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20)화 (20/144)
  • #020

    “그, 누구냐. 붕어 똥처럼 기태정 옆에 붙어 다니던 새끼.”

    “박연중 소위 말씀이십니까?”

    “그래. 아까 국방부 갔다가 그 새끼 마주쳤잖아. 기태정이 관사에 처박혀 있는데 그게 혼자 나돌아다닌다고?”

    김 소위는 놈의 이름이 박연중이라는 것도 정확히 알고 있었고, 심지어 그와 마주쳤을 때 짧게나마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김 소위의 부관 또한 바로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다 알면서 그렇게 함부로 부르는 거였다. 존재감이 희미해 잘 모르겠다는 것처럼, 그러니 중요한 대접을 해줄 필요 없다는 듯이.

    ‘기태정은 어디다 팔아먹고 혼자 싸돌아다니냐?’

    ‘준장님께 휴식이 필요한 시기라는 거 몰라서 묻습니까?’

    ‘어쭈? 너 말본새가 왜 그러냐? 되게 짧다, 말이?’

    ‘제가 하고 싶은 말이군요. 나이가 거의 두 배라 존대는 해 드리고 있지만, 김 소위도 같은 계급끼린 예의 좀 차리는 게 어떨까요? 그 나이에 유치하게 굴면 사람이 되게 없어 보입니다.’

    ‘뭐? 김 소위? 너 지금 김 소위라고 했냐?’

    ‘네. 틀린 말입니까? 저는 박 소위고 김 소위는 김 소위죠.’

    ‘저게 진짜…!’

    ‘그래도 같은 소위니까 한 마디만 충고하겠습니다. 제발 계급장이 폼으로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명심하세요. 준장님 이름 함부로 불렀다가 징계 먹으면 집안 어른들께 뭐라고 변명하시려고요?’

    김 소위는 조금 전 국방부 건물에서 박 소위를 마주쳤을 때를 떠올리곤, 두둑한 심술보를 파르르 떨었다.

    김 소위는 육군이었고, 기태정과 그 떨거지는 공군이었다. 국지전이건 대규모 전쟁이건 하늘을 선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이긴 했다. 게다가 공군은 업무 중 육군의 역할도 일부 수행 가능해서, 중요도를 가늠하자면 단연 공군이 우위에 있었다. 과거에는 국방부 장관은 무조건 육사 출신이 도맡던 때도 있었다고 하던데, 그 시절이 어찌나 까마득한지 지난 영광이라 이름 붙여도 될지 머뭇거려질 정도였다. 어쨌든, 군 내부에서 흘러가는 파워 게임의 논리에 따르자면 김 소위는 나이와 상관없이 박 소위에게 말도 붙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김 소위는 기태정이나 박연중 같은 놈들에 비해 자신의 위치가 훨씬 높다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같은 계급장을 달았다고 해서 출신과 신분마저 같을 순 없는 거니까.

    물론 집안의 도움이 없었다면 김 소위는 사관 학교 입학조차 불가능했겠지만, 요즘 세상에 밀어줄 수 있는 빽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겠는가. 임관 이후로 김 소위가 세운 군공은 전무하긴 했지만… 그거야 육군으로 발령이 나서 그런 거였다. 저도 공군, 하다못해 해군으로만 갔어도 기태정만큼이나 날아다닐 자신이 있었다.

    “말이 되냐? 기태정은 그런 일이나 하라고 주워 온 새끼라고. 최신 무기 대신 자기 몸 바쳐서 죄다 초토화하는 거, 그거나 하라고 군대에서 지금껏 먹여 주고 재워 준 건데, 고작 코딱지만 한 공국 하나 날려 먹었다고 앓아누우면 안 되는 거지.”

    궐련처럼 돌돌 만 떨이 아직 입에 물려 있는데도, 김 소위는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원래 약을 빨 땐 마가 뜨면 안 되는 법이었다.

    “그렇지만 기태정 준장이 관사에 있다는 것은 사실 같습니다. GPS 보고도 성실히 하고 있고, 군의관이 안으로 몇 차례나 드나들었다는 기록 또한 확인했습니다.”

    “홀로그램이라도 확보하기 전까진 아무것도 확신하지 마. 기태정 그게 얼마나 골때리는 새낀데. 참, 그래서 박 소위는 국방부엔 왜 온 거래?”

    “표면적으로는 기태정 준장을 대신해 서류를 제출하러 방문했다고 보고했습니다만….”

    “다만?”

    “비서관을 감청해 보니, ‘추수’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나누고 갔다고 합니다. ‘정식’과 ‘항의’라는 말은 분명히 들었다고 하니, 기태정 준장의 칩거 또한 여론전을 대비한 움직임으로 보입니다.”

    “하, 씨바.”

    입맛 버렸다는 듯 가래침을 칵칵 뱉으며, 김 소위가 낡은 녹음기를 받아들었다. 구세대 유물이긴 해도, 최신 전파 장치를 내재한 요즘 물건보다는 새어 나갈 염려가 없어서 도청한 기록을 주고받기엔 딱 좋았다.

    “기태정 준장의 사람이 공식적으로 ‘추수’를 입에 올린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아무래도 4환의 하우스… 그러니까 약이 거의 완성되었다는 걸 눈치챈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제야 알아챈 그 새끼들이 븅신이지. 다른 놈들은 벌써 한 번씩 간 보고 갔는데 말이야.”

    기태정은 결국 나한테 안 돼. 퉁퉁한 배를 두들기며, 김 소위는 새로 만 대마를 입에 물었다. 평소에 손대던 것과 비교하면 담배 수준으로 효과는 미미했지만, 그래도 쫄쫄 굶는 것보다야 뭐라도 빨고 있는 게 나았다.

    “크하…. 아무리 생각해도 군인들한텐 마약 좀 허용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 나라 위해 분골쇄신하는 사람들한테 이 정도 재미도 없으면 어떻게 큰일을 하겠냐고.”

    군대 내엔 없는 약이 없다. 첩보 업무 수행 중 독이나 약물에 중독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치료제부터, 최상의 컨디션으로 끌어올려 주는 좋은 보조제까지 전부 구비되어 있었다. 물론 아무에게나 아무 때고 반출되는 것은 아니었으나, 김 소위는 본인이 ‘아무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군부가 자랑하는 최신 의학 설비 중 못해도 십 분의 일은 자신의 집안이 갈고 닦아 준 것이었다. 세상에 이유 없는 돈은 없고, 투자를 했으면 마땅히 돌아오는 것이 있어야 한다. 집안의 기부금으로 다져진 기반이 없었더라면, 과연 기태정 같은 놈들이 혁혁한 공을 세울 수 있었을까? 그러니 연줄과 돈을 발라 겨우 계급장을 단 김 소위는 본인이 조금 더 특권을 누려도 된다고 생각했다. 평등한 자본주의 사회 아닌가. 돈을 쓴 사람이 그만큼 대접받는 건 당연한 이치다.

    “어? 그래, 안 그래.”

    “예, 그렇습니다.”

    금단 증상에 시달리는 김 소위는 포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렇다고 약에 취해 있을 때 상태가 좋으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큰소리치는 걸 좋아하지만 사실 자존감도 낮고, 무엇보다 기태정에 대한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 있어서, 김 소위는 약을 들이켤 때마다 자신의 콤플렉스를 감추려 더더욱 난폭하게 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몇 번 약을 빨고 나면 순식간에 곯아떨어진다는 것 정도였다. 그러니 그때까지만 버티면서 맞장구나 잘 쳐주면 된다. 그간 몇 번 피를 본 후 깨달음을 얻은 김 소위의 부관은 부처 같은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염병할. 이거 가지곤 간에 기별도 안 가네.”

    한 번 빨고 나니 이미 알고 있는 다른 맛만 더 간절해졌다. 좀 더 센 거. 좀 더 환상적인 거….

    “이세화 그게 약은 기깔나게 만드는데….”

    이세화를 소개해 준 건 지금은 죽고 없는 같은 부대원이었다.

    군인을 비롯한 몇몇 상류 계급에겐 포트를 이용할 권한이 주어졌다. 자기 부상 기술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포트에 몸을 실으면, 5분도 채 되지 않아 다른 구역에 도착할 수 있다. 평민들이 신분증이며 증명서며 이것저것 제출하고 검문받느라 개고생하는 동안, 앞마당으로 마실 나가듯 구역을 넘나들 수 있는 것이다. 김 소위처럼 취미가 구린 사람들에겐 포트 이용권이 축복이나 다름없었다.

    원초적인 쾌락을 느낄 수 있는 건 1원이나 2원의 환락가가 최고였지만, 그래도 소위까지 달고나니 4원 밑으로 내려가는 건 조금 망설여졌다. 김 소위는 부대 내 누구에게도 쉽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지만, 집안 어른들의 눈치는 보았다. 그래서 약 냄새를 솔솔 풍기는 부대원 하나를 쿡 찔러 4원에서 물건 받기 괜찮다는 곳을 소개받았다. 도박, 매춘, 약… 취급 안 하는 게 없다던 불법 하우스였다. 거기서 알음알음 찾는 손님이 많다던 유통책이 이세화였다.

    어찌나 낯짝이 반반한지, 처음 이세화를 봤을 땐 김 소위조차 잠시 넋을 놓았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깐이었을 뿐,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저 얼굴을 하고서도 생긴 게 어쩌고 하는 풍문보다 마약 거래는 4환의 삼월이가 확실하다는 얘기부터 튀어나오는 놈 아닌가. 함부로 건드렸다간 큰코다칠 것 같았다.

    그리고 반평생을 약쟁이 소굴에서 굴렀던 김 소위의 판단은 정확했다. 이세화는 무서운 놈이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그런 무서움과는 다르긴 한데… 어쨌든 사람 혼을 빼놓는 놈인 건 맞았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은 크리스마스 선물이 <원숭이 꽃신(故 정휘창 작가의 원숭이 꽃신, 효리원 출판)>이라는 동화책이었어요. 어떤 손님이 아이에게 줄 선물이라고 하셨는데, 놓고 가시는 바람에 제 차지가 됐거든요. 원래 제 몫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너무 좋아서 책이 다 닳도록 읽었던 기억이 있어요.’

    LSD에 색다른 걸 섞어 준다기에 들떠서 기다리고 있는데, 이세화가 뜬금없는 이야길 시작했다. 모난 구석은 없었어도 먼저 나서서 입안의 혀처럼 구는 일은 없었던 놈이라, 내심 녀석이 저를 단골로 인정했구나 싶어서 뿌듯해지는 순간이었다. 하긴. 며칠 후면 크리스마스였고, 오늘따라 밖에선 눈이 내리고 있었다. 분위기를 조성하기 나쁘지 않은 때였다. 좀 말랑말랑하고 간질간질한 그런 거 말이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