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11)화 (11/144)

#011

그렇게 신경이 곤두선 채로 씩씩대다가도 고초를 겪은 몸은 자꾸만 까라져서. 결국 세화는 꾸물꾸물 몸을 일으켜 소파 위로 피신했다. 시트가 쓸데없이 크고 깊은 데다, 넓은 각을 그리며 팔걸이가 걸어지는 것을 보아하니 이 또한 평범한 가구가 아니라 섹스 도구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몸을 구겨 보니 침대보다는 편안해서, 해가 뜰 무렵부턴 잠시 눈을 붙일 수 있었다.

“자기야.”

태아처럼 몸을 말고서 꾸벅꾸벅 조는데, 굉음과 함께 문이 쾅 열렸다.

“아직도 자고 있었어?”

너무 놀란 세화는 그대로 바닥으로 곤두박질쳐 버렸다. 그 꼴을 보고서 기태정은 맑게 웃었다. 참 속도 없는 생각이라는 거 알지만. 그러니까 저 얼굴만큼은 깎아내릴 수가 없다. 선전 방송에나 나올 법한 온화하고 잘난 낯을 하고서 대체 성격은 왜 저 모양일까? 속으로 투덜거리던 세화는, 문득 그를 뉴스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젊은 나이에 준장까지 단, 생김만큼은 황홀한 남자를… 군부에선 왜 선전 도구로 쓰지 않았을까?

“아. 내가 이걸 안 풀어 줬구나.”

꾀죄죄한 세화의 몰골을 보고 기태정이 작게 혀를 찼다. 세화는 쓸데없이 뻗어 나가려는 생각의 가지를 붙들고서, 허둥지둥 팔을 쭉 내밀었다.

“엉덩이는 왜 그렇게 빼고서 있어? 지금 박아 줘?”

“……! 그런, 게 아니라! 저 어제 못 씻어서, 가까이 가면 냄새 날 것 같아서….”

그가 차고 있는 시계를 수갑 어딘가로 가져다 대자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구속이 풀렸다.

“취향이 그런 쪽이야? 난 청결한 섹스가 좋은데.”

기가 막혀서 쳐다보니, 기태정이 장난친 거라며 눈을 씩 휘었다.

“씻고 나와. 옷은 안에 대충 버려두고.”

벗고 나오라는 소린가? 역시, 하는 마음으로 눈을 가늘게 뜨자 기태정이 욕실 안쪽으로 턱짓했다.

“문 뒤에 가운 걸려 있을 거야. 일단 그거 걸치고 있어.”

왜 그러고 다녔는진 알겠는데 어제와 같은 꼬락서니는 도저히 못 봐주겠다며 기태정이 혀를 찼다.

“그럼 옷은….”

“아, 잠깐만.”

그가 말을 툭 자르곤 재킷 안주머니를 뒤적였다. 낱개로 포장된 알약이었다. 약을 보고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자 그가 미간을 구겼다. 까딱하다간 아침부터 또 처맞을까 싶어서 주춤주춤 다가가자, 그가 잘했다는 듯 뺨을 토닥여 주었다.

“내상에 좋은 약이니까 먹어. 어제 그걸론 부족할 테니까.”

세화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벌렸다. 빼꼼 내민 혀를 빤히 보던 기태정이 입 안으로 알약을 밀어 넣어 주었다. 괜히 버티다가 머리채 잡혀서 입 벌리느니 이렇게라도 주워 삼키는 쪽이 나았다. 다행스럽게도 치료를 위한 약이라는 건 정말이었는지, 어제 먹었던 그 약과 비슷한 맛이 났다.

“씻고 나와.”

세화는 간밤 내내 저를 아프게 만들었던 남자에게 감사하다고 꾸벅 고개를 숙이곤, 욕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운신이 어려운 것도 아닌데. 수갑도 풀어서 손도 자유롭게 쓸 수 있는데…. 어제 엎드려서 약을 빨았을 때처럼 혀를 내밀고, 기태정의 손길을 기다리다, 입술로 약을 물어 삼켰다는 것을.

“아, 씨발!”

신경질적으로 문고리에 걸린 가운을 끌어 내렸다. 쪽팔림이 밀려와서 입을 틀어막은 채로 소리를 왁왁 내질렀다. 아, 하고 태평하게 입을 벌린 저를 보고서 그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가 죽어라, 이세화. 나가 죽어….”

고작 하루였다. 24시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벌써 기태정에게 길이 들어 버린 것이다.

“…이게 뭐예요?”

“밥.”

최대한 물기를 말리고서 욕실 밖으로 나오니, 소파 테이블에 밥상이 펼쳐져 있었다. 과일과 각종 빵, 시리얼…. 세화의 기준으론 충분히 훌륭했지만, 준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먹기엔 좀 소박하지 않나 싶었다. 어쨌든 차려진 건 2인분이었기에 꾸물꾸물 테이블 근처로 다가오던 세화는, 익숙한 식기를 보고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거… 하우스 식당에서 가지고 오신 거죠?”

“응.”

“그럼 저는 먹을 수 없는데요….”

“그런 규칙도 있나?”

“규칙까진 아니지만… 이것도 다 빚이라서요.”

별 개소리를 듣는다는 듯 기태정이 픽 웃었다. 정말인데….

“여기서 입는 옷, 먹고 마시는 거 전부 빚으로 달려요. 그날 꽁지 시세로 이자도 붙고요. 그게쌓이면 생각보다 커져서….”

막 포크를 들어 사과를 살해하려던 기태정의 손이 멈칫했다.

“그래? 얼만데? 이 정도면.”

“과일 들어갔으니까 10만 원은 무조건 넘을 것 같은데요. 아. 냉동 과일도 아닌 것 같네요. 그럼 더 비싸요.”

잠시 상 위에 차려진 것을 훑어보던 기태정은 못마땅하다는 듯 짧게 혀를 찼다.

“내 걸로 달아 둘 테니까 먹어, 그냥.”

“그렇지만….”

“할 일 많은데 밥도 못 먹고 빌빌대는 꼴 보기 싫어. 먹어.”

세화는 미심쩍은 눈을 하고서 일단 테이블 앞에 앉았다. 신기하게도 먹을 것을 앞에 두니 물색도 없이 식욕이 돌았다. 하긴. 기태정은 이곳의 이사였다. 진짜 정체가 뭐든 이사라는 감투를 쓴 사람한테 장부를 달진 않을 것 같았다.

…사실은, 먹을 수 있을 때 잔뜩 먹어 두고 싶어서, 어떻게든 합리화를 하려는 거지 근성에 불과했지만. 가뜩이나 쪽팔린 꼴 보인 와중에 그런 기색까지 내보이고 싶진 않아서, 세화는 할 수 없이 네 말에 따른다는 듯 삐죽거리며 앞자리에 앉았다.

“남은 빚은 얼만데?”

“2억이요.”

“원금만 2억이라는 거야?”

“이거저거 다 포함해서요. 하우스 나가기 전까진 2억만 갚으면 돼요.”

“거기에 이렇게 밥 먹고, 옷 사 입고 하는 돈은 따로 추가된다는 건가?”

“네. 보통 하우스 이용 비용이랑 사용한 장물 비용, 식비, 교통비… 그런 것들은 추가로 정산해요. 사납금이라고 불러요.”

“그럼 2억은 어떻게 갚게. 너 이제 일도 못 할 텐데.”

세화는 따끈따끈한 빵을 조금씩 뜯으며 기태정의 눈치를 봤다. 이게 될 판인지 아닌지 간 보는 거 딱 질색이라고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습관이었다. 대드는 거 싫어하고. 반응이 느린 것도 싫어하는 거 아는데. 여기서 질질 짜거나 우물쭈물 넘어가 버리면 앞으로도 그가 바라는 대로 흘러가게 될 것만 같았다. 이를테면 기태정이 여기 머무는 동안 말 좆처럼 커다란 걸 뒤로 받아 내야 한다거나.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기선 제압 같은 거다. 원래도 게임에선 누가 선(게임을 주도하는 사람 혹은 첫 순서인 사람)을 따느냐가 제일 중요한 법이었다.

“그래도 김 소위는 만나게 해 주실 거잖아요.”

여기서 더 나빠질 일도 없을 것 같다. 그래서 고를 외쳤다. 건방진 말에 기태정이 눈만 치켜들어 세화를 바라보았다.

“김 소위가 만드는 약이 필요하신 거면… 어차피 그 자리에 저 내보내실 것 같은데. 김 소위랑은 3번 정도 더 만나기로 했거든요. 그러면….”

“3번이면 2억은 충분히 벌 수 있을 것 같고?”

“네.”

“겨우 2억 원어치만 운반할 것 같지는 않은데…. 어쨌든 빚은 2억이라는 거고, 치우고 남은 돈으로 먹고살아 보겠다는 건가? 하우스 나가면 뭐 하려고?”

다행스럽게도 물음은 평범했다. 네 주제에 뭘 할 수 있겠냐고 비웃는 기색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세화는 조금 더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그냥… 공부도 하고 평범하게 살아 보고 싶었어요.”

“그게 다야?”

“날 때부터 이런 곳에서 자라서… 그냥 궁금했어요. 평범한 사람들 살아가는 이야기가.”

김 소위에게 1성 주민증도 대가로 받기로 했다는 걸… 기태정에게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조금 더 솔직해져도 될 것 같은 분위기긴 한데. 잠시 망설이던 세화는 그 패까지 내보일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그냥 접기로 했다.

어제 기태정의 제안처럼, 김 소위도 더 많은 돈이나 집을 약속했다. 그렇지만 세화는 약간의 거래 대금과 주민증을 선택했다. 1성 주민이 된다는 게 돈보다 더 절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금 전, 기태정은 세화가 생각보다 적은 대금을 받아 왔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런 와중에 실은 김 소위에게서 주민증도 받기로 했다고 이실직고한다면…. 기태정은 저의 실질적인 소원이 뭐였는지 단박에 눈치채 버릴 거다.

준장은 저를 5성 주민으로 올려놓을 수도, 2원도 아닌 1원에 처박아 놓을 수도 있는 사람이다. 세화는 이 문제로는 누군가에게 휘둘리고 싶진 않았다. 짐승 도축하듯 어디 매달아 놓고 패는 것도, 구멍이나 벌리라고 비웃는 것도 상관없었다. 그렇지만 이것만큼은….

어제 그의 손에 죽을 뻔했을 때도 털어놓지 않았던 얘기였다. 비겁하고 비굴하게 살았어도, 이 실낱같은 희망만은 내내 손에 쥐고 있었다. 비록 여기저기 흠집이 난 훼손된 꿈이긴 했지만, 그걸 품고 사는 게 죄는 아니지 않은가.

“저… 이사님.”

식사를 그저 에너지 공급 수단 정도로 여기는 건지, 기계적으로 저작 운동을 반복하던 기태정의 턱이 우뚝 멈추었다.

“…이사님?”

“어쨌든 여기 이사님으로 오셨으니까요.”

나름대로 고심해서 고른 부름이었다. 목적이 있어 하우스에 잠입한 사람한테 준장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좀 그럴 것 같았다. 무엇보다 저는 군인도 아니었다. 그런 주제에 멋대로 준장님이라고 불렀다가 또 때리면 어쩌나 무서웠다.

“이사님이라….”

기태정은 혼자서 생각에 잠긴 채 해괴하게 생긴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다 어이가 없다는 듯 실실 웃었다. 아 씨발 존나 꼴리네, 그가 입 모양만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는 건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하여튼, 그래. 이사님 왜 불렀어.”

세화는 저도 모르게 혀를 내어 약을 받아 갔던 일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벌써 휘둘리면, 길들면 안 된다. 그러니까….

“하우스 선수들끼리 하는 내기가 있는데… 3점 먼저 가져가는 사람이 이겨요.”

소심하게나마 판돈을 걸어보기로 했다. 아까 김 소위는 만나게 해줄 거 아니냐는 건방진 물음에 기태정은 웃기만 했다. 때리지도 않았고 발로 차지도 않았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빚이 얼만지도 묻고, 밥상을 엎지도 않았다. 오히려 소심하게나마 대꾸를 했을 때 즐거워하는 반응을 보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정도 기어오르는 건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가장 좋은 방향은 기태정이 자신을 동등한 거래의 대상으로 봐주는 걸 테지만, 그건 바라지도 않았다. 못해도 흥미롭게 여겨줬으면 했다. 때려도 되고, 섹스해도 되는 상대가 아니라 일 하나 맡겨보고 싶은 아랫사람 정도여도 충분했다.

“그냥… 시시한 내기에요. 그달 밥값이나. 정산 같은 거 걸고서 소소하게들 많이 해요.”

“그런데?”

세화는 테이블 아래로 손을 쏙 감췄다. 긴장한 탓에 떡이 되도록 주무른 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저랑… 그렇게 내기 한번 하실래요? 먼저 3점 따 가는 사람 소원 들어주는 걸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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