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 (4)화 (4/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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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4

    …자기? 꽃?

    지금 저더러 한 소린가? 세화는 적당히 반응할 말을 고르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덤덤하게 그딴 소리를 하니까 말의 내용은 조금 나중에야 인지할 수 있었다. 자기. 유명한 꽃…. 하우스 식구들이나 손님들이 지껄이는 음담에 비하면 제 낯이 다 홧홧해질 정도로 낯간지러운 부름이었고, 오히려 그래서 더 모욕적으로 느껴졌다.

    “하이고. 우리 기 이사가 아직 어리긴 어리네. 얼굴만 보고 사람 고르면 안 돼.”

    사장이 혀를 크게 차며 세화를 노려보았다.

    “조금만 더 두고 보다가 좋은 곳 보내 주려고 했는데, 저거 지금 믿는 빽 하나 생겼다고 아주 하고 다니는 게….”

    “좋은 곳이요.”

    남자, 기태정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사장의 말을 곱씹었다. 방금 몇 마디로 세화의 처지를, 아니 지금까지 살아온 생애를 전부 파악한 것 같았다. 세화는 늘 그랬듯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곧이다. 제아무리 지루한 모욕도 어쨌든 끝은 나게 되어 있다.

    “기 이사가 콕 집어서 쟤로 부탁하길래 붙여 주긴 하겠지만, 그래도 건드리지는 마. 요즘 군부 인사 하나 물고 갑자기 팔자 핀 새끼거든. 소위씩이나 되는 사람한테 트집 잡히면 골치 아파지니까.”

    그렇군요, 하고 기태정이 손에 끼우고 있던 시가를 튕겼다. 거의 새것처럼 보이는 담뱃대가 구정물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혹여 모시는 분께 오물이라도 묻을까 걱정됐는지, 뒤에 서 있던 놈 하나가 재빠르게 쓰레기를 수거해 갔다.

    일부러 멍하니 있던 세화의 미간이 일순 옅게 찌푸려졌다. 뭐지? 발을 뻗고, 허리를 숙이고, 물건을 줍는 몸짓. 누구라도 취할 수 있는 그 행동이…, 뭐랄까. 몹시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세화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슬쩍 들어 뒤를 살폈다. 아까까진 기태정에게 이목이 쏠려서 전혀 몰랐는데… 뒤에 선 다찌들의 바지 주름이 심상치 않았다. 갓 만들어진 걸 그 자리에서 주워 입었대도 저렇게 같은 곳에, 똑같은 형태로 주름이 잡힐 것 같진 않았다.

    단순한 사기꾼이라기엔 스케일이 제법 큰 놈 같았다. 부리는 놈들이 저 정도로 기합이 들어가 있는 걸 보면… 어디 용병이라도 되는 걸까? 조폭 새끼들이 아무리 서열 과시를 좋아한다고 해도 저런 각은 흉내 내지 못한다. 절도 있게 움직이는 것만 봐선 꼭 군인 같은,

    “아….”

    군… 인.

    무의식중에 어떤 단어를 떠올린 세화의 입에서 경악에 가까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 씨발 거…! 야, 삼월이! 너 기 이사 출근 첫날부터 띨띨하게 굴 거냐? 정신 똑바로 안 차려?”

    세화는 뒤늦게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입술을 세게 깨물었지만, 이미 바보 같은 목소리를 흘린 후였다. 사장은 속이 터진다는 듯 가슴을 팡팡 내리치며 질 낮은 욕설을 지껄였지만 그런 건 들리지도 않았다.

    군인…, 그래. 저 남자는 군인이다. 김 소위와 접선할 때 휘하의 군인들 하는 짓이 꼭 저랬다. 우산을 접을 때 일사불란했던 손의 각도라거나, 시가를 주울 때 몸을 굽히고 펴는 동작이라거나…. 왜 진작 눈치채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였다.

    척추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시야에 간신히 걸린 기태정의 입매는 이미 삐뚜름하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역시. 그는 조금 전 자신의 반응으로 어떠한 확신을 얻은 모양이었다. 세화는 괜히 목을 쓸며 긴장으로 크게 일렁이는 울대를 감췄다. 조금 전 사장이 뭐라고 했었지? 처음부터 저를 붙여 달라고 했던가.

    늦었다. 피할 수 없다. 이미 다 알고서 온 거였다. 저 수상한 남자는, 사장에게 공사나 치려던 사기꾼이 아니라. 김 소위와 약물을 유통했던 절 잡겠다고 작정하고서 잠입한 거였다.

    “그럼 인사는 이 정도로 하고…. 자기한테 사무실 안내 좀 부탁해도 될까?”

    어느새 세화의 곁으로 성큼 다가온 기태정이 허리에 손을 둘렀다. 말갛고 반반한 낯과는 어울리지 않는 느물느물한 행동거지였다.

    “내가 궁금한 게 많거든.”

    기다란 손가락이 허리춤을 간질였다. 휘파람 소리, 낄낄대는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수런수런 흘러나왔다. 기태정이 등장할 때 괜히 긴장했던 자신들의 모습을 지워 버리고 싶은 듯, 평소보다 훨씬 더 요란한 조롱이었다. 물론 분위기를 그렇게 몰아간 건 눈앞의 남자였다. 종교화처럼 생긴 사람이 저질스럽게 구니 파급력이 훨씬 더 컸다.

    피하지 말라는 듯 제 허리를 붙든 남자의 손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겉으로 보기엔 장난질이나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당장이라도 뼈와 살점을 뜯어낼 것 같은 무시무시한 악력이었다. 장난기 어린 시선이 땀이 송골송골 맺힌 세화의 이마와 엉망으로 떨리는 속눈썹을 훑고 갔다. 무서웠다. 세다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로 힘이 대단한 것도, 그리고 그걸 남들 앞에선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도록 위장할 수 있는 능력도.

    “앞으로 잘 도와줄 거지?”

    응? 하고 채근하는 목소리가 다정했다. 세화는 눈을 질끈 감았다. 기태정의 힘에 밀려 몸이 휘청일 때마다 발목에 시커먼 구정물이 감겼다. 몇 번이고 애썼던 보람도 없이, 신발은 물론이고 바짓단까지 흠뻑 젖어 버렸다. 그래도 조금은 다르게 살아 보겠다고, 꽃이 아니라 사람이 되고 싶다고 버둥거렸던 세화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

    “생각보다 멀끔한데? 불법 증축물치고는.”

    기태정이 구둣발로 사무실 바닥을 툭툭 찼다. 돈 좀 쓴다는 손님들이 오면 내어 주던 곳이라, 확실히 상태가 좋았다. 진짜인진 모르겠지만 바닥도 싸구려 타일이 아니라 대리석이었고, 벽지도 새것이었다. 외부 인사에게 주눅 들기 싫었는지 사장이 요 며칠 돈을 발라 둔 덕도 있었다. 그래 봤자 도박쟁이들의 미신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 금색 테두리를 두른 집기 같은 천박한 물건 몇 개를 들여놓은 정도였지만.

    세화는 입구에 오도카니 서서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창고에서 하우스 사무실까지, 그리 짧지 않은 거리를 함께 걷는 동안, 기태정은 한 번도 저에게 말을 붙이지 않았다. 그저 뭔가를 파악하려는 듯 독특한 내부 구조를 훑어보느라 바빠 보였다.

    언제쯤 운을 떼려는 걸까.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남의 하우스에 간자로 투입됐을 때도 이렇게 무섭진 않았는데…. 차라리 빨리 추궁을 시작했으면. 아는 걸 다 불라고 윽박지르고, 협박하고, 두들겨 패는 쪽이 차라리 속은 편할 것 같았다.

    “실례하겠습니다.”

    똑똑. 정중한 노크 후, 문이 열렸다. 아까 기태정이 버린 담배를 주웠던 그 남자였다.

    “준장님.”

    놈은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며 태블릿을 내밀었다. 준장? 허…. 이제 놈들은 정체를 숨길 생각도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 애초부터 그럴 의지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부르기 전까지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

    “예. 준비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준장이면 어느 정도지? 높은 사람이 맞는 것 같기는 한데. 주변에서 쉽게 듣기 힘든 계급이어서, 세화는 바닥의 무늬를 헤아리는 척하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일단 소위가 어느 정도인지는 안다. 소위 위로는 중위, 대위… 그리고….

    “내 위로 네 단계만 거치면, 국가 원수가 나오지.”

    지금 무슨 고민 중인지 다 안다는 듯, 기태정이 다정히 일러 주었다.

    “소위는 나보다 여섯 계단 밑이고.”

    이, 씨발…. 세화는 이를 악물었다.

    “참고로 내 전속 부관 계급이 소위야.”

    맺혀 있던 땀이 턱을 타고 주르륵 흘렀다. 소위가 어느 정도인지 안다는 건, 말 그대로 소위가 높은 계급이라는 걸 알고는 있다는 거였다. 소위 정도 되는 고위 인사에게 익숙해졌다거나, 그 지위를 실감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런데 저 남자는, 그 나이에 소위를 전속 부관으로 부리고 있다고? 다섯 손가락을 다 접기도 전에 위로 국가 원수가 나온다고?

    “얼굴이 왜 그 모양인가 했는데….”

    불쑥 다가온 큰 손이 뺨을 덮었다.

    “뭘 바른 거지?”

    매끄럽고 서늘한 살갗이 스프레이를 덕지덕지 펴 바른 피부 위를 문지르고 갔다.

    “색이 다른… 태닝, 스프레이 몇 개를….”

    목소리가 형편없이 달달 떨렸다. 누가 봐도 내가 수상한 놈이라고 광고하는 꼴이었다.

    “태닝 스프레이.”

    버릇인 모양이었다. 남이 했던 말을 덤덤하게 따라 하는 것은. 대단하다면 대단한 능력이었다. 고작 그것만으로도 세화는 제가 이 남자에게 무슨 실수를 했던가, 알아서 졸아붙은 채 되새김질하게 됐다.

    “으…, 흣…!”

    얼룩덜룩한 뺨 이곳저곳을 눌러 보던 엄지손가락이 불쑥 입 안을 침입했다. 심장이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든 세화는 고작 그 정도 폭력에도 화들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내가 누군지는 대충 다 알려 줬고. 아까 반응을 보아하니 굳이 자길 지목한 이유도 눈치채고 있는 것 같고….”

    “흐…!”

    총 혹은 칼을 숟가락보다 자주 들었을 단단한 손이 세화의 입천장을 유영하듯 문질렀다.

    “그럼 착하게 굴어야 고통 없이 끝날 거라는 것도 알 거고.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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