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6)화 (6/144)

#006

최음제? 세화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문이 목적이라면 그보다 효과적인 약물이 얼마든지 있는데.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열 개가 넘었다. 하긴. 저 남자가 그걸 몰라서 굳이 미약을 쓰는 건 아닐 거다.

어쨌든 지시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실컷 걷어차인 몸이었다. 혀로 찍어 먹든 코로 흡입하든 저 유리판을 손에 쥐어야 뭐든 해 볼 수 있을 텐데. 갓 태어난 짐승처럼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서 일어나 앉는 것조차 어려웠다.

시야에 걸린 기태정의 발이 비스듬히 축을 돌았다. 삐딱하게 다리를 짚은 채로, 일정한 박자로 발끝으로 툭툭 바닥을 두드린다. 시간을 재듯이. 굼뜨게 군다고 또 걷어찰 각을 재는 모양이었다. 대체 어떡하라는 거지? 지금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거 잘 알면서. 막막함에 흘끗 올려다보자, 기태정은 생글생글 웃기만 했다.

자꾸 시야가 흐려져서 어떻게든 초점을 잡아 보려 눈을 깜빡였더니, 볼을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냥… 생리적인 거였다. 무섭고 서러워서 질질 짜는 게 절대로 아니었다. 그런데 기태정은 그걸 다른 의미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피식 웃더니, 봐준다는 듯 애매하게 아래로 쓱 턱짓했다.

세화는 한숨을 숨기려 입술을 감쳐물었다. 자존심이 상하는 걸 떠나서… 그의 몸짓에 혼란만 더해졌다. 그렇게 보면. 뭐 어떡하라고, 어쩌라고. 괜히 속으로 꿍얼거리는데, 문득. 저 시선이 의미하는 바가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꾸물꾸물 그의 눈길이 닿는 쪽을 덩달아 바라보자, 고개가 절로 굽혀졌다.

덤덤하게 슴벅거리던 세화의 눈매가 단숨에 뾰족해졌다. 개처럼 엎드려서 빨라는 거구나, 지금. 세화는 처음 기태정을 보고 넋을 놓았던 과거의 자신을 쥐어박고 싶어졌다. 씹질해 주면 배로 주겠다던 변태들보다 질이 나쁜 새끼였다.

“눈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지금 이 얘기 벌써 두 번째 하는 것 같은데.”

정수리로 쏟아지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또 몸이 움찔 떨렸다. 알았어. 한다고. 한다잖아. 세화는 소심하게 중얼거리며 몸을 숙였다. 숙이고 있으니 앉을 때보다는 고통이 덜한 것 같다가도, 배에 닿은 무릎이 자꾸만 아픈 곳을 쿡쿡 쑤셔 대서 식은땀이 났다. 눈앞의 남자를 닮은 의뭉스럽고 짜증 나는 아픔이었다.

어쨌든 그건 제 사정이었고, 그런 걸 고려해 줄 사람이었으면 이런 짓거리도 시키지 않았을 거다. 세화는 분부대로 몸을 굽히고 판 가까이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어차피 피와 침을 닦아 내느라 더러워진 손가락으론 뭘 집어 먹을 수 없기도 했다. 최대한 얼굴을 유리에 가까이 붙이고 혀를 내어 가루를 살짝 핥았다. 그러면서 기태정을 흘긋 올려다보았다. 엎드려서 남자 좆이나 빠는 것 같은 이 자세가 당신이 원한 게 맞냐는 듯이.

“잘하네.”

달갑지 않은 칭찬이었다. 덧붙인 예쁘다는 말은 안 듣느니만 못했다. 세화는 우물우물 혀와 입천장에 달라붙은 가루를 삼켰다. 뭔지 파악하고 싶어도 입 안이 다 터진 데다, 코피도 멎지 않아서 느껴지는 거라곤 비릿한 피 맛과 혈향뿐이었다.

“다른 것도.”

혀끝으로 유리판을 쿡 찍었다. 습관처럼 치아 뒤쪽, 입천장, 볼 안까지 꼼꼼히 혀로 훑던 세화는…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제 몸을 살펴보았다. 아까까지 어정쩡하게 웅크리고 있던 몸을 저도 모르게 펴고 있었다. 피로 축축하던 비강도 조금씩 말라 가는 게 느껴졌다. 이상하게 통증이 좀 가신 것 같았다.

무슨 감상을 내놓기도 전에 바닥에 새로운 유리판이 놓였다. 이번엔 네 종류였고, 전부 흰색의 가루였다. 허튼소리를 듣기 싫어서, 기태정이 뭐라 말을 붙이기도 전에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이후로 또다시 놓인 판은 처음에 먹었던 것과 비슷한 구성이었다. 세화는 미간까지 구겨가며 신중히 혀를 굴렸다. 피도 멎고 통증도 가시자 조금씩 맛을 구별할 수 있었다. 이것들은 확실히 처음 먹어보는 거고, 최음제도 아니다.

“오. 안 섰네?”

장난하나. 세화는 슬금슬금 몸을 일으켰다.

“…군에서만 쓰는 약인가 봐요.”

“맞아. 작전 중에 유용하게 쓰이지.”

전투 중에 내장이 뭉개지는 건 대단한 일도 아니니까, 하면서 기태정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부대 안엔 더 좋은 약도 많은데 지금 가진 건 이 정도뿐이라서. 그래도 이제 몸 괜찮지?”

지금 병 주고 약 주나? 세화는 어이가 없었지만, 최대한 불손한 표정을 짓지 않으려 애썼다. 말 그대로였다. 왜 이런 귀찮은 짓을 하나 싶었는데, 지금 기태정은 저한테 과시하는 거였다. 문자 그대로 병 주고 약 주면서 너 끝까지 몰아갈 수도 있다고. 그러니까 말 잘 들으라고.

저를 어떻게 가지고 놀 수 있을지 보여줬으니, 이제 진짜 본론이 나오겠구나 싶었다. 앞으론 정말로 기태정의 심기를 거스르면 안 되겠다는 것도.

“그럼 이건?”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학습된 공포가 밀려왔지만, 미처 잠식될 틈도 없었다. 이번엔 기태정이 손수 판까지 들어 주며 시식을 종용한 탓이었다. 한쪽 무릎은 꿇고서 두 손으로 유리를 받쳐 든 자세만 봐선 꼭 프러포즈라도 하는 것 같았다.

세화는 머뭇거리며 유리판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엎드린 것도, 그렇다고 제대로 앉은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였다. 이젠 손으로 찍어 먹어도 될 것 같은데, 이렇게까지 들이미는 걸 보면 계속해서 핥으라는 뜻 같았다. 세화는 찜찜함을 숨기지 않은 채, 새가 모이 쪼듯 혀로 콕콕 찍어서 맛을 보았다.

“…아, 이건 확실히 최음제네요. 왼쪽부터 가하라, 카로나, 세링.”

“세링?”

“은어예요. 카로나를 정제해서 조금 더 약하게 만든 게 몇 가지 있는데, 개중 제일 잘나가는 약이에요. 술에 타기 좋고, 중독성은 상대적으로 덜 해서….”

그래서 잘 팔려요, 하는 뒷말은 어물쩍 삼켜 버렸다. 제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기태정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아는 분야 나왔다고 조잘조잘 떠들어 댄 게 거슬렸나? 민망함에 다시 눈을 내리깔았더니, 그가 구부린 검지로 이마를 톡톡 건드렸다. 저를 보고서 작게 미소 짓는 것도 같았다. 뭐야, 왜 갑자기 다정하게 만지고 그러지? 어쩐지 민망해진 세화는 기태정의 손이 닿았던 자리를 쓱쓱 문질렀다.

채찍과 당근을 번갈아 내리는 건 빚 대신 팔려 온 호구 길들일 때 자주 쓰이는 계책이긴 했다. 뻔하긴 해도 효과는 보장되어 있으니까. 지금 세화의 심정도 딱 그랬다. 기태정에게 뻥뻥 까이다 피까지 토해놓고선. 숨만 붙여놓으며 고통스럽게 할 게 분명하다고 덜덜 떨었던 게 불과 몇 분 전인데. 적선하듯 베푼 그의 손길에 아주 조금이나마 마음이 풀어지려고 했다. 이래서 못 배운 놈들은 못 쓴다고 하나 보다.

“심심하면 따먹으려고 데리고 다니는 건가 했더니, 그래도 생각보다는 제법….”

모순적인 서정에 젖어 있던 세화의 미간이 단박에 찌푸려졌다. 하우스 놈들과 별다른 것 없는 희롱이었는데, 저 좋은 목소리로 듣자니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어쩐지 더 민망하고 부끄러워진다. 일부러 상스러운 표현만 고르는 것 같기도 하고…. 아. 혹시 외모가 콤플렉스인 건가? 하긴. 군인이라기엔 너무 곱상하게 생겼으니까. 그래서 저렇게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저질스럽게 구는 걸지도 모르겠다.

“몸 바쳐 약이나 운반하는 짐꾼은 아니었다는 건 확실히 알겠고.”

“…….”

“김 소위가 이런저런 조합으로 약 말아 보라고 한 적 있지?”

“그게….”

“있어, 없어.”

어찌나 세게 붙들었는지 턱이 다 빠질 것 같았다. 기태정이 내쉬는 숨이 인중까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어린 게 못된 것만 배워선 자꾸 판돈 걸 타이밍이나 재고 있네?”

정신 차리라는 듯 기태정이 손등으로 뺨을 툭툭 올려붙였다. 때렸다기보다 건드리는 것에 가까웠지만, 이전에 당했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겁먹은 몸은 반사적으로 허물어졌다.

“멍청한 건 괜찮아. 어차피 몇 대 맞다 보면 다 익히게 되어 있으니까.”

커다란 남자의 손이 왕진 가방 안을 와르르 휩쓸더니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기다랗고 새카만 게 꼭 전선처럼 보였다. 이젠 목이라도 조르려는 걸까?

“그런데 어설프게 여기 붙을까, 저기 붙을까 고민하고 재는 거. 그건 안 돼.”

“이게, 뭐….”

“너 마취제도 잘 안 듣는다고 했던가?”

불길한 상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기태정이 이로 비닐 포장을 찢었다. 저게 뭘까. 마스킹 테이프? 절연 테이프?

“원래 군대가 온갖 놈들 다 모이는 곳이라서 너랑 비슷한 체질도 없지 않거든.”

기태정은 뒤에 붙은 접착지를 뜯어내고는, 정체 모를 검은 선을 제 목에 빙빙 둘러 감았다. 깔끔하게 갈무리해 주지 않은 탓에 봉합한 끝부분이 기다랗게 덜렁거려서, 꼭 목줄이라도 채운 것 같은 꼴이 되어버렸다.

“잠깐만요, 이거….”

더듬더듬 목에 두른 줄을 긁어 대는 게 거슬렸는지, 기태정이 세화의 손목을 억세게 움켜쥐었다. 고작 한 손으로 세화의 두 손을 전부 억누르고 있으면서도, 그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전투 중이라 응급 수술이라도 해야 할 때 마취가 안 듣는 부상자가 있으면 곤란하잖아.”

설마. 세화의 눈이 동그래지자, 기태정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네 추측이 정답이라는 듯이.

“그 패치 감고 있는 동안은 너도 무슨 약물이든 잘 받아들이게 될 거야. 물론 보통 사람보다는 투여량을 조절해야 하긴 할 테지만.”

벌어진 입 틈으로 기태정의 손가락이 불쑥 들어왔다. 손끝에 묻어 있던 가루들이 입천장에 길게 발렸다.

“으, 아으…!”

그 약들이 뭐였는지 떠올린 세화가 마구 도리질을 쳤지만, 애초부터 힘으로 기태정을 밀어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현대 의학의 정수를 느끼고 싶거든 군대로 오라는 말도 있잖아. 보건소에 구비된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잘 들을걸.”

흐으, 울음도 애원도 아닌 비명이 새어 나왔다.

“피부가 약하네.”

기태정이 혀를 차며 눈가의 생채기를 톡톡 건드렸다. 아까 얻어맞는 동안 안경이 날아가면서 생긴 상처 같았다. 위로라기엔 가볍고 장난이라기엔 진지한 손길이었다.

“이런 거 되게 갖고 싶어 했을 것 같은데. 하다못해 넌 치과에서도 마취 없이 진료 봐야 할 거 아냐.”

그건… 사실이었다. 성 안의 주민증이 탐났던 이유 하나기도 했다. 거기선 보건소에만 가도 온갖 특이 체질을 위한 의약품이 전부 갖춰져 있다고 해서. 환 안에서는 저 같은 사람이 쓸 수 있는 물건은 불법으로 구하는 수밖에 없었고, 변변치 않은 것도 방 한 칸 수준으로 비싸다고 들었다.

그래서 머리가 굵어진 이후로 세화의 소원은 고정되어 있었다. 제발 사랑니가 썩지 않기를. 차라리 배가 뚫린 거면 다 포기하겠는데, 치통 정도는 어떻게든 약을 구하고 싶어질 것 같았다. 고작 사랑니 때문에 여기서 빚을 더 얹게 되면, 그건 너무 서글프지 않을까? 그래서….

“공짜로 비싼 패치 붙여 줬는데. 감사하다고 인사는 못 할망정 사람 때리려고 들고.”

감상하듯 세화의 낯을 들여다보던 기태정은 볼일 다 봤다는 듯이 몸을 일으켰다.

“이거 씻겨서 사람 꼴로 만들어 놔. 특히 얼굴에 얼룩덜룩 바른 거, 깨끗이 지워 내.”

“예.”

“잠깐, 만요….”

“좋은 약 먹였으니 속은 적당히 괜찮아졌을 거고….”

어느새 다가온 군인들의 손에 붙들려 수갑이 채워지고, 몸이 불쑥 당겨졌다. 짐짝처럼 팔이 붙들렸을 뿐인데. 그런데 타인의 체온이 닿자마자, 그게 뭐라고 아랫배가 지글지글 끓기 시작했다.

“가하라, 카로나, 세링… 이라고 했던가?”

목 끝까지 단 숨이 차올랐다. 배꼽 안쪽에서부터 무언가 폭발하듯 들끓었다. 그건 조금 전의 폭력과는 전혀 다른 고통이었고, 세화로서는 여태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격통이었다.

“흐…, 으, 이거… 이거, 이상….”

“어, 이상한 거 맞아. 먹으면 질질 싸는 약인 거 너도 알면서 팔았잖아.”

한껏 감각이 예민해진 탓인지 살갗에 옷감만 스쳐도 바늘로 찌르는 듯 따가웠다. 이딴 걸 좋다고 빨아 대는 놈들이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괴로웠다.

“흐, 으읏….”

기태정은 어룽거리는 세화의 눈가를 퍽 애처롭다는 듯 쓸어 주며 웃었다. 물기를 머금은 탓에 짓눌린 상처가 따끔따끔했다.

“나쁜 짓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안 그래?”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