 놓고선 결국은 넘치게 쑤셔 대고 사정했다. 챙겨주는 밥과 케이크가 맛있긴 했지만, 제대로 된 옷도 한 벌 안 주고서 2주가 넘도록 밖으로 못 나가게 한 사람이었다.
세화는 모래성이라도 쌓는 것처럼 흩날리는 가루를 주섬주섬 그러모았다. 범죄의 정수처럼 보이지 않는 새하얀 더미들이 형광등 불빛 아래 반짝였다. 모아도, 모아도 나풀나풀 날아가는 마약을 보면서 세화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예쁘지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웃음이었다. 지금 눈앞의 풍경처럼. 늘 그랬던 것처럼.
***
“주, 준장님! 일단 제 말씀을…, 아악!”
“비싼 거 먹여 줘도 싫다고 그러네?”
기태정은 손 사장의 위턱과 아래턱을 분리할 듯 벌려 젖히고는, 가지고 있던 약을 입 안으로 탈탈 털어 넣었다. H3. 외상과 내상에 즉각적으로 듣는, 군대 내에서도 일정 계급 이상만 쓸 수 있는 치료제로 그간 이세화에게 꾸준히 먹인 약보다 높은 등급의 물건이었다.
“으, 쥬, 쥰잔님….”
“어? 발음 똑바로 해야지. 중장 아니고 준장. 높으신 분들이 내 계급에 얼마나 민감한데.”
곤죽이 된 하우스의 사장, 손병규의 눈에 공포가 어렸다. 알약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자마자 찢어졌던 입술과 멍이 들었던 얼굴 등이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갔다. 몸 안까지 상한 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겠지만, 그래도 금세 회복될 거다.
“손 사장아.”
“예, 예…!”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고 지랄이었을까? 우리 그간 잘하고 있었잖아.”
“저는 분명 협의가 다 된 얘기라고 생각해서….”
놈은 어흐흑 울며 기태정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매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