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168화 (168/178)
  • Chapter76. 돈 몇 푼에(2)

    다음 날 박종찬은 진호를 찾아갔다.

    숨기고 모른 척 할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는 영화인이고 감독이었다.

    이미 망가진 자존심에 먹칠까지는 할 수 없었다.

    “감독님. 일단 일어나세요.”

    대뜸 찾아와 무릎 꿇는 박종찬에 진호가 난감함을 표했다.

    “미안하다. 내가 집안 관리를 못해서 이 사단이 났어. 뭘 어떻게 해야 용서를 받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감독님 잘못이 아니에요. 무릎 아프니까 일어나세요.”

    “내가 무슨 염치로 일어나겠냐. 네가 이 영화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알고 있는데. 이 마당에 내가 무슨 낯짝으로 고개를 들겠어. 내가 죽일 놈이지. 왜 파일을 집으로 들고 가서는······”

    아예 머리를 땅에 박고 주먹으로 마구 내려쳤다.

    보다 못한 직원들이 뜯어 말리고서야 겨우 멈출 수 있었다.

    꺽꺽 거리고 우는 모양새가 애잔했다.

    “하아. 감독님. 이미 벌어진 일은 벌어진 거예요. 안타깝지만 어쩌겠어요. 일단 수습부터 하고 난 다음에 울든 말든 하죠.”

    “끄으으윽. 내가 면목이 없다, 면목이 없어!”

    “그만 하세요. 이대로 울기만 한다고 해결 될 일이 아니잖아요. 정 미안하면 수습할 방법부터 생각해 봐요.”

    박종찬의 죄라면 일을 집으로 가지고 간 것.

    그리고 자기 아내를 너무 믿은 것에 불과하다.

    이걸 가지고 무슨 말을 할까.

    화나는 건 진호도 마찬가지였지만 화풀이 할 대상은 아니었다.

    “크응. 여기서 기다려라. 못난 마누라랑 함께 경찰에 출두 할 테니까.”

    “경찰에요?”

    “자수해야지. 자수하고 받은 돈 돌려줘야 수사라도 제대로 하지 않겠냐.”

    “하지만 감독님······”

    “말리지 마라. 나, 이렇게 살아왔다. 우리 마누라. 사랑하지만 아닌 건 아니야. 가서 죗값 받고 어떻게든 해 보마.”

    이미 아내에게는 통보하고 나온 박종찬이다.

    박하다고 말 할 수 있지만 이렇게 안 하면 더 이상은 같이 살 수 없었다.

    사랑하기에 모질어야 할 때도 있는 법.

    박종찬은 지금이 그 때라고 생각했다.

    “최대한 수습하는 쪽으로 해볼게요.”

    “내가 너 볼 면목이 없어서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하겠다.”

    “감독님······”

    “나는 가 보마.”

    진호는 떠나는 박종찬을 잡지 못했다.

    잡아서 뭐라고 해야 할까.

    공적인 입장이 있으니 아내의 죄를 용서한다고 할 수도, 그렇다고 욕을 할 수도 없었다.

    화가 나고 안타깝고.

    속만 부글부글 끓을 뿐이었다.

    #

    유출본 상황은 잠잠해질 기미가 안 보였다.

    박종찬이 경찰에 자수를 하며 ‘유출본을 소장하거나 공유하면 처벌 받을 수 있다.’라는 성명을 발표했음에도 여전했다.

    게다가 상황이 이렇다 보니 촬영도 지지부진이었다.

    주변이 뒤숭숭하면 일하기 힘든 법.

    그건 진호도 마찬가지였다.

    “······후우. 잠깐 쉬었다가 하죠.”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머리로는 ‘집중해!’라고 외치지만 계속해서 박종찬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많이 심란한가보네.”

    “아무래도 그렇지. 감독님이 원한 일이라고 해도 그렇게 보낸 게 옳은 선택인가 싶고.”

    “회사 차원에서 처벌 문제는 최소화 하고 있어.”

    “알아. 알고 있지만 계속 걸려.”

    “에휴. 그 여자도 참 그렇다. 고작 몇 푼 돈에 남편 커리어를 끝장내고.”

    이 바닥은 참 좁다.

    박종찬이 자수하고 하루도 되지 않아서 소문이 쫙 퍼졌다.

    아내가 저지른 일과 그에 대한 대응.

    정직한 사람이라 칭찬하는 이들도 더러 있었지만 대부분은 아니었다.

    영화를 망쳐버린 감독.

    아주 단편적인 이미지만 남아서 흉흉한 소문으로 퍼지고 있다.

    본래 소문이라는 것이 그렇다.

    나쁜 이야기는 오래 남고 좋은 이야기는 금세 사그라진다.

    감독 커리어에 있어서 치명적인 일이었다.

    “경찰에서는 뭐래? 감독님 아내분이 접선한 사람을 조사해 봤을 거 아니야.”

    “조사는 하고 있는데 가능성은 높지 않아.”

    “역시 그런가.”

    “한 번에 유출시킨 솜씨만 봐도 알잖아. 대충 일 처리하는 것들이 아니야.”

    경찰 수사도 막다른 길.

    이래저래 유출 문제는 처리 방법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1차 유출 내용 말고도 남은 부분이 더 있지 않은가.

    언제 또 풀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나마 용량 문제로 화질이 나은 게 다행인가.”

    “······음?”

    “유출 영상 말이야. 화질이 많이 안 좋잖아.”

    “그거 일부러 그렇게 한 거 아니었어?”

    “아니야. 당시 사용한 usb가 낡은 거라서 저화질로 인코딩 할 수밖에 없었어.”

    파일 하나하나가 용량이 컸던 터라 저화질로 인코딩해서 옮겨 갔었다.

    진호가 턱밑을 매만지며 무언가를 생각했다.

    “지금 유출 본 말이야. 몇 분 분량이지?”

    “5분 정도 될 걸?”

    “그래. 그렇단 말이지.”

    저화질 유출본 5분 분량.

    조롱의 의미로 잽을 날린 것이다.

    “형, 대표님 좀 보러가자.”

    하지만 어쩌면 이것이 해답일지도 모르겠다.

    진호가 외투를 집어 들었다.

    #

    핵심은 가치였다.

    영화 유출본이 퍼지면 당연히 타격을 입는다.

    이미 한 번 본 영화를 누가 또 보려고 하겠는가.

    하지만 바꿔서 생각을 해 보자.

    유출본이 있어도 꼭 봐야 하는 상황이면 어떨까?

    어차피 전부를 수습 할 수 없으면 이유를 제시하는 쪽이 나을 수도 있다.

    “메이킹 필름을 공개하자고?”

    “네. 유출본 앞뒤로 해서요. 실제로 사용하지 않을 부분을 붙여서.”

    “페이크 영상처럼 쓰자는 거냐?”

    “어차피 홍보 영상과 실제 영상에 차이가 나는 건 희귀한 일이 아니잖아요. 저화질 영상이 아닌 깨끗한 영상으로 공개를 해요.”

    반전 영화라면 치명적이겠지만 이번 영화는 아니다.

    시나리오 유출이 분명 타격은 주겠지만, 잘만 쓰면 차라리 호기심을 유발하는 홍보가 될 수도 있다.

    더 많은 부분을 공개해도 마찬가지.

    실제 영화에 쓰일 장면과 비교하는 것으로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다.

    저화질이 아닌 좋은 화질로 보고 싶다, 같은.

    “괜히 불만 지르는 거 아닐까 모르겠군. 이대로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는 편이 낫지 않을까?”

    “아니에요. 이대로 내버려두면 분명 또 유출을 할 겁니다. 계속해서 괴롭히겠죠.”

    “······하긴.”

    “유출본 회수로 돈을 요구하거나 그런 것도 아니잖아요. 이건 영화 자체에 타격을 주기 위한 조롱이에요. 절대로 굴복하면 안 돼요.”

    돈을 뜯어내기 위한 수작이었다면 이미 연락이 왔어야 한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그럼 홍보팀하고 영상 제작에 필요한 사람들을 모아주세요.”

    “자신 있는 거지?”

    “쫄지 마요, 대표님.”

    배를 툭 치며 웃는 진호.

    그제야 최현석도 마른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적어도 믿고 갈 구석 하나는 있었다.

    #

    팀이 모여서 영화 홍보 영상 제작에 들어갔다.

    이미 유출된 영상분에 실제 촬영 현장 장면이 추가되었다.

    일반적인 홍보 영상은 분명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독특한 부분은 있었다.

    “마지막에 따로 한 마디 들어갈게요.”

    “직접 말인가요?”

    “네.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진호는 영상 제작에 참여했다.

    촬영이 살짝 지연되기는 했지만 이쪽이 중요했다.

    다른 스텝과 배우들도 십분 이해를 해 주었다.

    “실제로 보고 싶다면 영화관으로. 이런 식이면 될까요?”

    “좀 더 느낌 있게 가죠.”

    “내 모습을 더 생생하게 보고 싶어? 그럼 따라와. 이건 어때요?”

    “아뇨 그런 것보다는 영화 느낌을 살려서 가는 쪽으로요. 비장하고 처절하게 가죠.”

    몇 번의 수정 끝에 괜찮은 씬을 따냈다.

    전체 영상에 마무리로 이어 붙였다.

    흐름을 망치지도 않고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 정도면 될 거 같네요.”

    작업은 매우 빠르게 끝냈다.

    회사의 모든 인력이 달라붙어서 온 힘을 다했다.

    영상은 진호를 비롯해 최현석과 중요 인사들을 거쳐서 확인을 받았다.

    만장일치로 합격점을 받았다.

    그리고 하루 지난 정오에 영상을 공개했다.

    [영화, 동틀 녘의 티저 영상이 공개되었다]

    [새로운 방식의 티저 영상. 유출본을 염두에 둔 영상이 화제가 되어······]

    [5분가량의 영상에서 드러나는 압도적인 영상미. 압권은 주연인 배우 홍진호의 연기력]

    [영상 말미에 배우 홍진호가 직접 남긴 당부의 말. 절절한 마음이 그대로 느껴져]

    반응은 매우 뜨거웠다.

    #

    진호는 이른 새벽에 박종찬을 찾아갔다.

    그는 퀭한 얼굴에 떡진 머리로 반겨 주었다.

    몇 날 며칠에 걸쳐서 조사를 받으며 제대로 잠 한 숨 못 잔 그런 얼굴이었다.

    “감독님, 꼴이 엉망이에요.”

    “······다 내가 지은 죄지.”

    “감독님이 뭘 잘못했다고 그러세요. 아내분의 실수로 감독님이 욕먹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만 하자. 아내의 죄도 내 죄야. 집안 단속을 못 한 가장이 무슨 면목이 있겠어. 아니면 내가 아내를 부덕하다 말하며 선을 긋기라도 해야겠냐?”

    “······휴우.”

    박종찬의 마음이 이해 안 가는 건 아니다.

    그로서는 아마 최선이었을 것이다.

    아내를 감싸며 부덕한 사람이 될 수도 없고, 아예 잘라내어 남처럼 벌 할 수도 없었으니까.

    끌어안고 같이 고통스러워하는 게 그가 내린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보다 티저 영상은 잘 봤다.”

    “보셨어요?”

    “봤지. 여기서 쿡쿡 쑤셔도 어떻게 안 볼 수가 있겠냐.”

    가슴을 쿡쿡 찌르며 말하는 박종찬의 얼굴에는 아픔과 아쉬움이 가득했다.

    “잘 뽑았더라. 유출 영상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고화질로. 네가 생각한 거냐?”

    “비교하고 나면 유출 영상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래. 우리 영화면 그 정도 힘은 있지. 타격은 좀 있겠지만 이걸 홍보로 전환하면 그럭저럭 평수는 이룰 거다.”

    진호도 비슷하게 생각했다.

    거하게 홍보 한 번 했다 생각하고 유출 문제는 정면으로 부딪칠 계획이었다.

    “그러니까 감독님. 이제 그만 돌아오세요.”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나도 감독으로서 자존심이 있다. 이런 사단을 내 놓고 무슨 낯짝으로 돌아가라는 거냐.”

    “이대로 손 놓고 포기하는 게 되레 자존심 없는 거예요. 한 번 시작한 작품을 중간에 포기하는 감독이 어디에 있습니까?”

    “경우가 다르잖아, 경우가. 내가 어디 너 한 명 한테 실수를 했냐? 모두가 고생한 작품이었어. 그걸 송두리째 날릴 뻔 했는데 어떻게 돌아가.”

    박종찬은 아예 돌아앉았다.

    그의 고집은 철벽같아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 감독님 아내 분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무슨 소리냐?”

    “이야기 들었습니다. 조사받던 중간에 쓰러지셨다고.”

    “원체부터 몸이 약했던 사람이다. 자기 때문에 내가 잘못 됐다고 자책을 많이 한 터라······”

    “그러니까요. 이대로 감독님이 포기하시면 사모님은 앞으로 죄책감만 안고 살아갈 겁니다. 잘못 한 일은 벌을 받되, 나머지까지 떠안고 가서는 안 되죠.”

    진호라고 박종찬의 아내가 좋은 건 아니다.

    말마따나 남이었다면 냉큼 고소하고 줄줄 짜는 모습을 기쁘게 봐 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영화에는 아직 박종찬의 능력이 필요했다.

    “면목 없다고 등 돌리는 것보다 부끄러움을 이기고 끝까지 해결하는 것이 더 책임지는 모습입니다.”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알아요. 쉽지 않죠. 그러니까 더 하라는 겁니다. 책임지셔야죠. 정말로 사모님의 잘못을 같이 떠안고 가실 거라면.”

    박종찬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에게 이번 영화 현장은 부끄러움 고통의 장소였다.

    수많은 스텝 관계자 배우들.

    무슨 얼굴로 똑바로 볼 수 있을까.

    생각만 해도 몸이 떨리고 땀이 흘러나왔다.

    “피해가지 마세요. 전 감독님이 그런 겁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

    하지만 진호의 말에 일리가 있다.

    이대로 손 놓고 도망가는 건 결코 책임지는 태도가 아니다.

    부끄럽고 고통스럽지만 해 놓은 일을 마무리 하는 것이 감독의 역할.

    남은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

    “가시밭길을 걷게 만드는구나.”

    “걸어야죠. 걸어야 살 수 있습니다, 감독님.”

    “하아. 그래. 네 말이 맞다.”

    박종찬이 푹 숙였던 고개를 들어올렸다.

    숨어서 편하기보다는 나서서 고통스럽기를 선택한 것이다.

    분명 힘들고 괴로운 과정이 되겠지만.

    “개처럼 부려다오.”

    그래도 죽지는 않을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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