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78. 불매운동(2)
진호는 여느 날처럼 회사로 출근했다.
가볍게 커피 한 잔을 하고 회사 짐에 들러서 아침 운동을 했다.
땀 흘리고 나면 그제야 하루가 시작하는 기분.
한 시간 가량 땀을 운동하고 나와, 빵과 닭 가슴살 따위로 아침을 때웠다.
아직은 몸이 회복되지 않은 터라 식단을 관리하고 있었다.
“흐아아암. 진호 샘. 먼저 나오셨네요?”
그렇게 간단한 아침 루틴을 마치고 휴게실에 앉아 있자 눈을 비비며 세미가 다가왔다.
최근에 드라마 하나에 캐스팅 되어 1사옥으로 출근을 하고 있었다.
“굿모닝. 잠은 잘 잤니?”
“어제 늦게까지 대본 읽느냐고 설쳤어요. 이번 드라마 어려운 말이 너무 많아요.”
“선생님이 좀 도와줄까?”
“네! 안 그래도 표시해 뒀어요.”
기다렸다는 듯 쪼르륵 와, 진호 앞에 앉았다.
손에 쥔 대본은 이미 몇 번이나 봤는지 너덜너덜했다. 오색찬란하게 그어 놓은 밑줄도 너덜너덜함에 한 몫 더하고 있었다.
“당신의 가슴이 붉게 물든 다면 나는 낙화요. 이게 어려운 거야?”
“네. 작가님이 설명을 해 주셨는데도 잘 모르겠어요.”
“흐응. 확실히 네게는 아직 어려운 내용일지도 모르겠다. 이건 앞 뒤 상황을 잘 봐야 해.”
진호가 차근차근 대본을 풀어서 설명해 주었다.
사랑하는 사람간의 복잡한 마음을 담고 있었기에 세미가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헤. 좋으면 좋다고 하면 되는데. 왜 이럴까요?”
“사랑을 흔히들 달콤 쌉싸름하다고 하잖아. 좋지만 밉고, 밉지만 사랑하는. 그런 거야.”
“어려워요.”
“이건 경험만이 답을 해 줄 수 있을 거야. 그래도 잘 됐네. 간접적이나마 배역으로 이를 경험한다는 건 좋은 일이야.”
“그런가요?”
“후에 사랑을 하게 되면 네가 무엇을 놓치고 무엇을 잘못 생각했는지 보다 선명하게 알 수 있을 거야.”
경험이 가장 좋은 선생이다.
아무리 진호가 훌륭한 가르침을 선보인다고 해도 몸으로 체득하는 것만 못하다.
“으. 이번 드라마 잘하고 싶었는데.”
“하하. 부담가질 필요는 없어. 넌 아직 어려. 네게 사랑의 복잡미묘한 감정을 요구하는 사람을 없을 거야. 순수한 마음 그대로 표현하면 돼.”
“그냥 제가 생각하는 그대로요?”
“그래. 배역도 순수한 여고생이잖아.”
가끔은 모자람을 숨기지 않는 것이 더 좋을 때가 있다. 굳이 있는 척 자신을 포장하지 않는 것이 매력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결국 알게 돼. 거짓으로 동여맨 포장은 벗겨지기 쉬운 법이야. 알맹이에 든 것이 없다는 걸 모두가 알게 됐을 때. 남는 건 부끄러움뿐이거든.”
“진실이 최강이다! 이거군요.”
“많은 경우에.”
진호가 부드럽게 웃으며 세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이를 먹고 세상 풍파에 녹아나다보면 결국 거짓으로 자신을 감싸는 법을 알게 된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쉬운 포장보다 어려운 진실.
무엇이 더 값진 것인가를 먼저 배워야 한다.
그래야 가장 필요로 할 때 자신을 숨기는 것 대신 드러내는 걸 선택 할 수 있다.
“오랜만에 연기 연습이나 같이 해 볼까?”
“네!”
사제는 어느새 닮아 있었다.
#
영화 초반 성적은 어마어마했다.
순식간에 국내 300만을 돌파하고 해외에서도 이례적인 수준의 성적을 거뒀다.
게다가 이건 초반의 이야기였다.
영화에 대한 요구는 계속 늘어났고 관은 지속적으로 확장했다.
입 소문이 소문을 낳고, 소문은 사람을 불러왔다.
홍콩 시위에 대한 뜨거운 여론과 맞물려서 영화의 흥행 또한 뜨겁게 타올랐다.
몇 몇 전문가들은 이 영화가 세계적인 기록을 갈아치울 수도 있다는 견해를 내어 놓았다.
물론 조건은 달려 있었다.
중국 개봉이 가능했을 때.
“지금 상황에서는 무리겠네.”
커피를 홀짝이며 진호가 중얼거렸다.
블루 아이 회사 앞으로 가득 모인 시위대를 보며 하는 말이었다.
‘정치적 영화는 멈춰야 한다!’
‘중국에 대한 혐오 조장을 그만 두어라!’
‘하나의 중국! 우리는 전력으로 투쟁한다!’
등의 플랜카드가 눈에 띄었다.
“최근 들어서 숫자가 늘지 않았나?”
“늘었지. 본국에서 요구한 걸지도.”
“이걸 가지고 이렇게나 물고 늘어지다니. 정부나 영등위에서 아무 말 없는 게 신기할 노릇이네.”
“전에 한 바탕 했잖아. 같은 방식으로 물고 늘어지면 자기들도 위험한 걸 아는 거지.”
게다가 정부가 압력을 넣으면 정말로 정치 싸움이 돼 버리는 것이다.
아예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이 현명했다.
“에잉. 사람들 오고가는데 흉흉하게. 신고하면 어떻게 정리가 안 되려나?”
“듣기로는 신고한 집회래. 당장 해산한다고 쳐도 또 금방 모일 거야. 영화가 마무리 될 때 까지는 그냥 감수하고 가야지.”
어차피 여론전에서 불리한 건 중국이었다.
백날 시위를 해 봐야 대중이 보는 건 강제적인 노동력 동원에 불과했다.
이걸 정말로 시위라고 보는 사람은 없었다.
“걱정이라면 본질이 흐려지는 경우인데.”
“본질이 흐려지는 경우?”
“가장 저열한 수단이지. 사람들의 눈을 다른 쪽으로 돌리면서 비난하는 거야. 본질과는 상관 없는 방식으로.”
“이해가 안 가는데?”
“예를 들자면······”
“안 돼!!”
진호가 설명을 이어가려는 찰나.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휴식을 즐기던 회사 직원이었다.
“겨, 경찰! 빨리 경찰 불러주세요!”
그녀는 다급하게 외치며 창밖을 손으로 가리켰다.
조금 전까지 진호가 시선을 두고 있던 시위대 부근.
“저······미친! 지금 뭐하는 짓이야!?”
시위대와 낯선 무리 가운데 어린아이가 끼어버린 것이다. 시선을 뗀 건 잠깐 뿐이었는데 그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져 버렸다.
진호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형! 경찰에 신고부터 해요!”
그는 곧바로 아래층으로 달려갔다.
#
상황은 꽤 다급했다.
시위대와 낯선 무리 사이에 끼인 아이는 워낙 체구가 작았던 터라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나마 위에서 내려다보던 직원이 먼저 반응을 했던 것.
“거기 멈추세요! 중간에 아이가 있어요!”
“어? 뭐야? 홍진호다!”
“홍진호다! 진짜야, 진짜!”
움찔, 하고 멈췄던 이들이 일제히 움직이려 했다.
진호는 아차 싶었지만 지금은 일단 이들을 제지하고 봐야 했다.
“다들 멈춰요!”
배에 힘 딱 주고 소리쳤다.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멀찍이서 걸어가던 다른 시민까지 돌아봤을 정도였다.
코앞에서 웅성거리는 시위대는 당연히 귀가 찌릿할 정도로 들었다.
“옆에 좀 봐요. 애가 중간에 끼어있지 않습니까.”
진호가 손으로 아이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그제야 엉겨 붙어 있던 시위대가 조금씩 물러나기 시작했다.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아이의 모습이 드러났다.
“뭐, 뭐야? 언제부터 있었는데?”
“너 봤어?”
“내가 저걸 어떻게 봐? 저기 저 이상한 사람들이 갑자기 우리한테 달려와서 정신이 없었잖아.”
“그래! 우린 죄 없다고!”
시위대는 아이를 살피기보다 일단 변명하고 봤다.
갑자기 다가온 다른 무리가 잘못이라는 듯.
“다들 비켜요. 애부터 살펴야지, 이게 무슨 짓입니까?”
결국 진호가 직접 가서 아이를 살폈다.
몸을 웅크리고 덜덜 떠는 모양새가 제대로 겁은 먹은 것 같았다.
“애야, 괜찮니?”
“······”
“부모님은? 혼자서 여기에 온 거야?”
아이는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 쉽사리 답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겁을 먹어서 패닉에 빠진 것 같았다. 진호가 품에 꼭 안고는 폰을 꺼내 들었다.
구급차라도 부를 요량이었다.
“아, 아이고 윤수야!”
그때, 무리 뒤편에서 중년 여자가 뛰어나왔다.
큰 걸음으로 달려와서는 진호를 팍 밀치며 아이를 잡아챘다.
“······아이 어머니 되십니까?”
“당신 뭐에요? 우리 윤수에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진정하세요. 제가 이런 게 아니라 시위대에 엉키면서 다칠 뻔 한 걸 제가 구한 겁니다.”
“대체 뭔 소리에요? 우리애가 왜 그런데 엉킵니까?”
“그건 이쪽 분들하고······”
시위대 반대편.
갑자기 나타났던 이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하지만 제대로 지목도 하기 전.
이들은 빠른 속도로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어찌 잡을 틈도 없었다.
이내 사람들 속으로 스며들어가 자취를 감춰 버린 것이다.
“뭐야 이거?”
“이봐요! 그건 내가 할 말 아닙니까? 우리 애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런 꼴을 당하는 겁니까?”
“아니, 어머니 잠깐 진정해 보세요.”
“진정하긴 뭘 진정해요! 여기 꼴 보니까 당신 때문에 일어난 일 같은데!”
“······무슨 소립니까?”
“하이고, 내가 모를 줄 압니까? 여기 이 사람들. 당신 영화니 뭐니 반대한다고 모여 있는 거잖아요. 괜히 엄한 짓해서 우리 애 다치게나 하고! 이거 어떻게 보상 할 겁니까!?”
진호가 순간적으로 멍한 얼굴을 했다.
중년 여자의 말이 한 번에 와 닿지 않은 것이다.
‘······대뜸 이렇게 나온다고?’
아이가 군중에 섞여서 겁을 먹었는데 시작점이 이상하다.
진호가 입술을 잘근 씹었다.
“설마 이런 식이라고?”
순식간에 흩어진 무리.
때 맞춰 나타난 아이의 어머니.
마치 잘 짜인 판 위에서 놀아나는 병정이 된 느낌이다.
‘내가 나올 줄 알았던 거야.’
출근 시간, 커피 마시는 휴식 시간, 개인적인 성향.
모든 걸 간파하고 판을 짰던 것이다.
“내가 아는 기자가 몇 명이나 되는 줄 알아! 당신 큰일 난 줄 알라고!”
“······”
본질과 상관없는 방식으로 호도한다.
스스로 말 한 것에 걸려들었다.
진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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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은 진호의 걱정대로 흘러갔다.
대체 어디서 쏟아져 나오는 건지 모를 증언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말인즉슨, 시위대와 시위 안티들이 싸움을 벌이며 엄한 아이가 다쳤다는 것.
그리고 중간에 개입한 진호는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내용이다.
회사와 진호는 곧바로 반박 기사를 냈다.
하지만 아이가 다쳤다는 중년 여자의 인터뷰가 기사를 타면서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시위를 한 시위대나 엄하게 개입한 무리가 욕먹는 게 아닌 괜한 진호가 욕받이가 된 것이다.
“이거 법적으로 처리해야 합니다.”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야. 우리 때문에 아이가 다친 상황인데 차갑게 나가면 좋지 않아.”
“왜 우리 때문에 아이가 다친 겁니까? 진호는 아이를 구하려고 한 건데.”
회사에서도 논쟁이 이어졌다.
법적으로 대응하자는 사람들과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자는 쪽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진호야 너는 어떻게 하고 싶냐?”
하지만 결국 결정권은 진호의 것이었다.
“대표님. 그때 그 시위대와 붙은 무리 말이에요. 너무 공교롭지 않아요?”
“누가 사주한 거 같냐?”
“아무 말 없이 흩어진 것도 그렇고, 사건 이후로 흔적도 없잖아요.”
“하긴. 이 정도 상황이면 누가 하나 나올 만한데.”
본질을 호도하는 방법.
메신저를 공격해서 그 메시지를 흐리는 것이다.
진호의 이미지가 나빠지면 영화의 가치 역시 흐려질 수밖에 없다.
“일단 최대한 도의적으로 대응해요. 상황이 어떻든 아이가 다친 것에 대해서는 전부 책임을 지겠다고.”
“끄응. 억울하지도 않은 거냐?”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불리해요. 일단은 책임지는 모습을 나서고, 뒤에서 그 사람들 좀 찾아봐요.”
“시위대와 붙은 놈들?”
“네. 카메라든 뭐든 흔적이 남았잖아요. 한 놈이라도 잡아서 상황을 캐보면 뭐가 나올 겁니다.”
이런 저열한 수법에 손 놓고 당할 수는 없다.
“그 동안은 제가 탱킹 좀 할게요.”
반격을 위해 몸을 수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