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167화 (167/178)
  • Chapter76. 돈 몇 푼에(1)

    강행군에 영화는 빠르게 완성되어 갔다.

    전체 시나리오의 80% 즈음.

    편집으로 장면을 걷어내고 부족분을 촬영하면서 완성도를 계속해서 높여갔다.

    “그 장면에서는 클로즈업을 확실하게 해야죠.”

    “아니야, 아니야. 너무 당기면 지나치게 과장된 느낌이라고. 거리를 두고 담담하게 푸는 편이 나아.”

    “그래도 감정을 세게 오는 편이 낫지 않아요?”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보자. 어느 쪽이 나은지.”

    과정에서 많은 마찰이 있었다.

    진호가 총 책임자기는 하지만 박종찬을 시작으로 꽤 많은 감독을 보조로 두고 있었다.

    서로 의견이 다르고 지향점도 제각각이었다.

    한 장면을 두고도 몇 시간씩 싸울 만큼 의견은 팽팽하게 대립했었다.

    “일단 두 세트로 해서 비교해 보자고요.”

    “오케이. 전체 흐름으로 비교해 보면 답이 나오겠지.”

    하지만 이걸 가지고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좋은 작품을 위해서는 많은 싸움이 필요 한 법.

    대립되는 의견 속에서 최선을 뽑아내야 하는 것이다.

    마치 칼을 두드리는 도공과 같이.

    “흐음. 아무래도 감독님 쪽이 나아 보이네요.”

    “그렇지? 흐흐. 자식아, 내가 이래 봐도 감독질만 십 수 년이다. 아직은 내가 낫다 이거야.”

    “에헤이. 또 잘난 척이시네.”

    “그래서, 어쩔래? 쓸 거지?”

    “쩝. 수용하겠습니다.”

    진호는 이 과정에서 나오는 결과물을 거부감 없이 수용했다. 감독으로서의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나름의 주관은 있지만 그래도 듣고 수용하는 것이 중요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거 편집해서 검토 본으로 쓰겠습니다.”

    “마지막 장면 촬영 전에 쓰려고?”

    “네. 세 장면 정도 구상하고 있거든요.”

    “그래. 영화는 흐름이 중요하지.”

    결말은 정해 두었지만 아직 완벽하진 않다.

    미묘한 차이로도 관객들은 많은 것을 다르게 느낀다.

    그 미세함을 컨트롤 하는 것이 배우와 감독의 역할.

    진호는 영화의 흐름을 계속해서 복기하며 마지막 장면을 준비했다.

    “이거 편집본은 감독님하고 저만 가지고 있는 겁니다. 보안에 주의해 주세요.”

    “안다, 알아.”

    보안은 필수.

    박종찬이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이며 웃었다.

    너무 당연한 얘기였다.

    #

    일을 집으로 가지고 오는 건 좋지 않다.

    하지만 빡빡한 일정에 쫓기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경우가 있다.

    박종찬이 그러했다.

    편집본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 집까지 가지고 온 것이다.

    “여보, 왔어요?”

    “어. 아직 안 자고 있었네. 먼저 자라니까.”

    “같이 야식이나 할까 해서 기다렸죠.”

    뜬금없이 좋은 소식 아닌가.

    부인이 맥주와 마른안주를 들고 거실로 나왔다.

    박종찬의 얼굴에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피어올랐다.

    “하하. 내가 역시 마누라는 잘 뒀다니까.”

    “그걸 이제 알았어요?”

    나란히 앉아 맥주잔을 맞대니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촬영 많이 힘들어요?”

    “뭐, 안 힘들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지. 일정이 한 번 꼬인 터라 빡빡해. 그래도 슬슬 끝이 보이고 있으니 좀만 더 고생하면 될 거야.”

    “여보가 고생이 많아요.”

    “하하. 고생을 해도 보람이 있으면 됐지. 내 생각에 이번 영화는 아주 잘 나올 거 같아.”

    박종찬이 맥주를 훌쩍 넘기며 껄껄거렸다.

    비록 그가 메인 감독은 아니었지만 손때가 탄 제작물의 완성도에 기뻐 할 도량은 있었다.

    “너무 마시진 마요. 목욕물 받아 놨으니까 씻고 난 다음에 같이 마셔요.”

    “오. 목욕물까지. 이거 오늘따라 호강하는군.”

    “요즘 힘들어 하는 거 같아서 힘 좀 줬죠.”

    “흐흐. 그럼 나도 밤에 힘 좀 써봐?”

    “내일도 일찍 나가야 하면서 무슨. 가서 씻기나 해요.”

    박종찬이 뒷머리 긁으며 화장실로 쫓겨났다.

    ‘맥주 다 마시지 마!’ 한 소리 덧붙이는 모양새가 기분은 썩 좋은 듯 했다.

    “어휴, 왔으면 정리부터 하시지.”

    그리고 그가 남기고 간 흔적들을 부인이 정리했다.

    대충 벗은 코트에 양말.

    그리고 낡은 가방이 그것이었다.

    “이 양반이 또 일거리를 집으로 가져왔네. 집에서는 그냥 편히 쉬라니까.”

    노트북과 usb를 보며 한숨지었다.

    일이 밀릴 때면 이렇게 들고 와 일하는 모습을 한 두 번 본 것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그녀가 노트북을 열어서 usb를 연결했다.

    비밀번호가 걸려 있었지만 이미 수십 번이나 봤던 경험이 있다.

    “아. 맞네. 이걸 복사해서 주면 된다고 했나?”

    그녀가 살짝 망설이는 얼굴로 노트북과 화장실을 번갈아 바라봤다.

    화장실 안에서는 박종찬의 콧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어차피 완성본도 아니잖아.’

    이내 결심을 한 듯 usb에 저장된 파일을 복사했다.

    편집본 영상 데이터라고 해 봐야 얼마 되지도 않는 크기.

    금세 작업은 끝났다.

    “······응. 괜찮겠지.”

    탁. 노트북을 덮었다.

    #

    촬영이 막바지에 달하자 속도는 더 올라갔다.

    끝이 보이니까 다들 의욕이 샘솟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진호도 마찬가지였다.

    “자자, 화이팅 합시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촬영장을 돌면서 사람들을 독려했다.

    그래도 총 책임자 아닌가.

    직접 나서서 독려하니 축 늘어져 있던 스텝들도 벌떡벌떡 일어났다.

    “오늘 씬 쉽지 않더라. 준비 잘 했지?”

    “당연하죠. 몇 번이고 돌려 보면서 확실히 이미지 그려왔습니다.”

    “흐흐.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보기 좋네. 오늘 제대로 한 번 해보자고.”

    박종찬도 의욕 넘치는 모습이었다.

    컨디션도 상당히 좋았다.

    이런 날이면 좋은 씬이 나오곤 했다.

    “진호야, 진호야!”

    “응? 저거 매니저 아니냐?”

    “송학 형이네요. 형, 여기야.”

    그렇게 촬영 준비에 들어 갈 즈음.

    송학이 촬영장 밖에서 큰 소리를 내며 뛰어왔다.

    보통이라면 대단한 결례인 행동이었다.

    “허억. 헉. 너, 너 이거 봤어?”

    “보다니 뭘?”

    “유출본 떴어. 영화 유출본이 떴다고.”

    “뭐?”

    송학이 황급히 폰을 꺼내 화면을 보여 주었다.

    러시아 쪽 방송이었는데 뉴스 앵커가 저화질의 영화 화면을 설명하고 있었다.

    화면은 안 좋았지만 그게 영화의 한 장면임을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야? 러시아에서 우리 영화 유출본을 어떻게 가지고 있는데?”

    “러시아만이 아니야. 지금 인터넷에 쫙 퍼졌어.”

    “인터넷에?”

    “지금 대표님이 우선적으로 링크 내리게 하면서 퍼지는 걸 막고는 있는데······”

    진호가 더 들을 것도 없이 외투를 챙겨 입었다.

    “박 감독님. 오늘 제 씬은 뒤로 밀어주세요. 나머지부터 가는 걸로.”

    “어, 어. 여긴 나한테 맡기고 가 봐.”

    “부탁할게요.”

    촬영도 중요하지만 이건 더 큰일이었다.

    진호가 송학과 함께 바삐 촬영장을 벗어났다.

    “유출본이라고?”

    그 뒤에서 박종찬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

    회사는 이미 난장판이었다.

    영화 유출본이 퍼지면서 이걸 막기 위해서 회사의 총력을 동원한 상황이었다.

    “크으으응! 그냥 좀 내려달라 이겁니다!”

    최현석은 핏대까지 세워가며 싸웠다.

    워낙 여기저기 유출본이 퍼진 터라 전부를 막기는 어려웠다.

    “하아. 이제 돌아온 거냐?”

    “네. 상황 보니까 심각한가 보네요.”

    “최대한 막고는 있는데, 이미 퍼질 만큼 퍼진 모양이다.”

    “어디가 출처인지는 알아냈어요?”

    “일단 조사 의뢰는 했는데 쉽진 않을 거 같아.”

    새벽에 거의 같은 타이밍으로 퍼졌다.

    “우연히 퍼진 건 아니겠죠?”

    “아니지.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퍼졌어. 고의로 수를 쓴 게 아니면 그럴 가능성은 없지.”

    “대체 어디서 유출본이 생긴 거죠? 영상 관리는 굉장히 철저하게 했는데.”

    “그러니까. 최근 편집본이면 네가 직접 관리하고 있었을 거잖아.”

    “네. 저하고······”

    진호가 답을 하던 그 상태로 멈칫했다.

    편집본을 관리하던 건 자신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설마······’

    믿고 싶지 않는 내용이었다.

    “설마 짚이는 곳이라도 있는 거냐?”

    “짚인다기 보다는 영상 관리는 저랑 박종찬 감독님이 같이 하고 있었거든요.”

    “박 감독님이?”

    “네. 하지만 박 감독님이 유출을 시켰을 리는 없잖아요. 그분 성격에 말이 안 돼요.”

    최현석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박종찬이면 그도 알 만큼 안다.

    영화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깐깐하고 고집이 강한 인물이었다.

    어떤 이유에서라도 고의로 유출하는 건 상상이 안 간다.

    “그럼 대체 누가 있을까요?”

    “글쎄다.”

    답이 안 나오는 질문에 한숨만 깊어졌다.

    #

    박종찬은 몇 번에 걸쳐서 고심했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떠오르는 답은 하나 밖에 없었다.

    “응? 여보, 일찍 왔네요?”

    “······”

    조금 일찍 돌아간 집.

    말없이 소파에 앉아 아내를 바라봤다.

    “무슨 일 있어요?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데.”

    “여보. 내가 하나만 물어볼게. 솔직하게 답해 줘.”

    “뭔데요?”

    바로 묻는 건 겁이 났다.

    물 한 잔을 쭉 들이켜 마른 입술을 축이고 그제야 가둬 두었던 말을 꺼냈다.

    “며칠 전에 집에 왔을 때 말이야. 같이 맥주 마신 날.”

    “네. 그들이 왜요?”

    “혹시 내 짐에 손 댔어?”

    “지, 짐이라니요?”

    “촬영장에서 가지고 온 물건 말이야. 혹시 나 샤워하는 동안에 따로 건드린 거 없어?”

    아니라는 답이 나오기를 바랐다.

    그러면 적어도 믿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여보 그게······”

    하지만 바람과는 다른 답이 들려왔다.

    망설이는 말투와 어딘가 주눅 든 듯 보이는 얼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지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아닐 거야. 아니라고 말 해.”

    “이, 일단 좀 들어봐요. 그냥 참고용으로 사용한다고 그랬단 말이에요.”

    “참고용이라니. 대체 누가? 어디서 그랬는데?”

    “······전화로만 받은 거라 누구인지는 몰라요. 무려 1억을 준다고 했어요. 그냥 참고로만 쓰면 된다고. 여보한테는 문제가 안 생긴다고.”

    박종찬이 고개를 푹 숙였다.

    속에서 신물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지금 유출본이 쫙 퍼졌어. 세상 사람들이 다 보고 있다고. 이게 얼마나 큰일인지는 알고 있어?”

    “여, 여보한테는 문제가 없다고 그랬어요.”

    “그 말을 믿었어!?”

    쾅, 하고 테이블 치는 박종찬에 아내가 움찔했다.

    1억. 무려 1억이었다.

    박종찬이 이름 있는 감독이기는 하지만 벌어오는 돈은 그 명성에 미치지 못했다.

    주택 대출금에 생활비.

    그리고 이제 자라기 시작한 아이까지 생각하면 1억이라는 돈은 너무 큰 유혹이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하지만 1억이면 여보도 조금 더 편하게 일에 매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난 절대로 피해를 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어떻게 피해를 안 줘? 아무리 돈에 혹해도 그렇지 이런 일을 나 몰래 벌일 수 있지?”

    “······”

    “당신은 내 영혼을 판 거라고. 감독이자 영화인인 내 영혼을 1억에 팔아버린 거라고. 이제 내가 무슨 낯짝으로 일을 하겠어? 수백의 사람들이 날 보는 눈빛을 무슨 수로 감당하냐고.”

    박종찬은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영화인으로 풍족한 삶은 살지 못해도 자긍심 하나는 뚜렷했다.

    자신의 영화를 부끄러움 없이 만든다는 신념.

    그것이 지금 깨어져 버린 것이다.

    “여보, 여보. 내가 어떻게든 할게요. 1억을 돌려주고······”

    “늦었어. 이미 다 늦어버린 거라고.”

    탓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돈이 뭐라고.”

    쓰린 마음에 눈물만 흘렸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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