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170화 (170/178)
  • Chapter77. 마지막 한 조각(2)

    스텝들이 먼저 모여 촬영장을 세팅했다.

    주변을 통제하고 필요한 소품을 동원했다.

    한 쪽 팔이 부러진 허수아비나 무너진 짚단 등은 분위기를 더 살리기 위한 소품이었다.

    “준비 끝났습니다.”

    “오케이. 잠깐 대기하고 있어.”

    “바로 촬영 들어가는 거 아닙니까?”

    “안에서 감정 조절 중이야.”

    스텝 중 하나가 트레일러를 손으로 가리켰다.

    중요한 씬인 만큼 촬영장의 모두가 배우를 배려했다.

    “흐흐. 이거 기대가 되는구만. 진호 그 친구가 또 어떤 연기를 할지.”

    “우리도 힘 빡 주고 해야지. 고 어린 놈에게 밀리고 그러면 못써.”

    “흐흐흐. 이 나이 먹고 연기하는데 두근거리는 감정, 참 오랜만이여.”

    마을 사람 분의 조연들이 도란도란 이야기했다.

    그들도 이번 씬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에 나름의 긴장을 느끼고 있었다.

    “알 베르노도 안에 있나?”

    “그쪽도 집중 중이지. 오늘이 마지막 촬영이니까 힘 제대로 주고 있을 거야.”

    “크. 성격은 마음에 안 들어도 연기는 제대로야. 서툰 한국어로 그렇게 연기 뽑아내는 거 보면 신기하다고.”

    “괜히 상 탄 배우가 아니라니까. 그 정도 급은 되어야 진호랑 합을 맞추지. 아니었으면 우스웠을 거야.”

    “그려, 그려. 쌈질도 합이 맞아야 하는 거라고. 흐흐. 이번에 아주 그냥 제대로 영화 한 편 나오겠어.”

    긴장감 속에서도 웃음은 여전했다.

    다들 오랜 시간 연기를 해 온 만큼 이번 영화의 퀄리티를 대충 견적내고 있었다.

    역작은 촬영 할 때부터 역작이라는 느낌이 온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이번 씬만 제대로 소화 할 수 있다면 아마도 굉장한 작품이 나올 거라 확신했다.

    “아, 저기 나오는구만.”

    “······워매. 눈빛 봐라.”

    트레일러 문을 열고 나오는 진호.

    그 모습에 배우들이 수군거렸다.

    착 가라앉은 진호의 눈빛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결연함이 깃들어 있었다.

    순간 압도 될 정도의 강렬함이었다.

    “우리도 단디 해야겄어.”

    “그러게. 대충 하다가는 체면치레도 못 혀.”

    “후우. 힘내서 해보자고.”

    “암. 명색이 선배아니냐. 후배 보기 부끄럽지 않게는 해야지.”

    조연들도 각오를 다잡았다.

    촬영장에 전운이 감돌았다.

    #

    진호, 아니 석우는 천천히 걸었다.

    엉망으로 얻어맞은 안톤이 바닥을 기고 있었다.

    주변에 보이는 건 몽둥이를 든 마을 사람들.

    숨이 턱하니 막혔다.

    “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마치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여기 오는구만. 우리 석우 아새끼. 그래, 덕분에 이 망나니 새끼 잘 조졌다.”

    “낄낄. 이 잡종 놈의 새끼는 쳐 맞으면서도 자기가 왜 걸렸는지를 몰랐어.”

    “친한 친구가 자기를 배신 한 것도 모르고 말이야.”

    “아니야······”

    몇 걸음 되지도 않는 거리인데 너무 멀게 느껴졌다.

    한 발 한 발 떼는 것이 고역이었다.

    피 흘리며 쓰러진 안톤이 눈에 틀어박혀 숨통을 조여왔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분명 약속했잖아요. 안톤이 엄한 일 못하게 할 테니 해를 끼치지는 않는다고.”

    “기르던 개가 사람을 물면 그냥 물 끓이는 거야. 먹여주고 재워줬더니 은혜도 모르고.”

    “은혜? 그걸 은혜라고 부릅니까?”

    “왜? 네놈 새끼도 여기 잡종 놈처럼 뒤지게 맞고 싶어?”

    “난······”

    덥석.

    울분을 토하려던 석우의 발을 안톤이 잡았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희미한 숨 속에서 어떻게든 손을 뻗은 것이다.

    “아, 안톤.”

    “······”

    “아니야. 난 너를 배신하려 했던 게 아니야.”

    안톤은 말을 하지 못했다.

    이가 다 부러지고 턱이 완전히 뭉개진 탓이었다.

    대신 발목을 쥔 손에 힘을 꽉 주며 당겼다.

    죽어가는 상태라고 보기 힘든 힘이었다.

    “······채.”

    “채?”

    “······책임.”

    고작 한 마디.

    안톤은 그것을 뱉고는 푹 쓰러졌다.

    석우는 황급히 그를 안아 들고 숨을 짚었지만 이미 사라진 후였다.

    “아. 아아. 아아아······”

    말을 잃어버린 것처럼 석우는 흐느꼈다.

    온갖 감정이 휘몰아쳐서 표현 할 방법이 없었다.

    흔들리는 아지랑이처럼 안톤을 품에 안은 채 휘적거렸다.

    눈에서는 눈물이 비처럼 쏟아졌다.

    도무지 견딜 수 없었다.

    온 몸이 찢어져 죽어버리는 기분이었다.

    그에게 안톤은 심장이었다.

    세상에 나서 처음으로 찾은 가족.

    그 가족이, 그 심장이 뜯겨져 나간 것이다.

    이 아득한 고통은 그를 좀먹고 정신까지 나락을 떨어뜨렸다.

    책임.

    하지만 한 단어.

    안톤이 죽기 전에 남긴 한 마디가 그를 부여잡았다.

    쏟아지는 울분을 씹어 삼키며 안톤의 시신을 눈 눈으로 박제했다.

    그의 피. 그의 상처. 그의 눈물.

    모든 걸 심장에 담아 몇 번이나 못으로 박았다.

    찢어질 듯 아팠지만 그것이 책임이었다.

    “······안톤은. 안톤은 제가 묻게 해 주세요.”

    “허. 새끼가 어디서 조건을 달아?”

    “잠깐 있어 봐. 야, 석우야. 너 안톤 묻고 나면 고분고분 지낼 자신이 있냐?”

    자신 따위가 있겠는가.

    하지만 지내야 한다.

    그게 자신 손으로 죽인 형제에 대한 책임이었다.

    석우는 울면서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이 얼마나 기괴했던지 질문을 던진 남자가 흠칫 하고 물러났을 정도였다.

    “개처럼 살겠습니다. 짖으라면 짖고 물라면 물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안톤은 제가 묻게 해 주세요.”

    “······크흐흠. 뭐, 그렇게까지 말 하면.”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석우 이 새끼도 알아들은 거 같고.”

    “감사합니다.”

    석우는 안톤을 끌어안고 힘겹게 일어났다.

    몸에 힘이라고는 없어 엎어지기를 몇 번이나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그를 안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마치 시체 두 구가 서로에게 기댄 것 같았다.

    “거, 어디에다가 묻을 거냐?”

    “······가장 높은 곳에요.”

    그래야 영혼이나마 이 지옥 같은 곳을 떠나서 자유로울 수 있으니까.

    석우는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눈물을 소매로 훔치며 걸었다.

    느리고 느리게.

    앞으로 그가 걸어갈 길을 예고하듯 그렇게 걸었다.

    “······박 감독님.”

    “아, 아! 오케이! 커어어어엇!!”

    한 박자 늦게 박종찬의 컷 사인이 들리고.

    멈춰 있던 촬영장에 현실이 다시 돌아왔다.

    #

    진호는 촬영이 끝나고 죽은 듯 쓰러졌다.

    소모한 감정이 너무나 커서 일어 날 힘조차 없었다.

    송학도 은서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굳이 그를 깨우지 않았다.

    “진짜······내 남자지만 멋있어.”

    “야. 나도 있거든.”

    “후후. 뭐라고 해도 멋있는 건 멋있는 거죠.”

    은서가 말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주며 웃었다.

    송학이 ‘웩’하며 역한 표정을 지었지만 신경도 안 썼다.

    “박 감독님은 뭐래요?”

    “뭐라긴. 지금 놀라서 말도 제대로 못하셔.”

    “그 정도에요?”

    “지나가면서 물었는데 머리에 벼락이 떨어진 기분이란다. 이런 연기를 직접 봐서 영광이라나. 하여튼 반응이 굉장하긴 해.”

    배우인 은서가 본 것과 감독인 박종찬이 본 건 달랐다. 은서가 개인에게 집중해서 볼 때 그는 전체 씬을 생각했으니까.

    그렇기에 박종찬은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진호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연기력으로 씬 하나를 혼자서 씹어 삼켰다.

    오로지 한 사람에게 초점이 맞춰지는 느낌.

    그의 호흡과 눈빛 등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되어 버린 것이다.

    백 마디 설명보다는 그저 하나의 연기가 나았다.

    완벽을 넘어선 연기.

    박종찬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근데 난 오빠의 연기도 좋았지만, 이제 쉴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좋네요.”

    “그러냐. 하긴 뭐, 나도 어느 정도 동감하긴 한다. 촬영 내내 진호가 너무 힘들었지.”

    “힘들었다 뿐이겠어요? 몸무게가 얼마나 빠졌는데. 이젠 포옹해도 갈비뼈가 찔려서 아프다고요.”

    “네가 잘 먹여.”

    “그럴 거예요. 촬영 딱 끝나면 고향집 내려가서 쉬기로 했거든요. 아버님하고 어머님도 뵐 겸 해서.”

    “너네 그러다가 결혼하겠다?”

    “헤헤. 응원해 주시는거죠?”

    아니라고 말도 안 한다.

    송학이 둘을 번갈아 보며 픽 웃었다.

    생각해 보면 진호 옆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도 잘 상상이 안 갔다.

    “축가는 내가 한다.”

    “뭐래요.”

    가늘어진 은서의 눈에 다시 한 번 웃었다.

    #

    모든 촬영이 마무리 되었다.

    이제 남은 건 편집과 홍보.

    그리고 상업적인 유통에 대한 싸움뿐이었다.

    “번역은 잘 돼 가고 있어요?”

    “아주 작정하고 모았다. 각국 언어로 전부 번역중이야. 네 말대로 돈은 아끼지 않고 풀었다.”

    “중요한 부분이에요. 우리도 영화 번역 이상하면 짜증나잖아요. 제대로 의미 전달도 안 되고. 최고의 인력을 투입해서 번역하죠.”

    “그래, 그래. 이번 영화에 나도 사활을 걸었으니까 대충 할 수는 없지.”

    일은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이번 영화가 중요하다는 건 최현석만이 아닌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돈이면 돈 인력이면 인력.

    모든 걸 동원해서 일을 추진해 나갔다.

    “이야. 이거 너무 아쉬운데.”

    “아까워도 어쩔 수 없죠. 이거 들어가면 너무 사족이 긴 느낌이에요.”

    편집은 아쉬움의 연속이었다.

    워낙 좋은 장면이 많은 터라 덜어내는 과정이 고통이었다.

    박종찬은 잘라낸 걸 모아서 개봉해도 천만을 넘을 거라고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그만큼 훌륭한 장면이 많았다.

    “여기랑, 여기. 중간에 잘라서 홍보용으로 쓰죠.”

    “너무 많이 드러내는 거 아니냐?”

    “일단 제안만 해보는 거예요. 감독님이 보고 결정을 하시겠죠.”

    홍보 영상도 영화 마무리 시점과 맞물려서 제작되었다. 첫 번째 영상이 워낙 화제를 끈 탓에 두 번째 영상 제작도 빡빡했다.

    핵심은 너무 보여주지 않되 흥미를 끌 수 있는 수준.

    홍보가 그렇듯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중요했다.

    “남은 건 배급 문제인데······”

    “여기가 살짝 난항이다.”

    진호도 최현석도 표정이 썩 밝지 않았다.

    본래 배급은 황천에서 전담하기로 되어 있었다.

    중국 내부만이 아니라 외국과의 배급 거래도 전담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황전과의 관계가 단절되면서 이 과정을 전부 J.H에서 맡게 됐다.

    최현석도 최대한 배급로를 파기 위해서 노력하기는 했지만 역량에 부대끼는 면이 많았다.

    “그 조건을 계속 고수하고 있죠?”

    “그래. 북미 유통을 위해서는 필수적인데, 조건이 너무 더러워.”

    “우리가 곤궁하다는 걸 아는 거죠.”

    메이저 유통사와 손을 잡고 싶었지만 조건이 너무 안 좋았다. 애초에 황천과 단절하고 남은 J.H는 신생 회사에 불과했다.

    아무리 진호가 유명하다고 해도 신생 회사의 영화를 전폭적으로 밀어주는 것에는 대가가 필요했다.

    그것도 굉장한 수준으로.

    “차라리 살짝 마이너한 쪽으로 알아볼까요?”

    “관을 확보하지 못하면 어려울 텐데.”

    “저 조건으로 계약하면 관을 확보해도 남는 게 없어요. 게다가 이런 식으로 무시당하는 건 마음에 안 드네요.”

    “그거 자존심이야.”

    “알고 있어요. 그래서 더 그쪽하고는 계약하기가 싫은 거예요. 전에 받은 메일에서도 그랬잖아요. 우리를 잘 모른다고. 애초에 작품이 어떤지 알아 볼 생각도 없는 거예요. 그냥 견적 보고 계약서를 내민 거죠.”

    적어도 진호는 작품을 알아보는 쪽과 손을 잡고 싶었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 한 번 연락해 보마.”

    “부탁할게요, 대표님.”

    “손해는 안 보겠지?”

    “하하. 걱정 마세요. 훌륭한 작품에는 좋은 결과가 따라오기 마련이에요.”

    모험수를 던지는 것에 두려움은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영화가 굉장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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