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8)화 (8/144)
  • #008

    시가를 쥔 손의 엄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기태정이 박 소위의 말을 뚝 잘랐다.

    “예?”

    “김 소위 자백 홀로그램에 더해서 이세화가 임신까지 하면 완벽한 증거가 될 것 같은데. 이세화의 아기집이 최근에야, 적어도 김 소위와 접촉한 이후에나 생겼다는 걸 증명받으면 되는 거잖아.”

    “그렇긴 합니다만… 이세화의 체질이 예전과 달라졌다는 걸 확인할 방도가….”

    “왜 없어. 하우스 사장이든 다른 꾼이든 그 몸뚱이 얼마에 팔 수 있을까 수시로 값 매겨 놨을 텐데. 이세화가 보통 사람들 정기 검진보다 훨씬 자주 피 뽑아 봤을걸.”

    여긴 돈 몇 푼 받아 내겠다고 매혈과 장기매매를 서슴지 않는 놈들투성이다. 상환 기록만큼이나 채무자의 건강 상태를 꼼꼼하게 기록해 두었을 거다.

    “재판 때 이세화더러 즉석에서 약 제조해 보라고 시키고, 김 소위가 숨겨 뒀던 물건과 성분 비교해 보는 거지. 그리고 어렵지 않은 기술일 것 같은데, 후천적으로 생긴 아기집 추적하는 건.”

    별생각 없이 꺼낸 얘기였는데 말을 하다 보니 점점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이세화가 임신하면 그 약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아주 편리하게, 누구도 딴지 못 걸게 증명할 수 있다.

    “그럼 혹시 밑의 애들을 시키실 생각인 겁니까? 그… 이세화의 임신이요.”

    “우리 쪽에서 해결해야지, 당연히. 소중한 증거물을 홍등가에 내다 팔 수도 없잖아.”

    박 소위는 헛숨을 들이켜며 잠시 말을 골랐다. 그마저도 사나워지는 기태정의 눈초리에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으음… 그렇지만 준장님, 이세화가 임신한다면 그 주제로 딴지를 거는 놈들이 분명 나오지 않겠습니까?”

    “왜?”

    기태정이 정말 모르겠다는 듯 물어 왔다. 왜냐니…. 박 소위는 식은땀을 흘리며 주섬주섬 말을 덧붙였다.

    “그거야… 이 문제를 크게 터트리실 거죠?”

    “그럼 작게 터트려?”

    “그렇다면… 오 대장 측이든 김 소위 측이든, 반대쪽에서 먼저 나서서 이세화에게 여러 가지 검사를 받게 할 겁니다.”

    영문도 모르고 임신 가능한 체질로 변하게 된 피해자. 혹은 날 때부터 범죄를 저질러 온 성 밖에 사는 하층민이자 공범. 어떤 쪽이든 높으신 분들이 엉뚱한 방향으로 여론 몰아가기 딱 좋았다. 그리고….

    “이세화가 임신에 성공한다고 한들 아이 아버지가 우리 쪽 사람이라는 게 밝혀지면… 약물 복용 과정에서 기태정 준장의 사람들이 이세화를 강간했다, 이런 자극적인 타이틀을 뽑아 대려고 할 겁니다.”

    사건의 본질을 흐려 보려 눈이 벌게졌을 놈들이 이런 떡밥을 놓칠 리 없다.

    “억지로 체질이 변한 피해자에게 원치 않은 임신까지 강요한 건 과연 정당한 일인가, 뭐 이런 식으로요.”

    “이세화가 누구 애를 어떻게 갖든 그건 김 소위 사건과는 상관없잖아.”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여론전이라는 게 원래 그렇잖습니까.”

    원래도 기태정이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나면 그 과정으로 딴지를 거는 족속들이었다. 이렇게까지 초토화할 필요는 있느냐, 전쟁 중에도 지켜야 할 윤리라는 것이 있지 않느냐… 그런 말들로 언론을 들쑤시며 어떻게든 기태정의 공을 깎아내리고자 했다.

    “아무리 그래도 김 소위가 벌인 일을 없었던 것처럼 덮을 순 없을걸.”

    “대신 준장님의 제대도 앞당겨지진 않을 겁니다.”

    이번엔 대장급 인사까지 같이 엮었으니,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견제를 받게 될 것이다.

    박 소위의 염려는 타당했다. 기태정은 혈혈단신이었다. 그를 포섭하려 드는 사람들이야 많았지만, 여태 독자 노선을 취한 탓에 이런 일이 생겼을 때 편을 들어 줄 지원군이 없었다. 그나마 마음을 트고 지내는 사람들도 박 소위처럼 같은 실험을 거치고 살아남은 고아들, 그러니까 쓰고 버리기 좋은 인간 병기들뿐이었다. 기태정이 소원대로 이번 기회에 군부의 목줄을 완전히 걷어 낼 작정인 거라면, 흠 잡힐 요인은 처음부터 치워 두는 게 좋다.

    “흠…. 그럼 이세화가 임신에 동의했다는 증거만 있으면 되는 거지?”

    “…예?”

    이 무서운 상관을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고민하던 박 소위가 뒤늦게 대꾸했다. 태정이 굼뜬 반응을 질색하는 걸 알았지만, 이번만큼은 박 소위도 멍청하게 입만 벌리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저, 준장님… 그건 너무 극단적인 결론이 아닐까 싶은데….”

    “그래. 다른 놈들 시킬 거 없이 내가 직접 하면 되겠네. 이세화가 좋다고 질질 싸면서 내 애 갖고 싶다고 우는 영상이라도 남겨 두면 될 거 아냐.”

    이미 혼자서 결론을 내려 버린 듯 기태정이 중얼거렸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실실 웃기까지 하면서.

    “영상이 중요한 게 아니라, 헛, 잠깐만요!”

    “너 오늘따라 말이 많다?”

    “준장님, 그, 직접… 하시겠다고요? 아이… 만드는 일을요?”

    “씨발. ‘아이 만드는 일’이 뭐냐? 후지게.”

    태정이 머금었던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운무처럼 뿌연 기체 너머로 벌건 불씨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생각해보니까 이세화를, 그런 상판을 한 애를 어디 던져 주면 말이 안 퍼질 수가 없어.”

    입이 무겁다는 놈들로 골라 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수하들을 완전히 믿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기태정은 박 소위를 비롯한 수용소 출신을 제외하고선 딱히 믿고 쓰는 사람이 없었다. 정확히는 자기 자신을 제외하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았고, 기대도 없었으며, 당연히 타인에 대한 신뢰도 없었다.

    무엇보다 군부의 개들은 어느 정도는 짐승처럼 굴기 마련이었다. 임무만 완수해 내면 사소한 실수나 욕구의 해소 정도는 가볍게 넘어가는 풍조 덕분이다. 몇 달은 꼼짝없이 성 밖을 떠돌게 생긴 놈들에게, 임신할 때까지 실컷 싸지르라면서 이세화를 넘겨준다? 제대로 된 증거를 손에 넣기도 전에 상부터 치르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론전에 대비하라며.”

    지저분한 공방이 시작되면, 일단 상대가 부리는 놈들부터 탈탈 털어 가기 마련이다. 박 소위처럼 충성도가 높은 핵심 인재보다야, 있는 줄도 몰랐던 아랫사람을 회유하는 게 훨씬 쉬우니까. 기태정 또한 몇 번 당해 보았다. 밑에 거느리고 있는 사람이 많아지면 아무리 무섭게 다스려도 어쩔 수 없이 말이 새어 나오기 마련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돈 몇 푼 받겠다고 입을 나불댄 멍청한 놈들 때문에 어중간한 정보가 넘어가 개고생한 적도 있었다.

    “맞는 말이야. 아는 사람이 적은 게 낫겠어, 역시.”

    “그래도 준장님… 아이는….”

    박 소위는 당황스럽다는 듯 말을 흐렸다. 기태정이 이 주제로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아 왔는지 잘 알아서였다. 임관 이후로 기태정은 언제나 말도 안 되는 임무를 도맡아 왔다. 특히 직전에 그가 수행했던 작전은 말도 안 되는 규모였다. 정신 착란을 보이지 않는 게 용할 지경인데, 여기에 아이라는 가장 강력한 짜증 유발 요소까지 더해진다면…. 과연 기태정이 일이 끝날 때까지 미치지 않고서 견딜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야. 자기 자식 새끼랑 접붙이겠다고 달려드는 꼰대들이 싫은 거지, ‘아이 만드는 일’이 싫은 건 아니거든?”

    “물론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욕구의 해소와 이 일은 목적 자체가 다르니….”

    “그렇긴 한데… 이세화, 어떻게 보면 나한테 딱 맞는 상대 같기도 해. 그래서 걔를 임신시켜야 하는 건… 글쎄, 그건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예?”

    “생각해 봐. 피임 걱정할 것도 없이 마음대로 박고 싸도 되잖아? 이세화의 ‘임신’이 중요한 거지, 걔가 품은 애새끼가 중요한 건 아니니까.”

    심지어 이세화는 성 밖의 사람이다. 쓸모를 다한 이후론 이세화든 그 애새끼든, 어떻게 치워 버린대도 누구 하나 문제 삼지 않을 거다.

    “게다가 처음부터 끝까지 내 통제 아래 둘 수 있으니, 어디서 몰래 애 낳고 와선 내 발목 잡으려고 들 수도 없을 거고.”

    원래도 무리한 임무를 마치고 나면 자처해서 스파이 심문을 맡기도 했다. 혹은 몇 명을 끼고서 내내 그 짓거리만 한 적도 있었다. 며칠 그렇게 날뛰다 보면 다 때려 부수고 싶은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물론 조금 가라앉을 뿐이지, 아주 사그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이세화에겐 둘 다 해도 된다. 심문이든 섹스든. 적어도 몇 달은 발아래 두고서, 내키는 대로 굴어도 된다.

    기태정은 이세화의 훌쩍이던 얼굴을 떠올렸다. 몸을 숙이고서 혀를 내어 약을 핥아 먹던 모습도. 일부러 그런 건진 몰라도 행색은 삼류 양아치만도 못했지만… 어차피 내내 벗겨 놓고 박기만 할 테니 딱히 신경 쓸 부분은 아니지 싶었다. 어울리지도 않던 스프레이를 싹 걷어 내면 또 어떤 몰골이려나. 사실 지금도 썩 나쁘진 않은데.

    “어쨌든 이세화는 본인 의지로 나랑 씹질하게 될 거고, 자기 입으로 내 애도 갖겠다고 말하게 될 거야.”

    “그렇지만,”

    “우리야 아까 처맞고 질질 짜는 것만 봐서 그렇지, 이세화 그거 보통 아니야.”

    자력으로 2원에서 4원까지 이적한 놈이었다. 그의 특이한 체질은 차치하고서라도, 보통 독하지 않고서야 어려운 일이었다. 심지어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김 소위와 손을 잡기까지 했다. 약속받은 대가가 있다는 뜻일 텐데…. 그런 주제에 위험에 처하자마자 바로 꼬리를 내리고 자기가 아는 걸 술술 불었다.

    “소원하는 것은 있고. 욕심도 있고. 그런 와중에 살고 싶다는 의지는 강하고… 딱 좋지.”

    “준장님….”

    “사장 놈 한 번 찔러봐. 이세화랑 쓴 계약서 잘 뒤져 보면, 이대로 빚 탕감하고 튀기 어려운 조항 분명 있을 테니까.”

    휴대용 홀더에 시가를 올려 두자, 불이 붙은 자리가 천천히 녹아내렸다. 바스락 닳는 소리가 시발점이라도 되는 듯 기태정은 길게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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