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
밑도 끝도 없는 천박한 요구에 몸이 덜덜 떨렸다. 차라리 구멍을 벌리라고 했으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얼굴 위에 앉아서… 뭘 어떻게 해 달라고?
“싫으면 싫다고 해.”
기태정은 어느새 자기 몫을 전부 해치우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포식으로 기분이 좋아진 맹수처럼 느긋한 움직임이었다.
“그런데 그건 알아 둬. 이 내기는 네가 제안한 거고, 내가 이기면 네 아래 씹창나는 정도론 안 끝나.”
섹스해 주면 뭐든 바라는 걸 주겠다던 어제의 제안은 이제 실컷 제 뒤를 따먹고야 말겠다는 수준까지 추락해 버렸다. 어설픈 내기가 오히려 기태정의 불을 붙인 것 같았다.
“진짜 임신할 때까지 박히는 거야. 알았지?”
어차피 자신의 특질 같은 건 전부 파악했을 거였다. 그런데 왜 자꾸 저렇게 말을 해서 사람을 당황스럽게 할까. 질릴 때까지 너 가지고 놀 거라고 선언해도 충분히 위협적일 터였다. 기태정은 정말로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아니까. 그런데 임신 같은 소리나 하면서 재밌어하니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저와 자고 싶어서 저러는 건지. 아니면 곧 와작 씹어 먹을 사냥감, 앞발로 좀 가지고 놀겠다는 건지….
깊은 피로가 밀려왔다. 하우스 놈들 말이 딱 맞았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갈 텐데 꼭 끝까지 덤비다가 골로 갈 새끼. 그게 근성이고 성실함인 줄 아는 새끼…. 그게 바로 저였다.
“그러게 왜 덤벼, 덤비길. 그렇게 덜덜 떨면서.”
기태정이 손등으로 뺨을 툭 두드렸다. 왜 덤볐냐고? 그렇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대로 갈가리 찢겨 죽었을 거다. 그럼 어떻게 살았어야 옳았던 걸까? 뭐든 해 보겠다고 발버둥을 치면 오히려 깊숙이 가라앉고, 가만히 있으면 그대로 모가지가 꺾이는데.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자신의 삶이 평온할 수 있었을까. 사장 놈도 매조도 모란도, 똑같이 성 밖을 살면서도 잘만 살아가는데 왜 불행은 저에게만 닥쳐오는가. 왜.
“하우스에 정말 예쁘고… 잘하는 애들이 많아요. 남자를 선호하신다면 가능한…, 그러니까 선천적으로 남자와 할 수 있는 애들도 있고….”
세화는 체념하듯 입술을 열었다.
그래. 뭐든 하자. 어차피 넣지는 않겠다고 했으니까. 빨기만 한다고 했으니까. 차곡차곡 자기 손아귀에 움켜쥐는 걸 좋아하는 성정인 것 같으니 그래도 자기 입으로 뱉은 말은 지킬 것 같았다. 무엇보다 뒤로 해 본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세화는 애써 좋은 점을 찾아보기로 했다. 처음 저를 범했던 손님과 비교해 보자면, 기태정은 황송한 수준이었다. 만약 하우스에서 이런 일로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제가 먼저 졸졸 따라가 마음에 든다고 얼굴을 붉혔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오늘은 얌전히 대 주고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렇지만.
“그래서 뭐. 너 말고 다른 남창 사다가 박으라고?”
이것만큼은 이해할 수 없었다. 기태정이 왜 이렇게 자신의 몸뚱이에 집착하는 것인지. 기태정이 여태 했던 말을 되짚어 보면 그는 약에 대한 힌트보다 저와의 섹스를 더 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성 밖의 하우스까지 잠입할 정도로 김 소위 사건에 열정적이면서 말이다.
“그렇다기보다는… 저는 애초에 타고난 사람들보다 잘할 수 없어요. 어설프기만 할 거고… 그런데도….”
“그런데도?”
게다가 이곳에는 기태정의 입버릇처럼 진짜로 임신이 가능한, 그러니까 남자면서도 남자를 품을 수 있게 타고난 창부들이 널리고 널려 있었다. 그걸 모르진 않을 텐데, 어째서….
“굳이 저를… 저와 하고 싶다고 자꾸 고집하시는 이유가, 따로 있으신 건지….”
“아아…. 궁금한 건 그게 다야? 그것밖에 없어?”
삐딱하게 다리를 짚은 채로 세화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 주던 기태정이 심술궂게 되물었다.
“네? 저는…, 으, 컥…!”
순식간이었다. 두르고 있는 패치를 목줄처럼 조여 당기는 통에, 세화의 몸이 앞으로 크게 고꾸라졌다. 물벼락을 퍼부을 때도 흐물흐물해지지 않았던 제법 단단한 패치가 기태정의 손짓 한 번에 너덜너덜한 꼴이 되었다.
“자기야.”
산뜻한 부름과 함께 종잇장처럼 몸뚱이가 날아갔다. 세화는 침대 위에 내동댕이쳐진 채 연신 잔기침만 내뱉었다. 숨 돌릴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곧장 몸이 뒤집혔다. 커다란 손이 효율적으로 무릎을 벌리고,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걸치고 있던 가운이 등줄기를 타고 와르르 쏟아지는 바람에 시야가 온통 새하얬다. 놀라서 기침은 멎지 않고, 눈에 보이는 건 싸구려 천 조각뿐이고, 물침대는 잔물결이라도 이는 것처럼 계속 흔들리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걸레더러 왜 걸레라고 하는지 알아?”
속옷도 입지 않아 맨살을 그대로 드러낸 채였다. 기태정의 눈길이 어디에 꽂힐지 뒤늦게 자각한 세화가 꾸물꾸물 몸을 비틀었다.
“여기 말이야. 밑구멍만 보면 정말로 티가 나거든.”
움직임을 저지하려는 듯 기태정이 붙든 엉덩이를 사과 쪼개듯 쩍 벌렸다. 뒷구멍이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하게 당겨질 정도로 전부 드러나는 자세였다. 정말 이렇게 하려는 걸까? 그냥 엎어 놓고 빨기만 하는 구멍 취급이나 하면서? 그럴 거면 더더욱 자신이었어야 할 필요가 없지 않나…? 세화는 혼란스럽고 또 부끄러워서 숙인 몸을 작게 말았다. 아니, 말아 보려고 했지만, 기태정이 엉덩이를 세게 내려치는 통에 어정쩡한 자세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몸 파는 척하면서 부대 안으로 잠입하는 스파이가 한둘이 아니라 본의 아니게 잘 알게 됐거든.”
“아, 윽…!”
“보니까 진짜 창놈은 구멍 부근에 생채기가 잔뜩 났거나, 여기에 멍이 가시질 않는다거나, 손자국이 남아 있거나… 그것도 아니면 알아서 구멍 조이고 벌리면서 애교를 부리더라. 자기가 느끼는 것보다는 어떻게 엉덩일 흔들어야 남들 눈에 꼴려 보일 수 있을까, 머릿속에 그것만 들어 있어서 움직임 자체도 남다르고.”
세화는 손에 잡히는 가운을 꾹 움켜쥐었다. 온몸에 잔뜩 힘이 들어가는 바람에 엉덩이 살이 놀란 토끼처럼 쫑긋 떨렸다.
“마음대로 손님 고르는 고급 창부여도 예외는 아니지. 그래서 창놈더러 걸레라고 하는 거야. 아무리 깨끗하게 빨아도 티가 나서.”
한 번도 관심 가져 본 적 없는 주제였다. 어차피 세화는 전문적으로 몸 파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기태정의 얘길 듣고 있자니 덜컥 마음이 내려앉았다. 지금까지 적어도… 손님과 열 번은 넘게 잠자리를 가져 봤다. 그가 말한 생채기가 나고 잔뜩 멍이 남는, 그런 험한 취급을 당해 봤다. 연인에게 아끼고 사랑받지 않은 몸인 게… 티가 다 나는 걸까? 막 굴려 먹어도 되는 새끼라고 쉽게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난 그런 걸레는 싫어. 그렇다고 정숙한 척하는 건 더 밥맛 떨어지고.”
“으, 읏…!”
아까 전과는 달리 엉덩이를 기분 좋은 정도로 주무르는 기태정은 확실히 섹스에 능숙해 보였다. 어제 세화를 무참히 후려갈기고, 조금 전 사과를 으깨던 사람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운 어루만짐이었다.
“아, 으응….”
단단한 손이 벌어진 구멍과 다리 사이를 문질렀다. 따뜻한 체온이 동그랗게 올라붙은 음낭을 감쌌을 땐 저도 모르게 무릎의 힘이 풀려 버렸다. 자꾸만 입술 새로 녹은 설탕물 같은 신음이 튀어나와서, 세화는 입에 가운을 욱여넣었다. 뭐라도 머금고 있어야 조르듯 울지 않을 것 같았다. 기태정에게 제 몸이 걸레 같은 이유를 방금 들어 놓고서, 좋다고 느끼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쓸데없는 짓을 하네.”
이전과는 달리 욱욱, 하고 울리는 소리가 나자 그제야 기태정이 가운을 벗겨 주었다. 말이 벗겨 준 거지, 껍질이라도 뜯어내는 것처럼 거침없는 손길이었다.
“어쨌든 내 취향은 이렇다는 거고….”
바위처럼 단단한 허벅지가 부드럽게 엉덩이를 짓눌렀다. 여리고 부드러운 살이 생크림처럼 뭉그러졌다. 그 감촉을 즐기듯 기태정이 음, 하고 목을 울리는 소리를 냈다.
“듣기 좋은 소리 좀 해 주자면, 너여야만 해.”
몸을 겹치고서, 기태정이 눌린 상체 아래로 손을 밀어 넣었다. 조금 전까지 민망한 곳을 두드리던 손이 판판한 가슴을 세게 움켜쥐었다.
“아, 이런 건, 한다는 말… 아…!”
“반드시 네 구멍에 싸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
굳은살이 잔뜩 박인 손가락 틈새로 여린 젖꼭지가 뭉개졌다. 평소엔 딱히 존재감도 느끼지 못했던 조그만 살덩이가 단번에 도톰하게 부풀었다.
“그러니까 다른 새끼 사라는 말은 하지 말자, 자기야. 나 되게 속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