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9)화 (9/144)

#009

세화는 무거운 눈을 감았다 떴다. 계속 뺨을 문대고 있었던 탓일까. 차가웠던 타일 바닥이 이젠 미지근하게 느껴졌다.

남자들은 상관의 명을 충실히 이행했다. 그들은 피부가 죄 벗겨질 듯 비누칠을 해 대고는, 내내 물줄기만 쏘아 댔다. 여기 있는 건 청소 용도로 갖춰 둔 호스뿐이어서 평범한 샤워기보다 수압이 훨씬 셌다. 그래서 몹시 아팠고… 당황스럽게도 그게 전부였다.

약을 사간 고객님들이 하도 황홀해하길래 대단한 뭔가가 있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잔뜩 예민해진 살갗을 후려치고 베는 것처럼 아프기만 해서, 세화는 시체처럼 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약효가 사라지기만을 기다렸다.

처음 물벼락을 맞았을 땐 저도 모르게 울컥 사정해 버렸다. 좋아서가 아니라, 불가항력이었다. 거대한 손이 온몸을 비틀고 쥐어짜는 것 같았다. 정액만 쏟은 게 아니라 눈물도 줄줄 흘렀고, 위액까지 토해 내다 기도가 막혀 죽을 뻔했다.

혹시라도 눈이 뒤집혀서 놈들에게 박게 해 달라거나 박아 달라고 애원할까 봐 무서웠는데, 그렇진 않으니 다행인 건가 싶다. 어쩌면 약발이 워낙 안 듣는 몸이라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무려 군에서 쓰는 물건을 몸에 감고서도 효과가 덜한 것을 보면.

그나저나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장승처럼 서 있던 남자들의 자세도 조금 흐트러지기 시작한 걸 보니 그래도 제법 오래된 것 같은데…. 애초에 최음제는 지속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아니, 모든 마약이 다 그렇다. 고조되는 것도 추락하는 것도 한순간이라 점점 더 강한 것을 찾게 되는 원리였다.

어쨌든 이제 약효 다 떨어졌다는 거, 밖에서도 알고 있을 텐데도 기태정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생전 겪어 본 적 없는 강도의 폭력에, 약까지 맛보게 했으니 이젠 골병이나 들어 보라는 심산인 걸까?

“…테니까.”

세화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건지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부쩍 가까워졌다. 다소 편하게 짝다리를 짚고 있던 남자들이 돌연 자세를 딱딱하게 가다듬었다. 보이는 것이라곤 놈들의 구둣발뿐이었어도, 잔뜩 긴장하고 있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하지만 준장님….”

박 소위의 애달픈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기태정이 어떤 표정을 지어 박 소위를 무안하게 만들고 있을지 안 보여도 훤했다.

“그만 나가 봐.”

척, 바닥에 고인 물을 박차고 나가는 소리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다. 지키고 있던 놈들의 절도 넘치는 유난에 애꿎은 세화만 물을 뒤집어썼다.

그러고 보니 오늘 유독 물에 얽히는 일이 많았다. 아까는 창고의 구정물에. 지금은 욕실 타일에 눌어붙어 청소나 당하고. 누구였더라, 매조였나? 예전에 저더러 물 가까이 가면 재수 없을 사주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지금 보니 영 틀린 말도 아닌 것 같다.

“일어나.”

저벅저벅 걸어온 기태정이 또 발길질을 해 댔다. 아까처럼 사람 죽일 듯이 몰아가는 정돈 아니고, 그냥 일어나라고 툭툭 건드리는 것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아픈 건 아픈 거였다.

“엄살 그만 피우지? 이제 약발 안 도는 거 아는데.”

세화는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기태정은 수틀리면 이대로 얼굴을 바닥에 갈아 버릴 위인이었다. 문자 그대로 접시 물에 코 박고 죽고 싶진 않았다.

“생각해 봤는데, 자기한테 내가 제안 하나 하려고.”

반사적으로 터질 뻔한 헛웃음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제안? 제안 같은 말을 입에 올리며 접근하는 놈들치고 끝이 좋았던 적이 없었다. 당장 김 소위와의 거래만 하더라도 결국 이렇게 흘러갔는데 말이다.

“김 소위가 약속한 게….”

세화는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그나마도 싸구려 백열등 조명 덕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그렇게 번지는 빛에 잠시 눈을 찡그린 채로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데… 정작 기태정은 운을 떼 놓고서도 조용하기만 했다.

뭐지? 세화는 머뭇머뭇 눈을 떴다. 기태정은 여전히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만 빛을 등지고 있었던 탓에 그의 표정을 읽기 어려웠다.

망설이던 세화는 목도 못 가누는 강아지처럼 낑낑대며 푸르르 물기를 털어 냈다. 혹시 젖은 미역처럼 머리카락이 찰싹 달라붙어서 소리가 잘 안 들리는 건가 싶었다. 기태정의 말을 놓치면 무조건 제 손해였다. 굼뜨게 군다고 걷어차이기나 할 테니까. 그러니 나름대로 애쓰고 있다고 어필이라도 할 속셈이었다. 사실 손을 들어 젖은 머리칼을 정돈하고, 얼굴을 훔치는 게 가장 빠르긴 하겠지만. 손목을 구속한 수갑이 천근만근이라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흥분 효과가 사라진 건 맞지만, 이렇게 나른하게 축 늘어지는 상태는 몇 시간 갈 터였다.

“…….”

한참 동안 세화가 하는 모양을 바라보던 기태정이 느리게 몸을 움직였다. 한쪽 무릎을 땅에 딛고 있는 모습은 조금 전 약이 깔린 판을 받쳐 줄 때와 비슷했다.

“제가 아직….”

더듬더듬 변명을 늘어놓으며 슬쩍 그를 바라본 세화는… 시퍼렇다 못해 컴컴한 기태정의 안채에 굳어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자신의 말이, 행동이 뭐가 그렇게 그의 심기를 건드린 건지 모르겠다. 기태정은 능글거리던 표정마저 완전히 지운 채, 딱딱하게 굳어선 세화를 바라보기만 했다. 사과하고 싶어도 왜 빡친 건지 알 수가 없으니…. 어쨌든 무서운 분의 기분을 거스르고 싶지 않아 조용히 숨만 내쉬며 눈을 내리깔고 있었는데,

“윽…!”

사냥하듯 뻗어 온 커다란 손이 대뜸 얼굴을 움켜쥐었다. 뺨을 뚫을 듯 거센 악력에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얼굴에 그딴 걸 왜 처바르고 있나 했더니….”

이곳저곳을 문지르는 손바닥이 거칠었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질려 주섬주섬 비굴하게 사과를 했더니, 기태정이 기가 찬다는 듯 짧게 코웃음을 쳤다. 그리곤 단박에 멱살이 붙잡혔다. 기태정은 뭐가 그렇게 신기한지 세화의 민낯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그래봤자 얼룩덜룩하게 피부를 덮고 있던 태닝 스프레이만 지워 냈을 뿐인데. 뭐가 재밌다고 저리 진득하게 훑어보는 건지 모르겠다.

“저기….”

결국 먼저 입을 뗀 건 세화였다. 압사할 것 같은 무거운 침묵을 더는 견디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

이채가 서린 컴컴한 눈빛을 받아 내고 있자니, 먼저 불러 놓고서도 쉬이 말문이 트이질 않았다.

“뭔데.”

…뭐냐니? 그건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저라고 이런 상황에서 기태정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저렇게 오체 분시라도 할 것 같은 눈으로 사람을 쏘아보는데. 심지어 이쪽이 밑지고 있는 와중인데… 나한테 제안하려던 건 뭐고, 그거 협상은 가능하냐고 쪼아 댈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야. 나 간 보는 거 싫어한다 그랬지.”

“그런 게 아니라… 저에게 제안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간을 보긴 대체 누가. 삐딱하게 굴고 싶은 것을 참으며 세화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뚝뚝 분절된 시선이 축축한 이마와 젖은 뺨을 훑고 갔다. 최선을 다해 끌어 올린 입꼬리가 어색하게 파르르 떨렸다. 정신없이 배회하던 기태정의 눈길이 어색하게 굳은 입 부근에 머물렀다. 고작 몇 초는 될까 싶은 그 순간이 영원처럼 길었다.

그리고 그가 눈꺼풀을 치뜬 순간. 세화는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물렀다. 그래봤자 단단히 붙들린 상황이라 하찮은 발악에 불과했으나, 못마땅하다는 듯 기태정의 단정한 눈썹이 옅게 꿈틀거렸다. 시야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걸 용서할 수 없다는 듯이.

세화는 질식할 것 같아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그때. 떨리는 그 숨결이 신호라도 되는 듯 기태정이 재차 손을 뻗어 왔다. 기습이었다. 세화는 그의 손아귀 안에서 형편없이 구겨졌다. 시야가 휙휙 돌았다. 꼭 맹금류에게 사냥이라도 당한 것 같았다. 새카맣고 집채만 한, 날카롭고 거대한 발톱을 가진, 맹금류.

기태정은 세화를 짐짝처럼 들쳐 메고선 화장실 문을 뻥 걷어찼다.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지는 몸이 제법 무거울 법도 한데. 아니, 실제로 물이 뚝뚝 흐르고 있는데… 그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박 소위를 불렀다.

“조금 전에 이거 지키고 있던 놈들 어디 갔어.”

“정찰 인원이 부족해서 내보냈습니다. 다시 불러올까요?”

“됐어. 말 돌아서 좋을 거 없으니까 알아서 처리만 해.”

“…예?”

“죽일 것까진 없고…. 눈이나 혀, 둘 중 하나만 없어져도 어련히들 알아서 몸 사리겠지.”

세화는 빨랫감처럼 축 늘어진 채로 눈만 깜빡였다. 무슨 뜻이지? 지키고 있던 놈들이라면… 저를 씻긴 놈들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럼 자기 부하 아닌가? 그런데 눈이든 혀든 둘 중 하나를 뽑으라고?

“준장님.”

박 소위가 다급하게 기태정의 뒤를 따라붙었다. 세화는 그의 어깨에 얹힌 채로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저도 모르게 기태정의 옷을 움켜쥘 뻔했다. 아니면 등을 끌어안든지. 받치고 있는 힘은 안정적이었지만, 언제 그가 자신을 내던질지 몰라 불안했다.

“준장님, 방금 하신 말씀은…, 아.”

총을 연사하듯 우다다 말을 쏟아 내던 박 소위가 급하게 브레이크라도 밟은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갑작스러운 태도의 변화에 기태정이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박 소위는 조금 멍한 표정으로 기태정의 몸을, 정확히는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세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혼자서 허둥거리던 세화 또한 심상치 않은 침묵에 슬쩍 고개를 들었다. 빼꼼 고개를 쳐든 세화와, 그런 세화를 멍하니 보던 박 소위를 번갈아 확인한 기태정이 잇새로 욕을 내뱉었다. 그냥 씨발도 아니고 아 씨이팔, 뭐 그런 한껏 저속한 발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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