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21)화 (21/144)

#021

기분이 좋아진 김 소위는 지갑을 뒤적였다. 이세화에게 팁이나 좀 챙겨 줄 생각이었다.

이세화가 유명해진 건 정직해서였다. 남이 놔 주는 약을 찾는 놈들은 이 행위 자체를 도박처럼 즐기는 놈들이었다. 스릴도 있고 솔직히 뭘 맞아도 기분이 좋기는 하니까, 약을 놓는 놈들이 뭘 쓰는지 잘 모르면서도 소매부터 걷어 올리는 거였다.

이세화는 그런 점에서 안심할 수 있는 거래 상대였다. 무슨 약을 얼마나, 어떻게 쓸 건지 매번 보여 줬고 손님의 주문에 따라 새롭게 제조해 주기도 했다. 어찌나 잘 말아 주는지, 원하는 정도와 느낌을 칼같이 맞춰 주었다. 정신 차린 이후에 살펴봐도 사라진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가끔 지갑이 텅 비어 있긴 했지만, 그 정도야 애교로 넘어가 줄 수 있었다. 그래놓곤 자기 딴엔 대단한 범죄라도 저지른 것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배웅을 할 땐… 솔직히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심지어 그 돈으로 하우스 안에서 일하는 어린애들 밥이나 사 먹인다고 했다.

그래서 저거 영 맹탕 아닌가, 싶었는데 장사 수완은 또 나쁘지 않았다. 듣기로는 몸도 같이 내놓으라는 손님들은 살살 달래 하우스 소속 창부를 붙여 준다고 했다. 저는 제조에 집중하게 내버려 두고, 더 능숙한 애랑 떡 치는 게 이득 아니겠냐면서. 그리고 일이 성사되면 몸 파는 애들에겐 일정 금액을 수수료 명목으로 받아 간다고 했다.

돈에 미친 손 사장이 이세화를 선수로만 굴리는 이유가 있었다. 어린놈이 4원으로 적을 옮기는 데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또한 알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드리는 건데요, 손님 소개해 주신 친구분이요. 조금 전에 죽었어요.’

지갑을 뒤적여 돈을 꺼내려던 김 소위는, 이어진 이세화의 이야기에 놀라 입만 벙긋거렸다.

‘지금 드리려는 약의 제조법 내놓으라고 난리 피우다가요.’

‘…네가? 네가 사람을 죽였다고?’

‘정확히는 제가 아니라 제가 만든 약이겠죠?’

그걸 나한테 왜 말하는 거지? 나도 죽이겠다는 건가? 당황한 김 소위는 군부에서 배급한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여차하면 호출 버튼을 누를 생각이었다.

‘<원숭이 꽃신>은요, 오소리가 맨발로 잘 살던 원숭이에게 공짜로 꽃신을 선물해 줘서 길들인 다음, 이후로는 비싼 신발값을 받으면서 원숭이를 노예처럼 부려 먹는다는 내용이에요.’

‘그걸 나한테 왜 말하는 건데?’

‘여태 찾으셨던 물건은 다른 마약상 통해서 구하실 수 있어요. 제가 놓는 것보단 조금 심심하실 순 있어도요. 그런데 지금 드리는 약부터는 아니에요. 이건 저밖에 못 만들어요.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착하다 못해 멍청한 이세화는 나름대로 경고해 주는 거였다. 약에 미쳐서, 바보 같은 원숭이처럼 저에게 종속될 수 있다고.

‘난 또 뭐라고.’

긴장으로 크게 부풀었던 가슴이 푸시식 내려앉았다. 괜찮으니 빨리 쏘기나 하라며 팔을 걷어 올리자 이세화가 작게 웃었다.

‘하긴. 손님은 돈도 많으신 것 같아서 별로 걱정은 안 돼요.’

무늬 없는 티셔츠에 물 빠진 청바지를 입고서, 수줍게 웃는 그 어린 얼굴이 너무 예뻐서. 그래서 크리스마스를 앞둔 며칠, 김 소위는 결심했다. 이세화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겨선 안 되겠다고. 꼭 내가 데리고 살아야겠다고.

하지만 집안 어르신들이 4환의 하우스 출신을 인정해 줄 리 없었다. 김 소위가 생각하기에도 이세화는 배우자로 두기엔 부족한 점이 너무 많았다. 그러니 첩으로 들어앉히는 정도가 딱 좋을 것 같은데… 명분이 없었다. 이세화가 임신 가능한 남성체였더라면 애라도 갖게 해서 끼고 살았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하자, 한번 논의가 나왔다가 폐기된 안건이 떠올랐다. 보안 등급은 높았지만, 다들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했는지 방치되어 있던 바람에 쉽게 자료를 열람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문서에 나온 내용을 본가의 연구원들에게 몰래 확인시켜 나름의 확신을 얻었다.

이세화를 꼬여 내는 건 그보다 더 쉬웠다. 그 녀석도 저에게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닌지, 순순히 검문소까지 따라왔다. 무엇보다 돈보다는 1성의 주민증을 원했다. 돈이라면 부르는 대로 쳐줬을 텐데, 역시 마음이 있으니 그런 순진한 소리나 하는 게 분명했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5성 주민증도 아니고, 자신의 아이를 낳은 친부라고 확인시켜 주면 집안에서 1성까지는 무리 없이 올려 줄 거다.

그렇게 2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오선란 대장의 입김이 닿은 ‘추수’ 프로젝트는 생각보다 좋은 반응을 얻고 있었다. 물론 오선란 대장에게 들어간 돈이 만만치 않긴 했지만, 대장급 인사와 몇몇 기업을 포섭한 터라 집안에서도 만족하고 있었다. 이제 이세화의 몸만 준비를 마치면 된다. 주기적으로 약을 맛봤으니 슬슬 임신 가능한 몸으로 변하지 않았을까, 기대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하여튼 기태정 이 새끼는 도움이 안 돼.”

기태정이 또 수상쩍게 굴고 있었다. 군부에서 자랑하는 최신 무기이자 종마로써, 본인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길 바란다고 먼저 기태정을 살살 긁어 댔던 건 생각도 안 하고, 김 소위가 툴툴거렸다.

“박연중 소위가 직접적으로 일을 거론한 것은 처음이니 저희도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해외 언론을 자극하면 크게 문제가 될 수 있는 건 사실이라….”

“아, 그땐 꼬리 자르면 그만이라니까? 그러려고 하우스에 돈 처발라 둔 거고. 무엇보다 내가 어제 국토부 장관이랑 골프 좀 쳤거든? 그 인간이 뭐라고 한 줄 아냐?”

김 소위가 낄낄 웃으며 다 피운 궐련을 비벼 껐다.

“정말로 자기 자식이랑 기태정이랑 접붙일 수 있는 거면, 당장 입양이라도 해 오겠대. 외국이라고 뭐 다를 줄 아냐. 앞에서야 지랄하지, 뒤에선 그 약 얼마에 살 수 있냐고 돈 바리바리 싸 들고 찾아올걸.”

신체적 특질이 우월한 놈들을 미리 선별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고아 중에 괜찮은 놈을 골라 와서, 약을 먹여 임신 가능하게 만들고, 기태정 같은 종마에게서 씨를 받아 낸다. 그렇게 군부의 개를 재생산하는 거다.

“어떻게든 군에 자기 사람 들여놓고 싶은 인사들한텐 최고의 방법이잖아. 군부도 덕분에 돈 좀 만질 수 있을 거고.”

매번 잔소리나 하던 집안에서도 이 일로 저를 인정해 줄 거고, 무엇보다 덤으로 이세화도 따라오게 된다. 이익은 확실하고 손해 볼 요소는 적은데, 뛰어들지 않는 게 머저리였다.

프로젝트를 반대하는 놈들은 유전학의 위대함을 모르고서 하는 소리였다. 핏줄로 승계된 신체적 우월함을 증명하는 괴물이, 기태정이 버젓이 눈앞에 있지 않은가. 그래서 김 소위는 ‘추수’ 프로젝트에 대해 여기저기 흘리고 다녔고, 군부와 어떻게든 연을 트고 싶은 인사들이 박스 가득 지폐를 채운 채로 김 소위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태정 같은 새끼는,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해.”

저는 본체만체하던 유 대령이 기태정에게 넌지시 맞선 의사를 보였다는 걸 알았을 땐 속이 다 뒤집혔다. 혈통도 재산도 기태정에게 뒤질 것이 없는데, 그런 출신도 천한 고아 놈에게 구혼이라니. 어린 시절 내내 수용소에 갇혀서 훈련만 받은 정신병자를 식구로 들이겠다니. 얼굴 좀 반반한 거 빼고 기태정 그 새끼한테 뭐가 있다고…!

“2원에 있는 창고에서 물건 좀 꺼내 와. 거기 있는 건 거의 완제품이나 다름없으니까. 최근 입대한 놈들 중에서 집안 후지고 신체 능력은 우수한 놈들도 좀 포섭해 두고.”

“소위님, 그 말씀은….”

“기태정이도 더 늦기 전에 결혼시켜 줘야지. 아. 개들끼리 교미할 때도 결혼이란 말을 쓰던가?”

김 소위는 낄낄 웃으며 떨을 입에 물었다. 역시 대마로는 부족했다. 이세화가 필요하다. 프로젝트의 성사를 위해 그간 하우스 방문은 자제해 왔는데, 더는 기다리기 어려울 것 같았다.

“참. 하우스 손 사장한테 연락해서 그동안 이세화한테 수수료는 어떻게 받았냐고 슬쩍 운 떼 봐.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 이세화 조져 놓을 거야.”

최근 이세화의 굵직한 거래 상대는 김 소위뿐이었다. 돈 나올 구석도 김 소위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손 사장이 수수료 더 내놓으라고 횡포를 부리면 별수 없이 저에게 기대게 될 것이다. 그때 못 이기는 척 얘길 꺼내 볼 생각이었다. 배우자로 주민 등록부에 올릴 순 없지만, 아이를 낳아 주고 첩 된 도리로 저와 집안 어른들을 잘 모신다면, 남부럽지 않게 살게 해 주겠다고. 돈 걱정 없는 안정된 삶. 이세화가 그토록 바라던 평온 아니던가.

김 소위는 콧구멍을 씰룩이며 곧 다가올 행복한 미래를 상상했다. 예쁘장한 첩을 옆구리에 끼고서 종마 노릇을 하느라 수척해진 기태정의 곁을 스쳐 가며 비웃어 주는, 그런 통쾌한 상상이었다.

***

기태정이 자리를 비운 지 일주일 좀 넘었다. 아니지, 거의 이 주 가까이 되는 것 같았다. 세화는 여전히 그의 사무실 안을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다. 옷 역시 허락받지 못해 언제나 나신에 가운 차림이었다.

그가 시킨 대로 주사기에 약 넣는 연습이나 하고 있다가도, 갑자기 왈칵 불안이 밀려왔다. 이렇게 오래 일을 쉬어본 적이 없었다. 밥만 축내고 뭐 하는 거냐고, 다른 선수들이나 고참 실장들이 당장이라도 쳐들어올 것만 같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울에 잠길 때마다 기태정이 신기한 물건들을 보내 주었다. 어떻게 세화의 기분을 눈치챈 건지 참으로 귀신같은 타이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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