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8
“일어나요.”
남자는 별꼴을 다 보겠다는 듯 다시 몸을 일으켰다. 세화도 일어서서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마약이 담긴 비닐을 찢었던 그 칼을 다시 쥐고서, 남자가 패치 틈새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그래도 이전에 기태정이 몇 번이고 목줄처럼 잡아당기고, 물에도 계속 접촉했던 탓인지 쉽게 공간이 벌어졌다. 서걱, 소리와 함께 패치가 팔랑팔랑 바닥으로 떨어졌다.
남자는 칼을 댄 건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고 기태정에게 어필하듯 제법 큰 동작으로 물러섰다. 세화는 몸이 흔들리느라 슬쩍 벌어진 가운의 앞섶을 단정하게 여몄다. 남자의 시선 또한 불가항력으로 졸졸 따라왔으나, 욕정의 의미는 없어 보였다. 세화가 가운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는 걸 새삼스레 깨닫고 신기해서 쳐다보는 수준이었다. 저 몸이 뭐 얼마나 대단하길래 자기 상관과 일을 치렀나 궁금해하는, 딱 그 정도.
이후의 작업이야 눈 감고도 할 수 있었다. 유리판의 수평을 맞추고, 검지에 거즈를 씌우고서 비닐 안에 푹 담갔다. 준비된 것은 다섯 가지였다. 세화는 거즈를 입에 물고 맛을 확인한 다음, 새 거즈로 교체해 유리판 위로 가루를 퍼냈다. 세화는 이 중 두 가지만 쓰기로 했다. 적당량을 배합해 주사기 안으로 밀어 넣고, 안에 식염수를 부었다. 손가락으로 실린더를 툭툭 튕겨 눈대중으로 농도를 확인하고, 남자에게로 손을 뻗었다.
“소매 걷어 주세요.”
남자는 순순히 팔을 걷어 주었다. 세화는 주사 놓을 곳을 찾는 척 팔뚝을 매만져 보았다. 군인이라 그런지 상당히 근육질이었다. 혈관은 찾기 쉬웠지만 대신 잘못 찔러 넣으면 바늘이 도로 튕겨 나올지도 모르겠다. 원래 이런 상대는 작은 주사기로 처음부터 목을 노리는 게 빠른데.
“그게 단가?”
뒤에서 지켜보던 기태정이 드디어 침묵을 깨고 말을 걸어왔다.
“아뇨, 아직….”
“네 몸뚱이 보여 줄 듯 말 듯 애태운 게 전부인 것 같은데.”
“아직, 주사 안 놨는데….”
“나에게 했던 얘기와는 다르잖아? 기습해서 사람 죽였다며.”
“네? 다 죽이지는… 그리고 기습이라고 할 수준도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
“그 꼴을 하고 앞에서 살랑거리는데 약에 미친 놈들이 퍽도 가만히 있었겠다. 들어가.”
기태정이 혀를 짧게 차자, 남자가 옷매무시를 가다듬으며 발을 뗐다.
“잠깐만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지 그걸 못 참아서…. 세화는 또 속으로만 꿍얼거렸다. 원래도 진짜 하고 싶은 말은 꼭꼭 숨기는 편이었는데, 기태정의 앞에선 어째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이거 도로 가져가셔야죠.”
주머니 안에서 돈을 꺼내 보이자,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
“약 안 하셨잖아요.”
“됐습니다.”
“그래요? 뭐, 돈이야… 출장비라고 치더라도.”
엄지로 지폐를 쓱쓱 밀어 내고, 그 안에 숨겨둔 카드를 내보였다. 자리로 돌아가려던 남자의 눈이 커졌다.
“이건 안 가져가세요? 뭔진 몰라도.”
다급히 지갑을 꺼내 안을 뒤적이는 남자의 손길이 요란했다. 세화에게 조롱을 퍼붓던 기태정의 눈매가 가느다랗게 좁혀 들었다.
“애초부터 대단한 기술 같은 건 없다고 했잖아요.”
세화는 조금 머쓱해져서 볼을 긁적였다. 그러면서도 조금 안심했다. 긍정적인 방향 같지는 않았지만 기태정이 도로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아서.
그가 저에게 어떻게든 계속 흥미를 느꼈으면 했다. 주인님의 관심을 잃은 장난감의 최후는 폐기 처분뿐이다. 세화가 가장 피하고 싶은 미래였다. 그러니 기태정이 계속해서 자신을 흥미롭게 여겨 주었으면 했다. 그 방향이 섹스가 아니라면 더더욱 좋을 것 같고.
“돌려주시죠.”
기태정이 없었으면 쌍욕이라도 퍼부었을 것 같은 살벌한 목소리였다.
“싫은데요.”
“뭐?”
“이거 되찾고 싶으면 다음엔 돈 좀 싸 들고 오세요, 손님. 여기선 카드 못 쓰는 거 알면서 고작 7만 원이 뭐예요, 7만 원이.”
세화의 얄미운 음성에 남자가 솥뚜껑만 한 손을 휘둘렀다. 기태정의 허락을 받지도 않고 멋대로 행동하는 걸 보면, 한낱 4원의 하층민에게 카드를 털리면서도 알아채지 못했다는 게 더 큰 불명예로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자꾸 이러시면 다찌 부를, 아!”
돈을 쥐고 있던 손목이 단박에 붙들렸다. 어차피 뒤에 소파가 가로막고 있어서 도망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긴 했다. 세화의 몸이 앞으로 쑥 당겨졌다. 테이블에 세게 박힌 무릎 아래가 욱신거렸다.
“내놓으라고 했지.”
“돈 가지고 오시라니까요?”
“내놓으라니까?”
손목이 부러질 것 같았다. 시큰시큰한 아픔에 이를 악물며, 세화가 반대편 손을 들었다. 카드를 감싸고 있는 지폐를 찢다시피 밀어 내고, 찾던 카드를 꺼내려던 남자가 훅 끼쳐 오는 그림자를 느끼고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게…!”
순식간에 코앞까지 다가온 세화의 손에 들린 주사기를 발견하곤, 남자의 눈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경악보다는, 겨우 저거한테? 딱 그런 정도의 아연함이 깃들어 있었다.
“자꾸 그러시면 다찌 부를 거라고 했잖아요.”
침선을 조준하고 주삿바늘을 눕히는 건 순식간이었다. 엄지로 레스트를 쭉 미는 순간, 남자가 세화의 손을 세게 뿌리쳤다. 주입하다 만 약물과 핏방울, 찢어진 지폐가 공중 위에 흩뿌려졌다. 제 쓸모를 다하지 못한 주사기가 처연하게 바닥을 굴렀다. 데굴데굴. 사람 약이라도 올리듯 경박한 소리를 내던 물건은 기태정의 발치에서 죽은 듯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런 식인데요….”
촌극 뒤에 고인 끔찍한 침묵을 견디지 못한 세화가 우물쭈물 말을 꺼냈다. 기태정은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생각에 잠긴 그가 주사기를 툭툭 걷어차자, 뒤에 선 사람들이 눈치껏 자리를 떴다. 세화는 눈대중으로 저를 상대해 줬던 남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힘이 좀 없어 보이긴 했지만, 뭘 제대로 주입하지도 않았으니 큰 문제는 없을 거다.
“김 소위 끄나풀이야.”
기태정이 맞은편 소파에 털썩 앉았다. 입에 도로 문 시가 때문일까, 작게 속삭이는 음성이 안개처럼 뿌옇게 흩어졌다.
“어차피 처리할 생각이었던 놈이니까 신경 쓸 거 없다고.”
“그럼 이전에… 그 사람들도 간자, 어, 그러니까 끄나풀이었어요?”
“그 사람들?”
“그… 눈이든 혀든… 어떻게든 하라고 했던 사람들이요.”
“글쎄. 자기 편한 대로 생각해.”
무신경한 대꾸에서, 세화는 어쩐지 답을 읽게 되었다. 저를 씻기던 남자들은 간자도 아닌데 아무 이유 없이 횡액을 당한 모양이었다.
“자기가 지금 그 새끼들 신경 쓸 처지는 아닌 것 같은데.”
기태정은 반쯤 타들어 간 시가의 풋을 살피고 있었다. 살짝 기울인 턱, 내리깐 속눈썹, 이마에서 콧대까지 떨어지는 우울한 음영…. 어쩐지 먼 옛날의 잊혀진 왕조를 연상시키는 태였다. 귀족적인, 우아한 그러나 몰락해 버린, 그래서 영영 손에 넣을 수 없는.
“만약 빼돌릴 물건이 없으면 어떻게 했어? 협박할 게 없으면.”
“그럼 일부러 더 센 거 놔 줬어요. 생각나서 찾아오라고.”
“손님 몰래?”
“네, 몰래.”
물론 그 과정에서 키스 정도야 가끔 있는 해프닝이긴 했지만, 그걸 기태정한테 순순히 터놓을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았다.
“찾아와도 그 약 물량을 맞춰 줄 수 있네 없네, 하면서 결국 손님이 먼저 애걸하게 했을 것 같고.”
“…맞아요.”
“와. 무서운 사람이었네, 자기.”
세화는 매듭 끄트머리만 계속 만지작거렸다. 기태정이 흥미를 보이는 것 같긴 한데… 그 방향이 긍정적인 건지 부정적인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다시 해 봐.”
고개를 들자 기태정이 짧게 턱짓했다.
“아까 그거.”
기태정이 벌리고 있는 양 무릎 위로 팔꿈치를 괴고는, 상체를 낮췄다. 손깍지를 끼고서 더없이 진중하게 테이블 위에 놓인 물건을 훑어보면서.
“약 넣고, 주사기 좀 치워 두고 있다가 꺼내는 거. 다시 해 보라고.”
저에게 떨어질 평가 혹은 체벌을 기다리던 세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땀이 고인 손바닥을 바닥에 문질렀다. 거즈로 가루를 퍼내고, 주사기에 채우고… 등 뒤로, 가운 주머니 안으로 혹은 손안으로 감췄다가 꺼내고….
“다시.”
맨날 하던 일이니 어렵지야 않았지만, 기태정이 이 과정을 되풀이하라고 하는 연유는 알 수 없었다.
“속도 좀 더 낼 수 없어?”
그나마 다행인 건 몇 번이고 거듭하다 보니 긴장이 완전히 풀려서, 혼자서 작업할 때와 어느 정도 비슷한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시간을 가늠해 보던 기태정이 또 같은 명령을 내렸다.
“다시. 더 빠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