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17)화 (17/144)
  • #017

    기태정은 하, 하고 짧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 짓?”

    “네? 네…. 약 만들고 주사 놓고 그런 거요. 생각하시는 것처럼 대단한 건 아니지만….”

    이세화가 말끝을 흐렸다. 생존을 위해 터득한 조잡한 수에 불과하다고, 절대 그럴싸한 책략 같은 게 아니라고 몇 번이나 강조하면서.

    “그래? 그럼 해 봐. 한번.”

    심술궂은 명령이 튀어나온 건, 이세화가 일부러 이러는 건지 궁금해서였다. 굳이 ‘그 짓’이라는 단얼 골라서, 눈을 저렇게 뜨는 게 의도치 않은 습관이라면… 그렇다면 확실히 고쳐 줄 필요가 있다. 박 소위 말마따나 이후로 다른 남자 정액이나 묻혀 오면 곤란해질 테니까.

    “이사님한테요? 약… 하셨어요?”

    “아니. 일단 씻고 나와.”

    그래도 정액은 빼내지 말고 끝까지 안에 잘 담고 있으라며 엉덩이를 토닥거리자, 하얀 몸에 꽃물이라도 들인 듯 붉은 기가 번져 나갔다. 발바닥까지 분홍빛이었다. 만지면 젤리 같고 푸딩 같기만 한데… 이런 몸을 하고서 사람을 찌르고 죽였다고?

    “흠. 생각해 보니까 내 얼굴 위에 앉아서 싸기로 한 건 못 했네?”

    “하, 하지만…!”

    할 건 다 하지 않았느냐며 벌떡 일어난 이세화는 뒤에서 줄줄 흐르기 시작한 정액의 촉감에 놀랐는지,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 버렸다.

    “이따가 확인할 거니까 구멍 잘 조이고 있어. 맞기 싫다며.”

    엄한 목소리에 다급히 엉덩이로 손을 가져다 대는 멍청한 꼴이 제법 귀여웠다.

    ***

    소매를 들어 킁킁 냄새를 맡아 보니 새 가운인 것 같았다. 시키는 대로 씻고 나왔지만, 옷은 여전히 허락받지 못한 신세였다. 도망이라도 칠 것 같아서 그러나? 그런 생각 해 본 적도 없는데. 빚 갚기 싫다고 여기서 튀었던 놈들의 최후가 어땠는지 기태정이 봤어야 했다. 그럼 다른 걸 몰라도 세화가 밖으로 달아날 걱정은 안 했을 테니까.

    세화는 별수 없이 알몸 위에 가운만 걸치고서 방 밖으로 걸어 나왔다. 슬리퍼도 주지 않아 맨발이었다. 기태정은 물론이고 뒤에 선 몇몇 남자들도 정갈하게 슈트를 갖춰 입고 있는데, 세화만 홀로 헐벗은 차림이었다.

    “자기야. 섹스할 때 얌전 빼는 게 싫은 거지, 평소에도 헤픈 꼴로 있는 걸 좋아하진 않아.”

    물끄러미 세화를 바라보던 기태정이 핀잔을 줬다.

    그럼 옷을 주면 됐잖아. 세화는 속으로만 꿍얼거리며 허리끈을 단단히 동여맸다. 기태정은 시가를 입에 문 채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시가와 일반 담배가 불을 붙이는 방법부터 다르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토치 대신 전용 성냥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대개 변태라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지금 보니 그게 꼭 편견은 아닌 것도 같았다.

    “어차피 치료제 먹일 거니까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너 하던 대로 해.”

    “네. 그런데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정말 하찮은 방법이라고 한차례 더 강조하려고 했는데, 기태정이 무료한 낯으로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한 번만 더 변명하면 손에 쥔 담배로 제 입을 지져 버릴 것 같았다. 세화는 소심하게 입술을 말며 쭈뼛쭈뼛 소파에 앉았다.

    “그런데 김 소위도 알고 있어? 네가 어떤 식으로 손님 관리했는지?”

    “네. 그 사람은 진짜 손님이었으니까요. 사실 처음엔 소위인 줄도 몰랐어요. 팔자 좋은 한량인 줄 알았지….”

    기태정이 피식 웃으며 까딱 턱짓하자 꼿꼿하게 서 있던 남자 중 하나가 총알처럼 튀어나왔다. 세화는 슬쩍 눈을 굴려 남자를, 아니 뒤에 선 사람들 전부를 확인했다. 박 소위는 없었고… 첫날 저에게 물을 뿌렸던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눈에든 혀에든 몹쓸 짓을 해 버린 걸까? 말 도는 것 막겠다고?

    혀가 어떻게 된 건 겉으로 보이지도 않는데 괜히 살펴보다 다시 고개를 돌리니, 기태정이 무표정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세화는 하마터면 놀라서 혀를 깨물 뻔했다. 아까는 먼 데 보면서 시가나 피우는 줄 알았더니, 처음부터 세화만 주시하고 있었다는 듯 곧은 눈길이었다. 어색하게 웃어 보이자 그는 별 희한한 꼴 다 보겠다는 듯 한쪽 눈썹만 삐죽 치켜떴다. 그러곤 이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잘 조이고 있어?’ 하며 입만 벙긋거리며 물었다. 미친놈.

    기태정의 말에 따르자면 아주 많이 봐준 거라던 그 섹스는 세화에게 깊은 흔적을 남겼다. 선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무도한 음담이나 몽둥이 같은 좆도 충분히 세화를 아프게 했지만, 가장 마음을 할퀴고 간 건 기태정이 본인도 모르게 중얼거렸던 결혼 이야기였다.

    처음으로 계산 없는 기태정의 속내를 들여다본 기분이었다. 귀찮은 소리 듣기 싫고, 높으신 분들의 속이 뒤집히는 게 보고 싶다고 했던가. 그 말을 들으니 기태정에게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확 와닿았다. 편리하게 이용하고 버릴 수 있는 하층민. 저를 그런 취급하는 사람 아래서 다릴 벌리고 줄줄 물을 흘리고 있자니 부끄럽고 비참했다. 심지어 세화 본인이 부린 잔꾀에 멍청하게 넘어가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래도 좋게 생각해 보자면 수확이 영 없는 건 아니었다. 기태정에게도 거스를 수 없는 윗사람들이 있다. 성격대로라면 국가 원수라도 쌩깔 사람이 짜증을 내면서도 여태 어쩌지 못하고 있다는 걸 보면, 높은 계급장을 대가로 충성이라도 약속한 게 아닐까 싶었다.

    위에서 내린 지시든, 위에 잘 보이고 싶어서든 기태정은 반드시 김 소위를 잡아들여야 하는 상황인 게 분명했고… 그렇다면 제 도움이 꼭 필요할 터였다. 그거면 됐다. 제안 운운해 놓고서도 기어이 저와의 섹스를 강행한 인사였다. 이제 믿을 수 있는 건 기태정의 혓바닥이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뿐이다.

    “자기야.”

    챱챱 소리 나게 볼을 두드리며 기운을 내 보려는데, 기태정이 따분하다는 듯 세화를 불렀다. 정신 팔지 말고 시킨 거나 처하라는 경고였다.

    “이제 할게요. 그런데 이분은 이미 다 알고 계시잖아요. 제가 무슨 짓을 할 거라는 걸.”

    “네 손님도 대충은 알고 있었을 거 아냐. 뒈질 건 몰랐어도.”

    “다 죽이진 않았어요….”

    “귀엽게 굴라고 했지, 건방 떨라고 한 적은 없는데.”

    세화는 얌전히 눈을 내리깔았다. 여기 앉으세요, 하며 맞은편 자리로 권하자 남자가 뻣뻣하게 걸어와 착석했다. 무릎 위로 주먹 쥔 손을 딱 올리고서 허리도 꼿꼿하게 편 채였다. 군인이 아니라는 걸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각이 잡혀 있었다. 아마 등 뒤에 선 무서운 상관의 영향도 크겠지만.

    “지갑 좀 보여 주실 수 있어요?”

    뜬금없는 세화의 요구에 남자가 기태정을 돌아보았다. 그는 아무런 말 없이 연기만 내뿜었다. 허락이었다.

    “선불입니다.”

    세화는 지갑 안에서 현금을 모조리 꺼냈다. 그러면서 수상하게 반짝이는 물건 하나도 슬쩍했다. 카드인지 신분증인진 모르겠지만 여기까지 들고 올 정도면 중요한 건 맞겠지. 세화는 돈이 얼마나 되는지 헤아리는 척하며 가운 주머니 안으로 돈과 카드를 쑤셔 넣었다.

    “원래 이 돈으로는 제조까진 안 해 드리거든요? 주사기 비용도 따로 떼야 하는데… 처음이니까 오늘은 그냥 해 드릴게요. 나중에 또 찾아 주세요.”

    굳이 이런 멘트까지 칠 필요는 없었지만, 기태정이 재밌어할 것 같아서 주절주절 떠들어 봤다. 세화는 시작 전에 손을 탁탁 털었다. 숨기고 있는 게 없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약보다는 수면제랑 비슷한 수준으로 가 볼게요.”

    남자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올 생각도 안 해 봤을 성 밖의 하우스에 끌려와, 졸지에 실험 대상이 된 게 불만스러울 법도 했다. 뭐, 세화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어차피 저를 가볍게 여기고 업신여길수록 꼼수를 부리기 쉬웠…, 아….

    “…아, 죄송해요. 계산 좀 하느라. 계속할게요.”

    속으로 부산스럽게 굴던 세화는, 어쩌면 기태정이 부하의 이런 성향을 다 알고서 골라 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심하고 얕보는 상대여야 수월하다고 한 조금 전의 말을 기억하고서, 최대한 조건에 맞는 사람으로 붙여 준 걸까?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긴 한데 몽롱한 느낌이 들다가 바로 주무시게 될 거예요.”

    세화는 다듬지 않은 지 오래라 거추장스럽게 쏟아지는 머리를 귀 뒤로 꽂아 넘기며, 멀뚱히 보고 있는 남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럼 여기 좀 찢어 주실래요? 새 물건인 거 직접 확인하셔야 하니까.”

    약이 든 비닐 윗부분을 팽팽하게 당겨 공간을 만들어 주자, 남자가 소지하고 있던 작은 나이프를 푹푹 찔러 넣었다. 저금통 배를 가른대도 이보단 성의 있게 임할 것 같았다.

    “아, 도와주시는 김에 이것도요.”

    세화는 아랑곳하지 않고 목에 달랑거리며 감겨 있는 패치를 가리켰다.

    “약 만들 때 이거 있으면 저 실수할 것 같아서요.”

    뒤에서 지켜보던 기태정이 홀더에 피우던 시가를 올려 두었다. 직접 와서 떼어 주려는 모양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세화는 이내 짧게 고개를 젓고 단호한 눈으로 앞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지금 저 손님하고 얘기하는 중이잖아요.”

    기태정의 기다란 눈매 끝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가 품은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호기롭게 굴긴 했지만, 잔뜩 졸아붙은 상태라 그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이사님 말고 손님이 해 주세요.”

    하지만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면 기태정이 아니라 앞에 앉은 남자가 필요했다. 저 남자가 저에게 가까이 다가와야 이번 시뮬레이션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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