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175화 (175/178)
  • Chapter80. 돌 위에 핀 꽃(1)

    영화는 흥행가도를 달렸다.

    순식간에 10억불을 돌파하고 손익분기점을 박살내 버렸다.

    동시개봉에 포함되지 않았던 여러 나라에서 개봉 허가가 떨어지고 추가적인 활동이 이어졌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스크린 순위 1위를 차지하며 힘을 자랑했다.

    그야말로 순풍을 탄 돛단배였다.

    “이래도 허가를 안 해주네.”

    “해주겠냐. 자기들 마음에 안 들면 모조리 막아버리는 나라인데.”

    그 와중에도 중국만큼은 개봉을 불허했다.

    내부에서도 개봉에 대한 열망이 높아지고 있는 게 분명한데, 들은 척도 안 했다.

    중국의 사상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너무 신경 쓰지 마. 중국시장 없다고 영화가 망하는 것도 아니잖아. 이미 10억불도 넘었고.”

    “이래봐야 저들만 고립 될 뿐이야. 이런 폐쇄적인 방식으로 좋은 영화 산업을 일굴 수 있을까? 적어도 왕 호룽 형님은 이런 기조를 탈피하고자 했는데.”

    “자정활동조차 없다 이거지.”

    고여 버린 물은 썩기 마련이다.

    내수시장이 엄청난 중국이기에 당분간은 티가 안 날 뿐. 결국 세계 전체와 비교하면 그들도 일부에 불과하다.

    오로지 자기만이 잘났다는 사고는 고립과 병폐를 불러 올 뿐이다.

    “이러면 앞으로의 활동에서도 중국은 제외해야 하나?”

    “입국 제한까지 걸린 건 아니지만······환영은 안 해 주겠지. 중국에서 입장을 바꾸기 전까지는 어려울 거야.”

    “고약하네.”

    J.H를 만들며 아시아 통합 미디어 회사를 꾸리겠다는 계획은 이미 어그러졌다.

    아시아 시장 중 최강인 중국을 배제하고 독단적인 노선으로 가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어쩌면 지금은 한 발 물러나 관망 할 시기일지도 모르겠다.

    우우웅—!

    “······어?”

    “왜, 오빠?”

    “이 번호. 황천의 직통번호인데?”

    어쩌면 아닐지도.

    진호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

    비밀스럽게 움직였다.

    많은 사람이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시선을 피해 공항까지 움직이고 전용기로 중국 땅을 밟았다.

    “······형님.”

    “왔군.”

    그곳에서 파리한 안색의 왕호룽을 만났다.

    기계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지만 의식은 제대로 돌아와 있었다.

    “걱정 많이 했습니다.”

    “이야기는 들었다. 고생이 많았겠어.”

    “저야 할 일을 했을 뿐이죠. 형님이야말로 죽을 고비를 넘기지 않았습니까.”

    “흐. 아직 안 죽은 거 보니 하늘이 날 완전히 버린 건 아닌가 보다.”

    그래도 씩 웃는 모습이 어느 정도는 회복한 기색이었다.

    “보아하니 지금 막 깨어나신 건 아닌 거 같은데요?”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여야 한다. 옛 고사에도 잊지 않나. 불가피하게 그리 되었네.”

    “괜찮습니다. 형님을 주시하는 눈도 많았을 텐데, 잘 하셨습니다.”

    그리 조심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독대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왕호룽의 심계가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는 대복이다.

    “오늘 이리 부른 건 내 상태를 알려주기 위함도 있지만, 한 가지 맡기고 싶은 일이 있어서네.”

    “가벼운 일은 아니겠군요.”

    “그렇지. 나대신 한 사람을 만나서 설득을 좀 해줬으면 하네.”

    “누구를 말입니까?”

    “쥐옌 이라는 남자네. 최고 간부 중 한 명이며 나와는 사상적으로 합치를 본 인물이지.”

    왕호룽 옆, 비서가 파일을 넘겨주었다.

    그 안에는 쥐옌이라는 인물의 얼굴과 출생신분 등이 모조리 적혀 있었다.

    “현재로서는 유일하다고 할 수 있는 개혁파네.”

    “개혁파가 있어요?”

    “굳이 말하자면 그렇지. 현 중국의 정세를 누구보다 명확하게 꿰뚫고 있는 인물이네. 이대로 폐쇄적인 정치구도가 굳어지면 결국 패망의 길임을 인지하고 있는 거지.”

    공고해 보이는 중국이지만 그 안은 폭풍이다.

    격렬한 정쟁과 파벌싸움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고 있는 중.

    쥐옌의 그 첨단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제가 뭘 하면 되는 겁니까?”

    “그를 설득시켜 주게나.”

    “제가 말입니까?”

    “자네밖에는 없어. 그와 나는 개혁에 찬성하는 입장이나 방식이 달라. 문화의 역량을 낮게 보고 있지. 폐쇄적인 기조를 바꿀 생각이 없네.”

    “이번 영화 말이군요.”

    “그래. 그 영화가 본토에서 개봉하면 많은 것이 달라질 거네.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당도 반대를 하는 것이겠고.”

    왕호룽은 진호의 영화를 그 자신보다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본디 큰 바위는 작은 균열에서 무너지는 법. 고작 영화 한 편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불씨를 지필 수 있는 것이다.

    “가서 그에게 영화의 힘을 피력해 주게나.”

    “하지만 이미 중국의 입장은 확고하잖아요. 이걸 뒤집을 수 있을 것 같진 않은데요?”

    “아니네. 겉으로야 통일된 의견 같지만 꽤 많은 반향이 있네. 영화 상영 금지에 대해서 생각보다 강한 반발이 일고 있어.”

    당연한 말이지만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하게 하면 불만이 생기는 법이다.

    전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는 영화를 자신들만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상당히 큰 불만으로 다가왔다.

    “······해 보겠습니다.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후후. 자네라면 잘 할 수 있을 거네. 그리고 일이 성공해서 개봉이 성사된다면 여러 가지로 달라지겠지.”

    “회사라면 이미 쪼개졌습니다만.”

    “상관없네. 이제 와서 황천으로 창천을 찾는 건 포기했어. 대신 자네가 모난 정이 되어 이 나라를 좀 호되게 후려쳐 줬으면 하네.”

    “제가 무슨 수로 말입니까?”

    “보여주면 되는 거네. 자네가 더 높은 곳으로 날아가 우러러 보기만 하던 서구의 영화 산업 속에 발을 디디는 거지. 그럼 우매한 이들조차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게 될 거네······쿨럭! 쿨럭!”

    “혀, 형님!”

    “괜찮아, 괜찮아. 말을 너무 많이 했을 뿐이네.”

    비서가 옆으로 다가와 호흡기를 다시 꺼냈다.

    목숨을 건졌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많은 요양이 필요한 상태였다.

    “후우. 후. 그럼 자세한 내용은 이 친구에게 전해 듣게나.”

    “알겠습니다.”

    “너무 많은 걸 지게 해서 미안하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형님께는 이미 충분히 많은 걸 받았습니다.”

    “후후. 나라는 달라도 자네와는 말이 통해서 좋아.”

    왕호룽이 한 번 씩 웃고는 호흡기를 착용했다.

    쌕쌕, 거리는 호흡 소리가 이어졌다.

    진호는 짧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료. 더 있습니까?”

    할 일이 많았다.

    #

    쥐옌은 전형적인 실리주의자였다.

    득이 되는 일이라면 전통이나 관습 따위는 쉽게 버릴 수 있는 성격이었다.

    게다가 일을 함에 있어서 바로 앞의 것보다 멀리 있는 걸 보기를 선호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이 그의 곁으로 모였다.

    젊고 깨어있는 이들.

    현재의 중국 정치판을 바꾸고 싶어 하는 무리였다.

    “거절합니다. 불가능한 요구군요.”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쥐옌은 몰래 온 손님의 제안을 단번에 거절했다.

    그것도 능숙한 한국말로.

    “왕 형님은 쥐옌 님이 유일한 희망이라 생각합니다. 이대로 폐쇄적인 정치 노선을 보인다면 끝이 안 좋을 거라 생각하십니다.”

    “의견에는 찬성하나 방식은 아닙니다. 영화 개봉을 위해서는 넘어야 할 난관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고작 영화 하나 때문에 그 많은 고난을 사서하고 싶진 않군요.”

    “고작 영화 하나가 아닙니다. 문화는 그 어떤 것보다 영향력이 높습니다. 영화가 중국인 전체의 의식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충분히 도전 해 볼 만 일이지 않습니까?”

    “하하. 과대망상이 심하군요. 영화 한 편 본다고 평생 동안 교육받은 내용을 손바닥 뒤집듯이 바꾸진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바꿀 마음이 있는 사람은 바꾸지 않겠습니까. 전체라고는 말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일부라도 효과가 있다면 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

    진호는 일부러 전체에서 일부로 단위를 낮췄다.

    실리주의자에게는 영화 개봉이 겪어야 할 난관보다 더 많은 가치가 있음을 설득해야 했다.

    “왕 회장님도 그렇고 당신도 꽤나 허황된 것을 믿고 있군요.”

    “허황된 것조차 쫓지 않으면 대체 무엇을 바꿀 수 있단 말입니까? 허공에 소리치는 공허한 목소리가 변화를 가져올까요?”

    “······그건 불쾌한 발언이군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알아주셨으면 하는군요. 문화의 힘은 쥐옌 님의 생각보다 거대합니다. 정말로 현 중국의 노선을 바꾸고 싶다면 도박수를 걸어 볼 정도의 용기는 있어야겠죠.”

    쥐옌의 눈이 가늘어졌다.

    싸구려 도발에 넘어 갈 성격은 아니나, 진호의 말에 흔들리는 건 사실이었다.

    정치에 입문하고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무엇 하나 바꾸지 못한 것도 사실이고.

    “만약. 만약 당신 말대로 영화를 개봉했다고 칩시다. 이 일로 더 많은 혼란이 찾아오면 어찌 할 생각입니까?”

    “혼란은 기회라고도 하죠. 중국은 넘치기 직전의 찻잔과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저 숨죽이고 진실을 외면하고 있을 뿐. 누군가 선두에 서면 일제히 일어나 따라갈 것입니다.”

    “내란이라도 일으키기를 바라는 겁니까?”

    “변화죠. 멈춰있는 물은 썩는다. 하지만 흐르는 물은 언제나 맑다.”

    “······흠.”

    고작 영화 하나.

    분명 그럴 텐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흔들린다.

    쥐옌은 그것이 눈앞의 있는 남자, 진호의 힘임을 눈치 챘다.

    그의 목소리에는 호소력이 있고 눈빛은 강렬해서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만약 이런 사람이 정치를 한다면 능히 일국을 뒤집어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좋습니다. 설득되고 있는 걸 부정하기는 어렵군요.”

    “그럼 개봉이 가능한 겁니까?”

    “그건 확답 할 수 없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움직인다고 한들 당의 반대가 거칠면 한 발 물러나야겠죠.”

    “이해합니다. 진인사대천명이라. 최선을 다하면 그 뒤로는 하늘에 맡길 뿐이죠.”

    두 사람은 짧게 악수를 한 뒤 흩어졌다.

    긴 말도 부연 설명도 필요는 없었다.

    #

    남은 건 기다리는 일 뿐이었다.

    중국 쪽 소식통에 귀를 딱 열어놓고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기소 절차가 마무리 되었다고 하더라.”

    그리고 그 사이 밀렸던 일의 결과가 나왔다.

    “어떻게 됐는데요?”

    “일단 명예훼손과 사기죄로 기소가 되긴 했어. 근데, 윗선을 잡아 낼 것 같진 않더라.”

    “꼬리 자르기인가요?”

    “아무래도 그렇지. 자금을 추적해 보고 있다는데 그리 희망적이진 않나 봐. 그냥 부부와 회사 직원들 선에서 끝날 거 같아.”

    아쉬운 결과였다.

    윗선을 따라 올라가 황천과 묶을 수 있으면 이걸 가지고 여론전도 가능했다.

    여기서 끝나면 말 그대로 개인의 일탈 수준에서 마무리가 되는 것이다.

    “그래도 이번 일로 허튼 짓 하려는 놈들은 줄어 들 거다. 이렇게 반격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테니까.”

    “본보기 보인 걸로 만족해야겠네요. 어차피 중요한 건 중국 내부의 반응이니.”

    “그 쥐옌이라는 사람 말이냐?”

    “네. 결과가 좋게 나오면 중국에서도 영화를 개봉 할 수 있을 겁니다.”

    타이밍상으로 좋다.

    북미와 다른 직역 상영이 마무리 시점이니 중국에서 개봉하면 그쪽에만 집중 할 수 있다.

    “중국 개봉하면 20억 불 가능하려나?”

    “20억이라. 상상도 못 해 본 금액인데.”

    “사실 돈 자체는 크게 중요하지 않죠. 시장을 여는 것에 의의가 있으니.”

    “아니, 그건 아니지. 20억불은 상당히 상징성이 커. 후에 너 영화제에 후보로 오른다고 해도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 할 순 없을 걸?”

    “아. 영화제.”

    “염두에는 두고 있으라고. 올해는 네가 싹쓸이해야 하니까.”

    생각하지 않았던 단어에 진호가 고개만 끄덕였다.

    영화제.

    가슴 뛰는 단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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