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12)화 (12/144)
  • #012

    “내기?”

    기태정의 단아한 미간이 불쾌하다는 듯 꿈틀거렸다. 너무 기어올랐나? 세화는 눈치를 보며 테이블 아래서 빵을 쪼갰다. 혹시라도 또 팰 거면… 식사는 여기서 끝일 테니까 가운 주머니에 좀 숨겨 놓을 요량이었다.

    “뭐 하냐?”

    기태정이 어이없다는 듯 몸을 뒤로 물리고선 아래로 눈짓했다. 세화가 테이블 아래서 뭔가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너 진짜 선수 맞아? 뭐 이렇게 하는 짓이 다 보여?”

    “저는 화투보다는… 마약 전문이라서요….”

    “그래서 밑에서 약 말고 있었어?”

    “…….”

    “또 처맞아야 대답하지?”

    “그게 아니라 빵… 숨기려고요. 건방진 소리 했다고 못 먹게 하실 것 같아서….”

    “야, 이….”

    기태정은 환장하겠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가 도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테이블 위에 올리고 있는 손도 움찔거리긴 했지만 때릴 것 같지는 않았다. 세화는 그제야 거북이처럼 움츠러들었던 목을 끄집어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무표정하긴 했지만, 그의 얼굴에서 아주 잠깐 미소가 스쳐 간 것을 틀림없이 보았다. 안 때리려나 보다.

    “상 안 엎을 테니까 다 먹어.”

    정말이냐는 듯 눈만 굴려 기태정을 바라보자 그가 쓰읍, 하며 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소원 들어주기처럼 대가가 막연한 거래는 안 해. 자기가 이기면 무사히 살려 주고, 김 소위한테 받은 돈도 안 뺏어 가는 걸로 하자. 대신 내가 이기면.”

    이어질 말이야 뻔했다. 놀잇감으로 삼겠다는 거겠지. 어제 기태정이 뭐라고 했더라?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고 했다. 사람들 앞에서 몇 번이나 절정에 오르는지 헤아려 보겠다고도 했다. 변태에 잔인한 구석도 있는 남자니까, 어쩌면 자기 부하들에게도 박아 보라며 손수 세화의 엉덩일 벌려 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렇게 할게요.”

    세화도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조금 전의 대화로 더욱 확실해졌다. 김 소위에게서 갈취해 갈 것이 있는 한, 기태정은 함부로 저를 죽일 수 없다. 완성품을 손에 넣는다고 한들, 그 약을 제조해 본 사람은 현재 세화뿐이었다. 그러니 기태정이 무엇으로 협박한대도 결국은 제가 이기게 되어 있다. 원래 도박은 더 간절한 사람이 지는 법이다.

    “점수는 어떻게 따는 건데? 설마 진짜 맞고라도 치자는 건 아니지?”

    “정하기 나름인데… 상대방에게 도움을 줬을 때 득점하는 걸로 해요. 이번 일, 그러니까 김 소위와 약으로 얽힌 일에 한정해서요.”

    “도움….”

    기태정이 가만히 중얼거렸다. 맨손으로 단단한 사과를 반으로 똑 쪼개는데, 기분이 나빠서인지 별 뜻 없이 하는 행동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세화는 다시 빵을 들고서 고민에 빠졌다. 역시 숨기는 게 좋겠다. 지금 먹어 봤자 맞으면 다 토해 내게 될 거다.

    “아직 어려서 그런가. 되게 밑지는 장사만 하네.”

    악력이 어찌나 센지, 과일을 움켜쥔 손끝 아래로 껍질이 밀려나고 과육이 툭 삐져나왔다. 기태정의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과즙을 바라보던 세화는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져서 애매하게 고개를 비꼈다. 그의 몸짓에서 알고 싶지 않은 은유가 묻어났다.

    “그럴 거면 어제 내 제안 받아들였으면 됐잖아? 너 이대로라면 아무것도 못 받고 그냥 나한테 다리만 벌리는 꼴이 될 것 같은데?”

    기태정이 사과를 씹으며 침대 옆 협탁의 통신기를 가져왔다. 스피커폰으로 돌린 채 내선 번호를 꾹 누르자 곧장 걸걸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 어이, 기 이사.

    사장이었다.

    “벌써 출근하셨어요?”

    - 아니, 밤 꼴딱 샜어. 공사 계획 좀 잡느라고. 이제 집 가야지. 왜, 뭐 필요한 거 있어?

    “다름이 아니라 저한테 붙여 주신 사람 말입니다.”

    - 삼월이? 왜?

    “빚이 있다고 들었는데.”

    주머니로 조심조심 빵을 쪼개서 숨겨 놓던 세화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여기서 빚 얘기가 왜 나와?

    - 어어. 그 씨발 거, 고거 좀 갚았다고 요새 아주 고개 뻣뻣하게 들고 다니잖아.

    “남은 빚, 제가 대신 갚을 수 있겠습니까?”

    - 엉? 그걸 갚아 주겠다고?

    “이자까지 후하게 쳐서 드릴게요.”

    - 그걸 자네가 왜 갚아 줘?

    “삼월이라고 했던가요. 어찌나 서비스가 극진한지….”

    못쓰겠다는 듯 기태정이 다 뭉개진 사과를 내던졌다. 퍽 소리를 내며 입 안에서 실컷 희롱당하던 과일이 상 위로 뭉개졌다.

    “제가 좀 감동했거든요.”

    상 위를 훑던 끓는 시선이 세화의 몸통 한가운데 꽂혔다. 정확히는 벌어진 가운 너머 가슴팍을 향해 있었다. 끈을 단단히 조였다고 생각했는데, 언제 이렇게 풀어 헤쳐졌지…. 당황한 세화가 파드득 몸을 튀며 단정히 깃을 여미자, 기태정 또한 눈을 돌렸다. 뜻을 읽기 어려운 미진한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 와, 진짜 따먹었어? 그 지랄맞은 새끼를 어떻게… 아니다, 그래. 뭐 그거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걔 군부 인사랑 얽혀 있다니까? 어떻게 수습하려고 그래.

    “지난번에 사장님께 부동산 소개해 주신 분 기억나세요? 3성에 있던 그 물건이요.”

    - 아, 당연히 기억나지! 근데 그 사람은 준위잖아. 삼월이 고거는 소위한테 찰싹 붙어서….

    “안 그래도 제가 조만간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사장님과 만나고 싶어 하는 분 중에, 박성학 소위라고 있습니다.”

    - …소위?

    박씨 성의 소위라면… 기태정의 전속 부관을 말하는 것도 같았다.

    “박 소위 핑계를 대면 어떨까요. 우리는 힘이 없는데 어떡하냐고 하면, 알아서 돈 싸 들고 찾아올 겁니다. 혹시라도 박 소위한테 거래 돌려 버리면 김 소위 손해니까요.”

    - 그러다가 중간에서 장난질한다고 양쪽에서 까이면….

    “김 소위건 박 소위건 둘 다 뒤가 구리잖아요. 그 사람들 약점 쥐고 있는 건 우립니다.”

    - 그, 그럴까?

    “네.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빚은 자신이 갚는 것으로 하자며 기태정이 통화를 마무리 지었다. 세화는 가만히 통신기를 바라보았다. 핸드폰을 닮은 기기의 화면이 꺼질 때까지.

    세화가 생각했던 건… 이런 게 아니었다. 제가 먼저 하나씩 떡밥을 던져 주려고 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마약 제조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거나, 유통할 때 자주 쓰는 은어를 알려 준다거나….

    그런데 기태정은 고작 전화 한 통화로, 세화가 평생을 이고 지고 살았던 멍에를 간단히 벗겨 버렸다. 너무도 쉽게 없던 일로 만들어 버렸다.

    “박 소위.”

    기태정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시계의 호출 버튼을 꾹 눌렀다. 세화가 뭐라고 말을 붙일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신속한 동작이었다.

    - 예, 준장님.

    “나간 김에 학교 좀 알아봐.”

    - 학교요?

    “우리 자기가 학교에 다니고 싶대. 공부도 하고,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평범하게 살아 보고 싶다네?”

    - 음…, 성 밖의 학교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혹시 원하시는 유형이 있으신가요? 대학 진학을 위한 학교라거나. 기술 중심이라거나….

    “성 밖? 에이. 준장 이름 달고 나갈 명령인데. 기왕 해 줄 거 제대로 해 줘야지.”

    - 이세화에게 새 주민증 내주시려는 겁니까?

    “응. 5성은 주제에 까무러칠 것 같으니… 2성이나 3성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 준비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어제 말씀하신 계약서는,

    “아. 그건 준비만 하고. 사장에게 알려 주는 건 나중에 하지. 지금 일이 좀 재미있게 돌아가서.”

    통신이 일방적으로 툭 끊겼다. 기태정은 새로운 사과를 아삭 베어 물며 고개를 기울였다. 세화는 손바닥으로 가운을 쓱 문질렀다. 자꾸만 땀이 고여서 어쩔 수 없었다. 그의 입 안에서 바스러지는 과육이 꼭…, 제 미래인 것만 같았다. 기태정에게 새로운 신분 같은 건 입도 벙긋하지 않았는데. 그는 이미 세화의 속셈 같은 건 다 알고 있는 듯 굴고 있었다.

    “…어떻게, 그걸….”

    “뭘? 김 소위한테 새로 주민 등록부 받기로 한 거?”

    “…….”

    “그거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 거야?”

    “…….”

    “자기야.”

    손을 뻗은 기태정이 칭찬이라도 하듯 부드럽게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손가락에 묻은 사과즙이 틈새로 파고들자, 절로 침이 고였다.

    “김 소위한테 돈도 많이 못 뜯어낸 애가, 빚 다 갚으면 이런 범죄 소굴과는 발 끊고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데. 그럼 뭐가 제일 필요하겠어?”

    너처럼 순진한 소리 하는 놈들이 주변에 제법 있었다며, 기태정이 웃었다. 동화에 나오는 왕자님 같은 선한 얼굴로, 세화를 진창으로 처넣으면서 즐거워했다.

    “나였다면 돈을 크게 불렀을 거야. 1성 주민으로 편입하는 정도야 돈만 있으면 가능하잖아. 차라리 그쪽이 나 같은 놈들의 의심을 덜 샀을 텐데.”

    “…….”

    “속상하게 왜 그런 얼굴을 하고 그래. 너 머리 나쁘다고 놀리는 거 아니야. 그냥 자기가 너무 어려서 그래. 그래서 보고 있으면, 다 보여. 다 읽혀.”

    나는 산전수전 다 겪고, 진짜 죽음을 가르고서 매번 살아 돌아온 괴물 같은 불사신이고.

    너는 이 작은 하우스에 갇혀서 평생 살아와서,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아는 불쌍한 어린애라서.

    “그래도 이 정도면 확실히 도움 맞지? 빚도 다 갚아 줬으니까 앞으론 김 소위가 주는 돈 전부 꿀꺽할 수 있을 거고. 내가 준 더 좋은 신분으로 바라던 대로 평범한 생활 할 수 있을 거고.”

    세화의 눈동자가 형편없이 흔들렸다. 뭘까. 저더러 속이 훤히 다 들여다보이는 멍청이라고 비웃었지만. 결과적으로 기태정이 한 일만 정리해 보자면, 제가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보장해 준 셈이었다.

    “그럼 나 벌써 2점이나 딴 거네?”

    “이사님….”

    “좀 억울하긴 하겠다. 자기에 비해 내가 가진 게 압도적으로 많긴 하니까.”

    남자가 사과를 마저 베어 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이렇게 할까? 상대방이 바라는 일 하나 들어줄 때마다 1점씩 무효화하는 걸로. 그러니까 지금 내가 무슨 소원 들어 달라고 했는데 자기가 그걸 수락하면, 내 점수는 2점이 아니라 1점이 되는 거지. 하나 더 들어주면 도로 0점이 되는 거고.”

    “대가가 막연한 거래는 싫다고 하셨잖아요….”

    “응. 그런데 이건 자기가 선택할 수 있잖아? 본 내기에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들어주기 싫으면 그냥 거절하면 돼.”

    아삭아삭. 과일을 씹어 넘기는 기태정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거렸다.

    “뭘… 바라시는데요?”

    “넣지는 않을 테니까, 자기 아랫도리 좀 빨게 해 줄래?”

    아마도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울 악마가, 새빨간 사과를 들고서 세화에게 물었다. 더없이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내 얼굴 위에 앉아서, 자지랑 구멍 빨리면서 질질 싸 줘. 그러면 1점 까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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