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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만 전생 배우-162화 (162/178)
  • Chapter73. 설득은 실력으로(2)

    알 베르노는 생각보다 더 집요한 사람이었다.

    두 번이 세 번으로. 세 번이 네 번으로. 네 번은 다섯 번으로.

    그는 계속해서 진호와의 대결을 요망했다.

    그때마다 결과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지? 새파랗게 젊은 놈이 그런 연기를 할 수 있는 거냐고?]

    [알. 이제 그만하면 충분해]

    [인정 할 수 없어! 내가 동양의 어린 남자에게 연기로 밀렸다는 걸 받아들이라는 거냐?]

    [내가 볼 때는 두 사람 모두 비슷했어]

    [거짓말! 연기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그 빌어먹을 놈의 연기는 기가 막혔다고. 바로 눈앞에서 캐릭터가 살아 숨 쉬는 느낌이었어]

    이래서야 욕을 하고 싶은 건지 칭찬을 하고 싶은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안되겠어. 다시 만나자고 전해]

    [아, 그게 알······]

    [뭔데? 이제 와서 망설일 문제가 아니잖아!]

    [그쪽에서 그만하자는 연락이 왔어. 캐스팅이 길어지는데다가 생각보다 배역에 잘 맞지 않는다는······]

    [뭐!? 내가 부족하다는 거냐!?]

    낯선 굴욕에 알 베르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평생을 우러름만 받아왔지,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

    [굳이 이런 취급에 우리가 응대 할 필요는 없어. 돌아가자, 알. 난 여전히 내키지 않아]

    [직접 봐야겠어. 직접 보고 답을 들어야겠다고]

    [알]

    [나, 알 베르노야! 내가 이런 취급을 받고 그냥 돌아가면 어떻게 연기를 하겠냐고!]

    자존심 덩어리인 알에게 적당한 타협은 없었다.

    매니저는 끙 소리를 내며 익숙해진 번호를 눌렀다.

    부끄러움은 어째서인지 그만의 몫이었다.

    #

    자존심 강한 사람을 상대하는 법은 단순하다.

    그 자존심을 밑바닥부터 부숴주면 되는 것이다.

    알 베르노의 자존심 원천은 우월주의.

    그의 연기와 인종이 타인보다 낫다는 지독한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렇기에 진호는 그를 흔들었다.

    동양에서 온 젊은 남자가 연기로 찍어 누르는 것부터. 그의 기반이나 마찬가지인 연기를 무시하는 것으로.

    [나, 알 베르노라고!]

    터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자꾸 이런 식으로 회사에 찾아와 행패 부리면 저희도 곤란합니다. 분명 오디션 형식으로 진행되며 결과에 대해서는 확신 할 수 없다고 했을 텐데요?]

    [헛소리 그만 하고 그놈 불러와]

    [아실만 한 분이 왜 이러실까. 내부 평가에서 알 베르노 씨는 배역에 합당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미친 거냐? 내가 누구인지는 제대로 알고 있어?]

    [지겹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알 베르노. 훌륭한 배우라는 건 익히 알고 있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한 술 더떠서 진호는 만나주지도 않았다.

    송학이 대신 나서서 그의 자존심을 밑바닥부터 긁었다.

    세계적인 스타가 언제 이런 취급을 받아봤겠는가.

    붉으락푸르락 하는 얼굴은 불붙은 화약고였다.

    [거기 매니저 분. 속 긁는 소리는 그만 합시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만나서 얘기해야지 이런 식이면 곤란해요]

    보다 못한 알 베르노의 매니저가 나섰다.

    [원하는 건 없습니다. 오디션을 수차례 봤고, 결과는 불합격입니다. 설마 인정을 못하는 겁니까?]

    [알 베르노가 불합격이라고 말하는 겁니까?]

    [네. 진호의 말을 빌리자면 그의 연기는 형식적으로 딱딱해서 더 이상의 아름다움이 없다. 이러더군요]

    [내 연기가 어떻다고!?]

    매니저의 어깨를 팍 재끼며 알 베르노가 앞으로 나섰다. 여차하면 한 대 후려칠 정도로 격노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송학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우월함 밖에 없다. 다른 이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것만을 최고로 여긴다. 그런 연기는 결국 우물 안 개구리 일 뿐. 우리가 원하는 최고의 연기자와는 거리가 멀다. 이게 전문입니다]

    [내, 내 연기가 우물 안 개구리라고?]

    [다시 말하는 것도 지치네요. 당신이 알 베르노라는 유명 배우라는 건 알겠지만, 우리가 찾는 연기자는 아닙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실력이 부족해요]

    [이······!]

    송학의 얼굴 근처까지 손을 뻗었다.

    하지만 핏대를 세운 채 몸만 부들부들 떨었을 뿐 그 이상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았다.

    [돌아가자]

    물러나는 알 베르노의 얼굴은 어쩐지 피로해 보였다.

    #

    알 베르노는 처음으로 생각해 봤다.

    어쩌면 자신의 연기가 우월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

    그건 괴롭고도 고통스러운 생각이었다.

    [······내가 정말로 배역에 맞추지 못할 정도로 엉망인 연기를 했던 건가?]

    [알! 그딴 머저리들 말에는 신경 쓸 필요가 없어. 넌 누가 뭐라고 해도 슈퍼스타야.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들 말에 왜 이렇게 휘둘려?]

    [나도 그것들이 머저리면 좋겠어! 하지만 봤잖아! 그 젊은 동양인의 연기는 신기라고. 엄청났단 말이야! 그런 걸 봐 놓고서 어떻게 무시 할 수 있겠어]

    인정하고 있었기에 더 충격이 컸다.

    어쩌면 진호가 첫 만남에서 했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놈이 더 낫다는 생각을 했다고?’

    무의식적인 생각에 한국행이라는 기묘한 선택을 하게 됐다는 말.

    코웃음 치며 부정했지만 지금 보니 아니었다.

    [혼란스러워. 수십 년 동안 연기를 했지만 한 번도 망설여 본 적이 없어. 나 연기는 남보다 우월했으니까. 그건 태생적인 우월함이라 변하지 않을 거라 여겼단 말이야]

    [알. 지금도 그건 변하지 않았어]

    [그럼 그 놈은 대체 뭔데? 어째서 그런 연기를 할 수 있지? 나는 할 수 없는 연기인데 말이야!]

    알이 불을 쏟듯 말을 뱉었다.

    자신도 할 수 없는 연기라는 말.

    그건 처음으로 자신의 우월함을 부정하는 말이었다.

    머리가 울리고 속이 매스꺼워졌다.

    [그만 해, 알. 이러다가 너 큰일 나겠어]

    [큰일이라면 이미 났어. 이대로 돌아간다면 나는 더 이상 내 연기를 할 수 없을 거야]

    [아, 알!?]

    [그 놈. 아니, 그 사람을 다시 만나봐야겠어. 연락을 넣어 줘. 어떻게든 만남을 성사시켜 달란 말이야]

    [응. 알았어, 알. 알았으니까 일단 진정 해]

    매니저가 황급히 답했다.

    이렇게 무너진 알 베르노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된 거지?’

    돌이켜 생각해 봐도 알 길은 없었다.

    일은 그저 그렇게 됐을 뿐.

    #

    이 정도면 충분하다.

    진호는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

    알 베르노의 자존심을 무너뜨리려고 한 거지 사람을 망가뜨리려 한 게 아니었다.

    [알 베르노 씨는 굉장히 고집이 세네요. 입장은 분명하게 전해드린 거로 아는데요]

    [마지막으로 한 번이다. 다시 연기를 해 보자. 그래도 내가 모자란 것 같으면 포기하겠다]

    [마지막이라는 겁니까?]

    [그래. 마지막]

    진호 눈에는 알 베르노의 연기혼이 보였다.

    전과 같이 화산처럼 타오르고 있기는 했지만 그 기세가 조금 달랐다.

    어딘가 정돈 된 것 같은 느낌.

    차분한 불꽃이었다.

    [주제는 어떤 것으로 할까요?]

    [인생. 인생으로 하지]

    [거창한 주제네요. 좋습니다]

    주제가 정해지고 잠시의 시간.

    알 베르노는 주제에 맞는 캐릭터를 구상했다.

    인생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뭐가 있을까.

    무엇도 될 수 있기에 되레 어려운 과정이었다.

    [······]

    그때, 그의 눈에 말없이 가만히 서 있는 진호가 들어왔다. 그는 고민하는 기색도 걱정하는 기색도 없었다. 차분하기가 물 같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자신도 모르게 알 베르노는 물었다.

    [굳이 고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진호도 자연스럽게 답했다.

    [어째서? 인생이라는 주제가 쉬운 것은 아닐 텐데?]

    [어렵지만 되레 쉽기도 하죠. 그냥 제 인생을 연기하면 되니까요]

    [네 인생을 연기한다고? 그게 연기라고 할 수 있나?]

    [다른 존재를 흉내 내는 걸 연기라고 하죠. 그럼 제가 제 인생을 흉내 내면 연기가 아닌 건가요?]

    [말장난 하지 마라. 그게 어떻게 흉내가 될 수 있지?]

    [그야 인생이라는 건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달라지니까요]

    진호는 여전히 전생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많은 삶을 경험했던, 그때의 잔향은 남아 있다.

    누군가에게는 영광이 누군가에게는 슬픔으로.

    같은 걸 보아도 주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인생이다.

    [알 베르노 씨는 자신의 인생을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그럼 당신은 그것뿐입니다. 오직 하나의 눈으로 하나의 삶을 바라보는 고정된 인물. 그것이 당신의 한계라는 거겠죠]

    [웃기지 마! 그딴 것으로 연기가 바뀐다고?]

    [네. 충분히]

    진호가 말없이 연기를 시작했다.

    정신병으로 고통 받던 어린 시절의 자신이었다.

    아프고 힘들고 괴로워서 모든 걸 포기하고 싶던 상처투성이의 소년.

    하지만 부모가 보는 아이의 삶은 달랐다.

    안쓰럽기도 하고 대견스럽기도 한.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끝없이 바동거리는 자식의 용기가 부모의 눈에는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그를 치료했던 의사는 어떨까?

    그의 친구는?

    그의 동료는?

    수십, 수백의 조각이 맞춰져 빛나는 프리즘처럼.

    한 사람의 인생이 여러 가지 형태로 드러났다.

    어쩌면 자신은 자각하지 못했을 지도 모르는 행복이나 슬픔. 외면했을지 모르는 고통과 번뇌. 하지만 누군가는 알 수 있었던 모습이다.

    [······터무니없어]

    알 베르노는 연기 할 마음조차 먹지 못했다.

    바닥에 주저앉아 그저 눈앞의 빛 무리를 바라봤을 뿐이다.

    그가 알던 세계는 완전히 깨져버렸다.

    [터무니없이 굉장해]

    남은 건 순수한 경탄뿐이었다.

    #

    그 날 이후로 알 베르노의 태도는 180도 달라졌다.

    하루도 빠짐없이 진호를 찾아와 연기에 대해서 묻고 더 나은 방향을 토론했다.

    마치 스승을 찾는 제자의 모습이었다.

    “저러면 캐스팅은 끝난 거죠?”

    “그렇다고 봐야지. 알 베르노라니. 하다하다 저런 사람하고도 일을 하는구나.”

    송학과 최현석만 놀란 것이 아니다.

    캐스팅 소식은 이내 외부로 퍼져나갔고 매일같이 연예 면에 실렸다.

    세계적인 거장이 한국에서 제작하는 영화에 출연을 결심했다는 사실은 굉장한 충격이었다.

    게다가 알 베르노라면 유명한 백인 우월주의자 아닌가.

    그가 동양에서 동양인의 지휘를 받는다는 건 충격을 넘어 파괴적인 뉴스였다.

    향간에서는 진호가 최면을 걸었다는 둥 괴상한 소문까지 나올 정도였다.

    “하긴 나 같아도 못 믿긴 하겠네요. 저 정도 되는 배우를 연기로 길들이다니.”

    “들어보니 알 베르노라서 작업이 가능했다고 하더라. 애초에 결함이 많은 인간이었다나.”

    “그게 더 무섭네요. 무슨 마인드컨트롤도 아니고.”

    “정상급 배우끼리 통하는 어떤 게 있었나 보지.”

    그게 무엇인지 보통사람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이걸로 영화 제작을 본 궤도에 올릴 수 있겠네요. 제대로 홍보도 됐고.”

    “이제부터가 시작이지. 시작부터 관심을 받은 영화가 쉬이 무너지는 경우를 많이 봤잖아. 기대가 클수록 결과에 대한 부담도 커지는 법이야.”

    “진호라면 잘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 다른 건 모르지만 진호 하나는 믿고 갈 수 있지.”

    많은 것이 걸려있는 영화다.

    J.H의 흥망은 결국 주인공인 진호의 활약 여부에 달려 있다.

    소소하게 성공을 하더라도 벽을 넘지 못하면 그것은 실패와 다를 바 없다.

    그건 최현석도 왕호룽도 진호도 알고 있는 사실.

    “진인사대천명이라 하던가.”

    “일단은 최선부터네요.”

    “그래. 최선부터 다하고 보자.”

    하늘에 닿기 전 인간의 노력부터.

    바빠질 시간을 최현석이 일찌감치 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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