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24)화 (24/144)

#024

“근로 계약서요? 제가 그런 걸 언제 썼어요?”

“너 채권 넘어올 때 같이 썼잖아! 기억 안 나?”

무슨 사람을 악덕 업주로 만들고 그러냐며 사장이 길길이 날뛰었다. 세화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놈의 쇼를 지켜보았다. 그래, 저건 쇼였다. 정말로 빡친 사장은 저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일부러 저러는 거다.

“자, 봐라.”

두툼한 장부가 테이블 위로 툭 내던져졌다. 세화는 눈을 찡그리며 낡은 종이 뭉치를 들어 올렸다. 하필 던져도 약을 쌓아둔 쪽으로 던지는 바람에, 삭고 닳은 누런 종이 틈새로 새하얀 마약이 뼛가루처럼 내려앉았다.

낡은 장부 안에는 세화의 모든 인생이 적혀있었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아비가 빌린 돈부터 시작해서 그간 거쳐온 모든 채무가, 세화를 무간지옥으로 처넣은 빌어먹은 차용증들이 한데 엉켜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이게 왜요?”

당장이라도 죄 찢어발기고 싶은 걸 꾹 참으며 묻자, 사장이 실실 웃으며 고갯짓했다.

“제일 뒤로 가 봐라.”

세화가 가장 최근 적을 옮긴 곳이 이 하우스였기 때문에, 모든 채권을 이곳의 사장에게로 양도한다는 서류가 있었다. 앞으로 갚을 빚이 얼마인지, 또 어떻게 갚을 것인지… 간략하게 손으로 쓴 각서와 정산 내역도 있었다. 다달이 갚아나간 액수 옆에는 세화의 지장이 정성스레 찍혀있었다. 혹시라도 나중에 딴지를 걸까 봐 또박또박 정확하게 액수를 쓰고, 어떤 오해의 소지도 없게 칸에 맞추어 꼭꼭 찍어 두었다.

“봤냐?”

점점 줄어드는 금액을 보고 있자니 괜히 뭉클해져서, 가만히 그 페이지만 바라보고 있는데 사장이 실실 웃으며 끼어들었다.

“뭘요?”

“아니, 거기 말고. 앞에. 아니, 두어 장 더. 어, 그래. 거기.”

종이를 휙휙 넘기다 손으로 쓴 각서 페이지가 나오자, 사장은 박수를 짝짝 쳤다. 바로 거기라고.

“이게 왜요?”

뭐 문제가 될 게 있나? 세화는 어리둥절한 낯으로 각서를 살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이자를 달고 있었으니 합법적인 조항이라곤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곤 해도 그건 사장의 문제이지, 저와는 관계가 없는 부분일 텐데….

“보니까 그간 김 소위가 너한테 먼저 돈을 주면, 네가 그걸 우리한테 넘겨줬잖아. 맞지?”

“네. 그게 왜….”

“여기 봐라.”

사장이 귀밑까지 입을 찢으며 각서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손님으로부터 얻는 모든 추가 수익, 괄호치고 추가 거래 대금, 사용한 물품 비용, 팁 등 괄호 닫고, 어어… 수익은 하우스에 선입금 후 수수료를 제외하고 정산받아야 한다.”

“…그런데요?”

“뭐긴 뭐야! 너 김 소위한테 받은 돈, 네가 먼저 슈킹했잖아. 나한테 먼저 안 주고.”

“슈킹이라뇨?”

“어쨌든 네가 먼저 수령한 다음에 다시 하우스로 보냈잖아? 그거 엄밀히 따지자면 계약 위반이지. 안 그러냐?”

“그게 무슨….”

사장의 말도 안 되는 트집에 어이가 없어졌다. 물론 그런 조항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혹시라도 선수나 직원들이 받은 돈을 조금이라도 떼어먹고서 수익을 보고할까 봐 붙인 조건이었다. 세화 또한 이전까지는, 당연히 내부의 룰을 따라왔다. 알고 지내던 동갑내기가 판돈 50만 원 정도 빼돌렸다가 맞아 죽은 걸 본 이후로, 다른 건 몰라도 절대로 돈은 마음대로 처리하지 않았다. 물론 소액의 팁 정도는 슬쩍 입 닦을 때도 있었지만, 거래 대금처럼 명목이 확실한 굵직한 돈에 손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장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잖아요.”

그렇지만 김 소위와 거래를 할 땐, 사장이 먼저 나서서 규정대로 할 필요 없다고 했다. 불법 하우스와 돈 주고받은 흔적 남기지 말고, 최대한 소위님 편의를 맞춰 드리라고 했다.

“무엇보다 김 소위님이 금액 얼마라고 매번 증명해 주셨는데, 인제 와서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사장은 대금을 받을 때마다 김 소위와 꼭 통화를 했다. 배려해 드리겠다고 입을 털면서도, 김 소위에게 약식으로나마 증빙서류까지 받아 낸 독한 위인이었다. 그런데 지금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지? 제 명의의 통장은 물론이고 묵는 숙소, 자주 가는 장소까지 주기적으로 뒤지며 혹시라도 빼돌린 돈이 있는지 감시하고 있으면서.

“아니, 내가 어제 자다가 든 생각인데 말이다. 솔직히 거래를 직접 지켜본 것도 아닌데 그 서류만 어떻게 믿겠냐? 막말로다가 네가 장난질했을 수도 있는 거잖아.”

“사장님!”

“매조가 이번에 공사 따오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아무래도 이상하더라고. 너만 약 파는 게 아닌데, 무려 소위급을 물었다곤 하더라도 이렇게 돈이 쫙쫙 까일 순 없는데 말이야.”

사람이 너무 화가 나면 되레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는 모양이다. 세화는 이마를 짚으며 눈을 감았다. 억울하고, 열받고, 하여튼 온갖 감정이 훅 치밀어 올라 어질어질했다. 귓가에 씩씩대는 저의 숨소리만 들렸다. 너무 답답해서, 서러워서… 만약 지금 옆에 기태정이 있다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적어도 그는 저를 필요로 하니까. 김 소위의 허물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도 당장 자신의 편을 들어 주었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괘씸해서 거기 쓰인 대로 벌금까지 다 받아 가려고 했는데, 크흠. 뭐냐, 네 빚 갚아 준 기 이사 체면도 있고, 그래도 우리가 같은 식구로 보낸 세월도 있고 해서…. 거래 대금 수수료 5%만 내면 없던 걸로 해 주려고 한다. 원래는 하우스 몫으로 30% 떼어 가는 거 알지?”

사장이 재킷 안을 뒤적여 낡은 계산기를 꺼냈다.

“보자, 사사오입해서 소수점 아래는 떼면… 37억 8천이네.”

“…뭐라고요? 37억이요?”

“수수료야 매일매일 떼는 거고 거기에도 지연 이자 붙으니까. 지금 네가 김 소위 대금 삥땅친 세월이 2년이 넘어요.”

세화는 더듬더듬 머릿속 주판을 튕겼다. 황당하지만 가능한 금액이긴 했다. 수수료에 지연 이자가 붙으면 다음 날 그 금액에 또 이자를 붙이고, 그다음 날 또 전체 금액에 이자를 붙이고…. 사채나 꽁지라는 게 원래 그런 식으로 덩치를 불려 나갔으니까. 그 망할 이자 때문에 평생을 내내 구르고도 빚을 다 갚지 못했던 거였다.

“하….”

어이가 없으니 자꾸 헛웃음이 나왔다. 어쩐지 그만둔다고 했을 때 순순히 허락해준다 싶었다. 이런 꿍꿍이속이 있었던 모양이다. 빚을 다 갚으면 그때 새로운 족쇄를 들이밀려고. 한껏 꿈에 부풀어 있을 때 다시 진흙탕 속으로 처박으려고.

“그래도 고맙게 생각해라. 김 소위만 아니었으면 어차피 돈 나올 구석도 없는 거, 어디다 가둬 두고 죽을 때까지 손님만 받게 할 수도 있는 거였어.”

“…다시 해요.”

“뭘 다시 해?”

“계산 정확히 다시 하자고요.”

“뭐?”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내가 나 찾아왔던 손님들한테 몸 파는 애들 붙여 줬던 거, 그 중개료도 제대로 정산해야죠. 여기 있네요. 본 하우스의 도움을 받아 담당 업무 외의 새로운 사업을 전개했을 때는 그 노고를 치하하여 거래 대금의 10%를 별도 정산해 준다.”

그동안 세화가 이 조항을 몰라서 입 다물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경리한테도 말해 보고, 저보다 고참인 실장에게도 몇 번이나 말해 봤다. 그렇지만 돌아온 건 눈치 좀 보고 살라는 핀잔이었고, 더 심할 땐 구타였다. 누구도 제 말을 들어주지 않아서, 무섭고 서러워서 결국은 세화도 포기해 버렸다. 그래도 하우스에서 챙겨 줘야 할 돈만 못 받았지, 창부들에게선 그들 몫의 중개료를 조금이나마 나눠 받고 있었다. 나름대로 수완을 발휘해 남들보다 빠르게 채무 탕감하고 있으니 그게 어디냐고 자위해 왔다.

하지만 사장 이 개놈의 새끼가 이렇게 치사하게 나오니, 세화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처음에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너 못 나간다고, 갚을 돈 더 있다고 말해 줬더라면 이렇게까지 화가 나진 않았을 거다. 기태정이 2억 남짓한 빚을 다 갚아 주고 나서야 뒤늦게 찾아와 이딴 소릴 하니까 속이 뒤집히는 거였다.

“이게 진짜 어디서 또박또박 말대꾸야!”

“왜요? 계약대로 하자면서요? 그리고 말은 바로 합시다. 뭐? 돈 나올 구석이 없어? 내가 여태까지 여기다 벌어다 준 돈이 얼만데…!”

말을 다 잇기도 전에 사장이 세화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이 새끼가, 오냐오냐해 줬더니, 어디서 눈을, 그따구로 뜨고서! 어?”

어찌나 힘을 실어 따귀를 갈기는지, 사장이 말을 내뱉을 때마다 호흡마다 툭툭 부러질 정도였다.

“너랑 내가 같아? 같냐고!”

“씨발, 다를 건 뭔데요!”

“뭐? 씨이발? 이 새끼가 지금 나한테 욕을 해?”

입에 고인 것을 바닥에 툭 뱉었다. 침인 줄 알았더니 시뻘건 피였다. 한참 소리 지르던 도중에 얻어맞아서 다쳤나 보다. 그렇지만 그게 뭐. 입 안이 좀 찢어진 게 뭐. 세화는 볼거리라도 걸린 것처럼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선 악다구니를 썼다.

“아뇨, 다 못 했어요. 37억 8천? 그래, 갚을게요. 갚으면 되잖아. 그러니까 나 덕에 번 돈, 내가 원래 마땅히 가져갔어야 할 중개료에도 이자 붙여서 다시 계산해요.”

“이 새끼가 그래도…!”

이번엔 사장이 주먹을 내질렀다. 세화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칠 거면 치든가. 그렇게 두꺼운 금반지에 주렁주렁 매달린 굵은 보석을 똑바로 바라보고 서 있는데,

“사장님.”

불현듯 환청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드럽지만 힘 있는, 짙고 낮은 음성.

“무슨 일로 오셨어요?”

기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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