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177화 (177/178)

Chapter81. 영화제(1)

시간이 가면서 조금씩 윤곽이 드러났다.

기자나 평론가들의 가상 채점이 이어지면서 대략적인 수상 확률도 그려졌다.

가능성은 대략 60% 정도.

경쟁작인 ‘로드맨’과 많은 부분에서 비슷하거나 살짝 우위인 수치를 드러내고 있었다.

현지나 한국에서도 이를 기사화 하며 혹시 모를 수상에 조심스러운 기대감을 드러냈다.

“식전행사인가요?”

그런 흐름 속에서 날짜가 성큼 다가왔다.

영화제 본 막이 오르기 전의 행사.

경쟁부분 진출자들을 초대해서 커다란 파티를 여는 것이었다.

“몇 년 전부터 시작했는데 반응이 좋아서 계속 하는 모양이더라. 여기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최고 수준이라는 걸 증명하는 거지.”

“이 동네도 참 등급 나누기를 좋아해요.”

“어딜가나 안 그러겠냐.”

초대받는 사람들은 그 해의 스타들이다.

배우, 감독, 스텝들까지.

일종의 1등급 도장을 받는 거라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커리어가 되는 자리다.

진호는 이런 호화로운 파티를 선호하지 않았지만 거부 할 수는 없었다.

이 식전 파티가 영화제 결과로도 이어진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튼 가면 말조심하고. 너 꼬투리 잡으려고 혈안이 된 사람들이 널려 있어.”

“영화제면 그냥 영화 자체로 평가를 하면 되는데. 뭘 또 그렇게 따지는 게 많은지.”

“세상이 그렇게 순수한 건 아니잖냐. 엄한 소리 나와도 적당히 참고.”

행사에는 심사위원들도 참가를 한다.

해서 향간에서는 이 식전 행사가 일종의 로비가 아니냐는 의문을 품기도 한다.

실제로도 의문이 남는 수상도 있었고.

영화제 자체에서는 ‘공정한 수상’이라 주장하고 있지만 외부 시선으로는 수상쩍은 것이 사실이었다.

“오빠, 나 뒤에 지퍼 좀 올려줘.”

“······어.”

두루뭉술한 불만은 은서가 나오자 쏙 들어갔다.

행사에 맞춰서 맞춤 제작한 드레스였다.

몸에 딱 붙는 인어공주 타입이었는데 은서의 세련된 얼굴과 맞아 떨어져 굉장한 매력을 자아냈다.

“옷, 굉장히 잘 어울린다.”

“그래? 나름대로 힘 좀 줘 봤는데. 어울린다니까 좋네.”

“진짜 잘 어울려. 새삼 반했다.”

“······뭐래. 대표님도 있는데.”

“크흐흐흠. 나는 이만 들어가 보마. 준비되면 송학이 부르고.”

최현석은 눈치껏 빠져 주었다.

진호가 멍하니 은서의 뒷모습을 보다 그제야 깜짝 놀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하하. 뭐야, 오빠. 진짜로 홀린 얼굴인데?”

“좀 놀라서. 평소에도 예쁘다 생각했는데 오늘은 대단하네.”

“헤에. 의외로 이런 모습에 약하구나? 자주 입어야겠는데?”

“하하. 너무 자주 입진 말고. 이런 건 나만 보고 싶으니까.”

“방금 그거 100점 만점.”

은서가 몸을 돌려서 진호에게 가볍게 입을 맞췄다.

볼이 발그레한 것이 사랑스러웠다.

“드레스 잠깐만 벗어놓으면 안 되겠지?”

“안되거든.”

“아쉽네.”

다시 한 번 입맞춤을 하며 진호가 팔을 내밀었다.

은서가 기다렸다는 듯 팔짱을 끼며 몸을 붙여왔다.

은은한 향수 냄새가 풍겼다.

“가실까요, 아가씨?”

들뜬 발걸음이었다.

#

행사는 뉴욕에서 열렸다.

최고급 호텔 파티 홀에서 가장 비싸고 화려한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참여한 면면도 대단했다.

탑급 배우는 물론이거니와 세계적인 거장과 유명 아티스트들이 대거 참여했다.

행사 진행을 위한 DJ나 호스트도 역시 최고 수준이었다.

[오, 미스터 홍. 만나서 반갑습니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군요. 반가워요]

[당신을 눈앞에서 보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진호가 도착했을 때.

대화의 중심에는 그가 서게 됐다.

거장이나 명배우들이 그를 중심으로 둘러싸 인사를 건네고 사진을 찍었다.

“와. 오빠 인기 장난 아니다.”

“휴우. 그러게 말이다. 나도 이 정도 일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는데.”

“하하. 이건 당연한 결과입니다.”

익숙한 한국말에 진호와 은서가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반갑습니다, 서명한입니다.”

“아. 서명한 디렉터님? 영광입니다.”

그는 아트 디렉터 서명한이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넘어간 인물로, 미국 내 영화 시장에서 대단한 명성을 떨치고 있다.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지금의 성공까지.

자수성가로 유명한 인물이라 한국에서도 그의 자서전이 베스트셀러에 들곤 했다.

진호도 그의 이름과 얼굴은 익히 알고 있었다.

“제가 영광이죠. 이런 기회가 아니면 또 언제 진호 님의 얼굴을 보겠습니까.”

“그냥 편하게 진호라고 불러 주세요. 평소에 제가 많이 뵙고 싶었습니다.”

“기분 좋은 말이네요. 옆에는 배우 은서 양?”

“아, 네! 네. 은서라고 합니다.”

“화면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예쁘시네요. 부러워요, 진호 씨.”

“하하. 은서가 한 미모 하긴 하죠.”

가벼운 말에 분위기가 금세 풀렸다.

그는 오랫동안 해외 생활을 했음에도 발음이 정확했고, 성공한 자 특유의 오만함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치 동네 형 같은.

부드럽고 포근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이런 말 뜬금없긴 한데, 난 진호에게 큰 고마움을 가지고 있어.”

“제게요?”

“내가 미국에 건너와 이 일을 할 때는 지금처럼 분위기가 부드럽진 않았거든. 차별에 멸시에, 온갖 나쁜 것들이 넘쳐났어.”

“하긴 그 때는 그랬겠죠.”

“지금도 나아지긴 했지만 보이지 않는 벽은 여전해. 나 같은 경우도 아무리 애를 써도 넘을 수 없는 어떤 장애물을 항상 느끼곤 하거든.”

시대가 달라졌어도 잔재는 남아 있었다.

크게 성공한 서명한의 입장에서도 뚜렷하게 느낄 만큼.

“하지만 자네가 성공하면서 뭔가 달라졌어. 어떤 틀을 깬 거 같다고. 가끔 동료들끼리 모여서 얘기하면 그런 걸 느낄 수 있어. 더 이상 인종적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전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게 중요한 거야. 자네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기회의 창을 열어 준 거지. 고맙고 대견하고. 참 선배된 입장에서 후배에게 도움 받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그래.”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선배님 같은 분들이 먼저 길을 열어 주었기에 제가 마음 편히 연기 할 수 있었던 겁니다. 이 길은 우리가 만든 거죠. 저 혼자가 아니라.”

진호가 고개를 흔들며 서명한의 손을 부여잡았다.

살짝 눈시울도 붉었다.

“참······복이군. 자네 같은 사람이 태어났다는 것이.”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죠. 제한 없이 일 하고 한계 없이 표현 할 수 있는 장소가 되도록.”

“하하. 좋군, 좋아. 자자. 이러고 있지 말고 한 잔 하게나. 쓸데없이 화려하긴 하지만 술은 괜찮다고.”

서명한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술을 권했다.

그의 말대로 술맛은 좋았다.

#

파티는 격식 없이 진행되었다.

두루두루 이야기를 나누고 가볍게 술을 걸쳤다.

호화스러운 분위기 치고는 제법 건전한 형태였다.

[하하. 그건 곤란하지. 흐름에 동참하는 방식으로 수상작을 결정하는 건 안 될 말이야]

[흐름이라니 무슨 흐름? 영화적 질을 생각해서 선택하는 것에 문제라가 있나?]

[그 생각에 흐름이 반영되는 거라고. 정치적 옳음이 영화적 가치보다 우선해서는 안 돼]

하지만 늘 그렇듯 술이 들어가면 논쟁이 활발해진다.

가볍게 시상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생각해 보라고. 로드 맨은 사회적 풍자를 예술적으로 풀어낸 영화야. 시류에 편승한 영화와 비교 할 수 없다고]

[대체 어디가 시류에 편승했다는 거지? 인간 본연의 가치를 농밀하게 끄집어냈다고. 로드맨이 훌륭한 영화인 건 알지만 이번에는 이쪽에 손을 들어주겠어]

[그게 편승하는 거라고! 아시아 시장에 혹해서 너나 할 거 없이 좋은 말만 늘어놓고 있잖아! 그렇게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아!]

[이런 차별주의자 같으니!]

[뭐!?]

이내 찾아온 경비에 의해서 소란은 잦아들었지만 격론은 장내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후보작에 대한 평가였다.

“팽팽한 분위기더군.”

“심사위원 쪽 말인가요?”

“그쪽은 따로 언급을 안 하지만 두루두루 보면 알 수 있지.”

서명한이 넌지시 설명했다.

오랫동안 영화판에서 일 한 만큼 그는 여러 가지를 보고 들었다.

이번 시상식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

세간의 평가와는 다르게 주요 부분에서 두 영화는 매우 팽팽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오빠 쪽이 더 유리하지 않아요?”

“생각보다 그렇지가 않아. 한국 영화에 상을 수여하는 것이 불편하다는 말들이 많거든.”

“상은 상일뿐이잖아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많으니까. 특히, 경쟁작인 로드맨이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영화잖아. 상징성을 따져도 로드맨이 더 낫다는 평이야.”

시대를 대표하는 영화가 있다.

로드맨은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입까지의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런 만큼 그들의 자부심이나 상징이 깊이 녹아 있다.

그렇기에 개봉 당시 모두가 수상을 확신했던 것이다.

“수상이야 심사위원들이 알아서 하겠죠. 전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진호가 술잔을 내려놓고 발코니로 향했다.

신경 안 쓴다고 해도 주변에서 이렇게 얘기를 하다 보면 안 쓰일 수가 없다.

그도 사람이고 욕심이 있으니까.

[이곳에 혼자 있는 겁니까?]

[응? 아, 빌로우 씨]

심사위원 중 하나인 빌로우다.

70에 가까운 나이에도 정정한 인물로 영화판에서는 대단한 입김을 지니고 있다.

[찾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나눠볼까 해서요]

[직접 말입니까? 개인적인 이야기는 지양한다고 들었는데 말이죠]

[말만 그렇게 할 뿐입니다. 출연한 배우에게 직접 영화 내용을 듣는 것만큼 확실한 건 없죠]

그래도 될까 싶지만 심사위원이 직접 말하니 수긍 할 수밖에 없다.

빌로우가 진호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우선 영화적 포부에 대해서 듣고 싶군요]

[포부라면?]

[영화로 이루고 싶은 것 말입니다. 배우 개인의 생각도 충분히 가지고 있겠죠?]

[흠. 그런 거라면······기회의 창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영화가 성공하고 수상에 성공하면 어떤 상징이 될 테니까요. 누군가 제게 이런 시도를 해서 고맙다고 했어요. 우리에게는 어렵기만 한 것이 할리우드 시장이니 제가 선구자가 됐으면 합니다]

[선구자라. 그렇습니까]

거창하기는 하지만 잘못 된 건 없다.

첫 걸음을 내딛는 사람이 힘든 법.

진호는 자신이 선두에 서서 이끄는 역할이었으면 싶었다.

[역시 당신은 위험합니다]

[······네?]

[나는 오릭스 소속입니다. 이름 정도는 알고 있겠죠?]

[오릭스]

진호의 눈이 커졌다.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 없는 이름이다.

[나는. 우리는 당신들의 문화적 침략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치는 우리가 정해야 합니다. 동양의 배우가 들고 온 가치로 어린 세대로 혼동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군요]

[가치에 인종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 또한 우리가 정합니다. 예전부터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허니, 혹시나 하는 기대는 접어 두세요. 당신 영화는 절대로 수상 할 수 없습니다]

[지금 그 말. 시상식을 조작이라도 하겠다는 건가요?]

[필요하다면]

대놓고 이렇게 말하니 되레 말문이 막힌다.

[나는 이곳에 경고를 하기 위해 나왔습니다. 우리는 여럿이고 그만큼 의견이 갈립니다. 당신을 직접 처리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도 있죠]

[그린 헬 처럼 말입니까?]

[우아하지 못한 방법입니다. 그러니 적당 선에서 물러나세요. 당신은 당신이 상대 할 수 없는 존재에게 싸움을 걸고 있는 겁니다]

진호가 발코니 난간을 세게 움켜쥐었다.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른 탓이다.

빌로우가 쏟아내는 말이 아니라 그의 당연하다는 듯 한 태도 때문이었다.

대체 무엇이 그들에게 이런 오만함을 주는가.

[당신들도 시작은 초라했습니다. 이제 와서 타인에게 이런 말이라니. 우습기 짝이 없군요]

[후회할 겁니다]

[옳은 것을 하는데 후회는 없습니다. 만약 후회를 하게 된다면 그건 아마도 당신들이겠죠]

[바위에게 계란을 던지려 하는군요]

[왠지 계란으로도 충분히 깨질 만큼 바위가 약해 보여서요]

빌로우는 답을 하지 않은 채 진호만 물끄러미 봤다.

그리고는 한 걸음 물러나 차갑게 말을 마무리 했다.

[어리석은 종자 같으니]

이것이 아마도 본모습일 것이다.

지독한 차별과 오만을 그럴듯한 겉모습으로 숨기고 있는 인물.

[누가 어리석은지 지켜봅시다]

이런 사람에게는 굴복하고 싶지 않다.

진호의 각오가 더 단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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