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165화 (165/178)
  • Chapter75. 혼란을 수습하다(1)

    진호는 왕호룽이 남긴 선물을 최현석과 공유했다.

    사업적인 부분에서는 아무래도 그의 식견이 더 나았다.

    “이 정도 자산을 숨겨 두었던 건가. 무시무시한 양반이네.”

    “당의 시선까지 피해서 외국으로 빼돌려 놓은 자산입니다. 쓰는데 제약이 없는 돈이죠.”

    “게다가 계약마저 철저하게 해 두었어. 자신의 상태가 온전치 않을 경우 인력을 전부 수습 할 수 있도록.”

    최현석은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왕호룽의 안배는 그야말로 치밀했다.

    자신의 신변에 이상이 생겨서 황천이 제 기능을 못한다 하여도 핵심 파츠들은 전부 진호에게 이어 질 수 있도록 해 놨다.

    제갈량 뺨치는 수준이었다.

    “일단 계약서를 보내며 직원들을 소환해 뒀습니다. 다들 반신반의하다가 계약서를 보더니 그제야 움직이더군요.”

    “황천이 계약의 주체라 생각하기 쉬우니까.”

    “이미 이야기는 그쪽에 들어갔겠죠?”

    “그렇긴 하겠지만 별 수가 있겠냐? 계약은 이쪽이 쥐고 있고 황천은 영화판에서 한 발 빠지는 모양새인데. 이제 와서 영화에 출자 할 것도 아니고.”

    친 중국 쪽 황천은 이미 영화에서 손을 뗐다.

    정확하게는 J.H의 사업 노선하고 갈라진 것이다.

    일본 및 동남아시아 계약을 단발성으로 잘라내고 중국 정부에 아양떨기 바쁘다.

    “그럼 남은 반은 어떻게 할까요?”

    “반이나 될까. 분위기 보니까 친 왕호룽 파는 숫자가 적어. 정부에서 개입 들어가면 남은 이들도 뿔뿔이 흩어지겠지.”

    “실력 좋은 사람이 꽤 있는데 말이죠.”

    “네가 수습 할 생각이냐?”

    “중국이 깽판치고는 있지만 전부가 그런 건 아니잖아요. 적어도 깨어있는 사람은 수습해서 쓰고 싶어요. 그게 왕 형님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래. 그래라. 내가 비선을 통해서 의견을 전해 줄 테니까 연락 오는 사람대로 네가 수습안을 전해 줘.”

    “네.”

    황천은 이미 오래전부터 미디어 사업을 주도하던 기업이다. 그 노하우는 결코 얕지 않다.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이들을 수습하여 일꾼으로 쓴다면 일석이조 이상의 효과를 낼 수 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

    “처음 구상대로 가야죠. 황천과 갈라지면서 중국 시장이라는 큰 틀을 잃었지만······여기서 포기 할 수는 없습니다.”

    “쉽지 않을 거다.”

    “알아요. 하지만 이런 어정쩡한 상태로 포기하는 건 내키지 않아요.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지 않겠어요?”

    “베야지. 이왕 벨 거면 큰 놈으로.”

    칼은 이미 뽑았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침묵했다.

    커다란 기업과 높은 지위의 사람들도 입을 다물었다.

    그것이 자유민주주의와 인권에 부합하지 않는 일이라 해도 상대가 너무 크니까.

    그저 조용히 암묵적 동의로 체면치례를 할 뿐이었다.

    “홍콩 시위는 자유를 향한 몸부림입니다. 이를 무력으로 제압하는 건 철저한 폭력입니다.”

    하지만 진호는 그러지 않았다.

    그와 그의 기업인 J.H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거대한 중국 자본과 시장을 잃을 각오를 하면서까지 정면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당연히 중국은 반발했다.

    모든 영화 산업에 J.H를 배제 하겠다 으름장을 놓았다.

    “우리는 기로에 있습니다. 과거 수많은 억압과 폭력 속에서도 자유를 향해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습니까. 그때의 기백은 모두 어디로 간 것입니까?”

    진호는 움츠리지 않았다.

    더욱 더 많은 인터뷰와 더욱더 많은 발언을 했다.

    그의 발언은 수십억 뷰를 넘어서고 그의 행보는 신문 일면을 도배했다.

    “나는 자유를 위해서 연기하겠습니다. 거대한 국가와 비교하면 그저 작디작은 개인에 불과하지만 좌시하지 않겠습니다. 목소리를 높이고 의기에 동조하며 행동에 부끄러움이 없이 할 겁니다.”

    심지어 영화 시나리오도 대대적인 수정에 들어갔다.

    촬영지인 홍콩을 쓸 수 없기 때문에 아예 중국의 행보를 저격하는 쪽으로 옮겨간 것이다.

    서구권에 대항한 아시아 통합과는 거리가 먼 행보였지만 본디 적을 치기 위해서는 안부터 다스리는 법이라 했다.

    이웃이 막 나가면 소리라도 쳐봐야 하지 않겠는가.

    진호는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다.

    [나 알 베르노도 진호와 같은 생각입니다. 중국의 행동은 도를 넘었습니다. 배우이자 한 사람으로서 자유를 위해 연기하겠습니다]

    [우리는 배우입니다. 배우는 무엇을 위해서 존재합니까? 생각의 자유조차 뺏기는 이 고통의 현실 속에서 침묵이 해답이 되리라 보는 겁니까? 아닙니다. 일어나세요. 목소리를 높이고 이 억압에 저항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에 많은 이들이 동조했다.

    본래 누군가 한 명 나가는 것이 어려울 뿐.

    총대를 멘 용기 있는 한 사람이 수백, 수천의 군중을 이끄는 법이다.

    배우, 작가, 감독, 운동선수 등.

    수많은 셀럽과 영향력 높은 이들이 발언을 시작했다.

    그건 마치 하나의 운동과 같았다.

    [저 역시 현 상황에 대해서 유감이라 생각합니다. 물리적인 억압이 과연 해결책일까요?]

    [무엇을 위한 싸움입니까? 힘으로 찍어 누를 수 있다는 과시? 그게 정녕 자유의 가치에 부합한다고 보시나요?]

    언론이 들끓자 이에 반응한 건 정치인들이었다.

    특히, 한 걸음 뒤에서 기회를 보던 진보성향의 정치인들이 많은 발언을 했다.

    그들에게는 이것 또한 기회가 될 수 있었으니까.

    “지독하네.”

    “큰 덩치로 깔아뭉갠다 이거지.”

    하지만 그럼에도 중국은 변하지 않았다.

    탄압을 이어가고 자국의 언론을 통제했다.

    수많은 나라들이 손가락질을 했음에도 문제없다는 모습이었다.

    “더 끓어야 해. 직접 보고 느끼게 하는 수밖에 없어.”

    “하지만 중국 시장은 우리에게는 닫힌 문이라고.”

    “언제 나와 같아. 폭정을 멈추는 건 민중이어야 하지. 원하는 걸 얻지 못할 때. 그 욕망이 들끓어 오를 때. 그제야 사람들은 억압에 저항하려 할 거야.”

    “······가능한 이야기냐?”

    “가능하게 해야지.”

    왕호룽 피습 한 달 째.

    진호는 보다 선명하게 노선을 정했다.

    #

    주변 상황이 뒤숭숭해도 영화 제작 관련한 건 빠르게 정돈되었다.

    전문가들이 계약을 준수해서 한국으로 입국.

    제반 시설을 전부 새롭게 점검해서 재촬영에 들어갔다.

    불만을 드러낸 배우들도 있었지만 인센티브로 합의했다.

    “대본 전달은 끝났죠?”

    “응. 전부 전달했다. 다들 내용이 바뀐 터라 혼란해 하는 게 보여.”

    “최대한 본래 배역과 어긋나지 않도록 했어요. 중심을 이끄는 저랑 알 베르노는 어쩔 수 없었지만.”

    “알 베르노는 말이 없고?”

    “네. 저보다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어요. 벌써 대사를 다 외왔다고 하던데요.”

    “그나마 다행이네.”

    메인 배역 둘을 제외하고는 최대한 기존 시나리오와 달라지지 않도록 했다.

    꽤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이었지만 머리통 맞대고 끙끙 거리니 어떻게든 됐다.

    “가장 중요한 건 넌데. 준비는 됐어?”

    “네. 힘들기야 하겠지만 각오는 됐습니다.”

    영화 주제가 억압과 자유에 대한 것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메인 플롯 역시 달라졌다.

    진호가 맡은 배역이 통제된 환경 속에서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다가 자유를 찾는 내용이다.

    알 베르노는 이왕 대비되는 통제에 순응하는 캐릭터로 잡았다.

    악역으로 중국 사람을 정하면 되겠지만 그건 너무 상투적이었다.

    되레 순응과 저항의 두 캐릭터를 두어 자각의 시효로 삼을 생각이었다.

    “이 날씨에 얼음물이라니. 나는 맨 정신으로 못 보겠다.”

    “은서도 보러 왔잖아요.”

    “어유. 둘 다 독하지. 저 추운 걸 어떻게 참고 그러냐. 생각만 해도 닭살이 돋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통이 강해야 한다.

    주인공이 처절하면 처절 할수록 그 저항의 울림이 강해지는 것이다.

    CG와 특수 분장 등의 도움을 받지만 그걸 로는 한계가 있다.

    진짜로 몸으로 겪는 고통이 있어야 그 생생함이 전달 될 수 있는 것이다.

    영하의 날씨에 얼음물에 들어가는 것도 그 중 하나.

    혹독하기는 하지만 이 역시 영화를 위해서다.

    [진호. 준비 됐어?]

    [끝나고 뜨거운 삼계탕이나 하자고]

    [하하. 코리안 치킨 스프. 좋은 선택이야]

    분장을 마친 알이 다가오고.

    진호도 몸을 감싸고 있던 담요를 벗었다.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듯 한 얼음물로 한 걸음씩 나아갔다.

    #

    보조 감독으로 자리한 박종찬은 혀를 내둘렀다.

    보통 영화를 찍다보면 한계까지 사람을 몰아놓는 일이 왕왕 있다.

    한계에 봉착한 인간은 또 다른 모습을 그려내곤 하니까. 예술을 원하는 감독에게 그런 채찍질은 하나의 도구이기도 했다.

    하지만 자기가 감독이고 자기가 배우인 상황에서는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몰아넣는 것이 스스로이기 때문.

    과연 자기 자신을 그 정도로 학대 할 수 있는 인간이 몇 명이나 될까.

    박종찬은 그리 많은 배우를 떠올리지 못했다.

    “한 번. 한 번 더 갑시다.”

    “위험합니다, 진호 씨. 지금 컨디션으로 강행하면 진짜로 위험 할 수 있어요.”

    “알아요. 그러니까 가는 겁니다.”

    “주치의로서 허락 할 수 없습니다.”

    지독한 추위에 몸이 얼어붙으며 컨디션이 바닥까지 떨어진 상황이었다.

    담당 의사는 강행을 불허했지만 진호는 밀어붙였다.

    “한 번이면 됩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옆에서 잘 보조하면 되잖아요.”

    “그런 고집으로 될 일이 아니에요.”

    “지금 안 찍으면 앞선 과정을 또 반복해야 합니다. 이왕이면 한 번에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니, 전 장면을 쓰면 되지 않습니까?”

    “선생님이 환자를 살리는 게 업이듯, 우리는 연기하는 게 업입니다. 어설픈 걸 내어 놓을 순 없죠.”

    이를 딱딱 부딪치며 말하는 진호에게 주치의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더 무서운 건 다른 배우나 스텝들도 만류하지 않는다는 것.

    마치 미치광이 소굴에 혼자 제정신인 기분이었다.

    “······5분. 그 이상은 안 됩니다.”

    “그 정도면 충분해요.”

    씩 웃으며 촬영장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진짜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으······으아아아! 추, 추워! 춥다고!!]

    [참아, 멍청아! 여기서 약한 모습 보이면 더 밟힐 거라고!]

    [살갗이 찢어지는 거 같다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 있었다.

    영화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자신이 보기에도 더 강렬한 느낌.

    진짜로 죽음의 경계에서 펼치는 연기였다.

    “오케이! 컷! 컷! 빨리 건져! 담요 가져오고!”

    “의사 선생, 뭐하고 있어요!? 빨리 가서 체크해요!”

    “아, 네! 알겠습니다.”

    이래서 촬영장을 전쟁터라고 부르는 걸까.

    총과 칼만 없을 뿐 이들은 진짜로 목숨을 걸고 있었다.

    #

    촬영이 거듭 될수록 진호는 체중이 빠졌다.

    70kg 선도 깨져서 지금은 60kg초반.

    볼은 움푹 들어가 있고 몸은 깡말라서 초라해 보일 정도였다.

    “오빠, 스프라도 좀 먹자.”

    “······괜찮아. 이 상태가 좋아.”

    “내가 힘들어서 그래. 그러다가 쓰러지겠어.”

    “이 정도는 돼야 죽어가는 느낌이 들지. 배고픈 건 참을 수 있지만 어설픈 건 참을 수 없어.”

    극중 흐름에 맞춰서 체중을 빼고 컨디션을 조절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는 지독하게도 괴로운 과정이다. 복서가 감량을 하는 것처럼 배우고 스케줄에 몸을 맞춰야 했다.

    “이번 영화 끝나면 한 동안 이런 건 찍지 말자. 오빠 이러는 거 보고 있자니 내가 다 아파.”

    “미안. 고집 부려서 여기까지 왔으니까. 기대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킬 수는 없잖아.”

    “오빠는 한 번도 남을 실망시킨 적이 없어. 너무 자신을 몰아붙이지 않아도 돼.”

    “괜찮아. 이건 조급해서 그러는 게 아니니까.”

    울먹이는 은서를 다독이며 진호가 웃었다.

    깡말라 볼품없는 웃음이었지만 어색하진 않았다.

    예전, 조급함에 자신을 몰아붙이던 상황과 지금은 달랐다.

    주변 상황은 좋지 않고 부담은 그때보다 훨씬 강했지만 지금은 어떤 확신이 있었다.

    ‘내 연기혼은 그 어느 때보다 활활 타오르고 있어.’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확신.

    지금 이 순간을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불태워야 한다는 확신이었다.

    “인고 속에서 꽃이 피는 거야.”

    “······말은.”

    “거 봐. 아직 입은 멀쩡하잖아. 걱정 할 필요가 없다는 거야.”

    “촬영 끝나기만 해 봐. 그 입도 멀쩡히 안 내버려둘 거라고.”

    “기대할게.”

    여기서는 작은 포옹만으로.

    고통스러운 촬영 중 짧은 기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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