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19)화 (19/144)
  • #019

    “음… 여기서 더 빠르게 하려면 주사 크기가 조금 더 작아야 할 것 같아요.”

    “얼마나?”

    “이 정도?”

    세화가 손가락으로 대략적인 크기를 보여 주자, 기태정은 말없이 턱을 쓸었다.

    “만약 그 정도로 크기가 작아지면 어느 정도로 빨라질 수 있지? 지금보다 더?”

    “글쎄요. 얼마나 빠른 속도를 바라시는 건지 모르겠어서… 그렇지만 암살은 저보다 전문적인 사람을 고용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또 헛소리하고 있다.”

    기태정은 테이블 위의 빈 주사기를 손바닥 위에서 이리저리 굴려 보았다.

    “약은 어디에서 가져왔을 것 같아?”

    “3원에 있는 하우스에서 압수한 물건 같던데요. 멕시코산이고, 순도가 나쁘지 않고…. 그런 물건을 이만큼 확보할 수 있는 곳은 우리 하우스랑 3원에 있는 곳, 이렇게 두 군데 정도예요.”

    그리고 3원의 하우스는 어쩌다 윗분들 눈 밖에 나는 바람에 보유하고 있던 물량을 모조리 털려 버렸다. 도박장은 여전히 운영 중이라고 했지만, 다른 곳보다 싼 값에 좋은 품질의 마약을 구비하고 있다는 게 큰 장점이었던 터라 예전 같은 명성을 누릴 일은 요원하다고 봐야 했다. 제보자야 뻔했다. 손님 나눠 가지기 싫은 사장이 뒷돈 먹여 가며 신고했을 거다.

    “3원 하우스 말고 다른 루트는 아예 없어?”

    “네.”

    너무 건방지게 말했나 싶어서, 세화는 ‘제 뒤로 큰손 있다는 소문 돌아서, 약 대는 애들이 제 말은 잘 들어요.’ 하고 덧붙였다. 다행히도 기태정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다른 생각 중인지 음, 하며 연신 입에 문 시가만 빨아들일 뿐이었다.

    “멕시코산인 건 어떻게 알았어? 그것도 맛으로 구별이 되나?”

    “그렇긴 한데… 맛만으로 제조국을 확정하진 않아요. 그럴 일은 거의 없다지만 국내로 들어올 때 장난질 치는 놈들도 간혹 있어서요. 그래서 표식을 남겨 놔요. 여기….”

    세화는 주사기의 캡을 내밀었다.

    “끄트머리에 좀 특이한 흠집 같은 게 있는데, 이게 음… 쉽게 비유하자면 점자 같은 거예요.”

    “아는 사람만 읽을 수 있는 코드라는 거군.”

    “네.”

    기태정이 밀봉된 봉지 하나를 끌어다 이곳저곳 쓸어 보았다. 뜬금없는 곳에, 아주 작게 새겨진 흔적을 찾아낸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야.”

    “네?”

    “며칠 후에 나랑 출장 좀 가자.”

    “…어, 전, 말씀드렸지만 아무래도 암살은….”

    “너 진짜 맞을래?”

    그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쳐서, 세화는 꾸물꾸물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물론 아니라는 거 알고 있지만. 신기한 재주라도 보는 것처럼 몇 번이나 보여 달라고 하니까… 누구라도 그런 오해를 하지 않겠는가. 저도 조금쯤은 이 남자에게 쓸모가 있을 수도 있겠다고….

    “네 말대로 그런 어이없고 조잡한 수까지 써 가면서 사람 죽이는 건 비효율적이잖아.”

    하긴. 대상자가 죽는 줄도 모르게 빠르게 죽일 수도 있고, 괴롭게 하려는 목적이라면 세화의 방법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잔인해질 수 있는 남자였다. 킬러를 고용하느니 본인이 나서는 게 훨씬 효율적이긴 하겠다.

    “그래도 연습은 하고 있어. 주사기 종류는 다양하게 가져다줄 테니까.”

    뭐, 늘 그렇듯 거절할 권한이 없는 세화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앞으로 그럴 일은 없겠지만….”

    홀더 위로 시가를 내던지는 동작이 거칠었다. 바르게 꽂히지 못하고 청승맞게 버려진 담뱃대에서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꼭 향처럼.

    “또 그렇게 헤프게 굴면 너부터 죽일 거야. 알겠어?”

    “제가 헤프게 굴었다고요?”

    “가슴 내밀면서 목에 감은 거 만져 달라고 하는 게 그럼 헤픈 게 아니야?”

    “네? 그건….”

    “네 입으로 말했어. 질질 짜면서, 걸레도 창놈도 아니라고.”

    무슨 뜻에서 그렇게 말하는 건지 묻고 싶었다. 고작 주사기에 약을 옮겨 담는 기술도 어떻게든 써먹으려고 빠른 속도로 연습하라고 하면서. 가장 쉽게 사람을 방심시킬 수 있는 처세술에는 역정을 내는 건… 좀 모순적이지 않나. 기태정은 세화의 순결 문제에, 세화 본인보다도 민감하게 구는 것 같았다.

    “이사님.”

    대답 대신 기태정의 손에서 굴려지던 주사기가 단박에 날아왔다. 화살처럼 바람을 가르며 날아온 물건은 세화의 몸통을 비껴서 소파 등받이에 꽂혔다. 주삿바늘이 달려 있던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대답 안 하지?”

    “안 해요…. 아니, 대답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고요. 그렇게… 그러니까 헤프게 안 할게요. 그런데 왜….”

    “말했지, 너한테 다른 남자 좆 물 묻으면 곤란하다고.”

    그런 말도 했었던가. 세화는 드문드문 기억이 끊긴 조금 전의 섹스를 회상해 보았다. 다른 놈들 말고 너하고 자고 싶은 이유는 있다고 했던 것 같다. 정작 그 이유가 뭔진 듣지 못했지만….

    “그럼 엎드려.”

    기태정은 여전히 망해 버린 하우스의 멕시코산 마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화는 불현듯 따져 묻고 싶어졌다. 나하고만 섹스하고 싶다는 거. 다른 남자가 내 몸 쳐다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 그게 상대방에게 어떻게 들릴지 알고서 하는 말이냐고.

    “거기, 아냐. 이리 와.”

    세화는 테이블을 돌아 기태정의 앞에 섰다. 어쩐지 가슴 안쪽이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어떤 방향인 줄도 모르면서 그가 드러내는 소유욕이,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아까 하다가 만 거, 마저 해야지.”

    기태정은 허튼 생각 하지 말라는 듯, 멋지게 세화의 환상을 박살 냈다.

    몸을 슬쩍 틀고 있었던 터라 테이블 위에 늘어진 환락이 전부 다 보였다. 널브러진 주사기와 주삿바늘, 배를 가른 채 쏟아진 마약과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시가까지. 그리고 기태정은 저걸 하나하나 치우고서 세화를 눕혀 줄 위인이 아니었다. 어차피 패치도 떼어 버렸겠다, 높은 확률로 마약이 담긴 푹신푹신한 비닐 위로 세화의 얼굴을 처박고, 구멍을 벌릴 것이다.

    그건 싫었다. 아까도 젖꼭지며 목은 실컷 깨물었지만, 키스는 절대 해 주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세화의 몸에 덕지덕지 마약이 묻는다면, 이번엔 그마저도 해 주지 않은 채 철저히 넣고 싸는 용도로, 그야말로 구멍으로만 사용할 게 뻔했다.

    “이제 보니까 자기가 버릇이 나쁘구나. 설설 기다가도 살 만해지니까 바로 고개 빳빳하게 들고.”

    “그런 게 아니라….”

    기태정이 붙잡은 손목에 힘을 주었다. 조금 전에도 그의 수하가 세게 뒤틀어 놓았던 바로 그 손목이었다.

    “어떻게 해야 말을 잘 들을까. 좆 대신에 호스 꽂아 줘? 배 터질 때까지 구멍 안으로 물 부어 주면 안 대들래?”

    “아니에요. 할게요, 다 할게요. 그냥 이사님, 저는….”

    역시나 세화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테이블 위로 처박으려던 기태정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여기 말고 안으로 들어가서 하면 안 될까요?”

    물기 섞인 음성이 흘러나오자, 기태정이 눈동자만 굴려 세화를 내려다보았다. 혐오도 짜증도 느껴지지 않는, 그냥 검은 시선이었다.

    “안에서, 이사님….”

    “여기서 조금 대 주고 말 걸 후회할 수도 있을 텐데.”

    “그래도 여긴 사무실 한복판이니까 누가 올지도 모르고… 테이블 위도 지저분하고….”

    마지막 말로 세화의 염려를 읽어 낸 기태정이 아랫입술을 감쳐물었다. 웃음을 참듯, 눈을 굴려 잠시 천장을 보던 그가 도로 세화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세게 당기는 바람에 가운이 흘러내려, 잇자국이 새겨진 어깨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어쩌지? 후회할 수도 있을 텐데, 가 아니라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고 싶어졌어. 그래도 좋아?”

    침을 삼키느라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당장이라도 목젖을 찢을 것 같은 시선을 받아 내며, 세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버려진 패치와 찢어진 지폐가 맨발에 밟혔다. 끌려가는 동안 여기저기 몸이 쿵쿵 부딪혀서, 물침대가 덜렁 놓인 방으로 들어섰을 땐 가운이 거의 벗겨진 채였다.

    가까이 다가온 기태정이 세화의 뺨을 움켜쥐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시선을 맞댄 채로 서 있었다. 의중을 알 수 없는 눈길에 델 것만 같았다.

    “…이사님.”

    키스하려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슬쩍 눈을 감으려고 했더니, 그가 어림도 없다는 듯 픽 비웃었다.

    “이제 보니 건방지기만 한 게 아니라 멍청하기까지 하잖아, 우리 자기는.”

    그리고 과연 기태정이 경고했던 대로, 세화는 차라리 약에 파묻힌 채 뒤를 내줄 걸 그랬다고, 밤이 새도록 흐느껴야 했다.

    ***

    신나게 떨을 말던 김 소위의 투실투실한 손이 멈칫했다.

    “기태정이 잠적했다고?”

    “예. 관사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최근 여기저기 불려 다닐 일이 많아서 간신히 입에 대 보는 대마였다. 소중한 시간을 방해받은 것도 모자라 신경을 거스르게 하는 인물의 이름을 듣게 된 김 소위의 심술보가 메기수염처럼 축 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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