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161화 (161/178)
  • Chapter73. 설득은 실력으로(1)

    알 베르노.

    영화판에서 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린 나이부터 연기를 시작하여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인물이다.

    상이라는 상은 안 받은 본 것이 없다.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말하면 될까.

    그의 업적은 당대에 비교 될 사람이 없다.

    하지만 그에게도 단 하나 치명적인 오점이 있다.

    지독한 백인우월주의.

    촬영장에서 다른 인종을 무시하기 일쑤고 캐스팅에서도 심심치 않게 간섭하는 걸로 유명하다.

    워낙 유명하고 인기가 많은 사람인 터라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오점은 오점이었다.

    “한국? 그게 어디에 있는 나라인데?”

    그렇기에 알 베르노는 자신에게 온 캐스팅 제안에 코웃음 칠 수밖에 없었다.

    “아시아에 있는 작은 나라인데······”

    “그건 알아. 그 작은 나라의 이름도 모를 회사가 대체 내게 무슨 볼일이 있다는 건데?”

    “캐스팅이야. 영화에 널 쓰고 싶다나 봐.”

    “하하. 재미있는 농담이네.”

    회사 이름도 적혀 있고 내용도 전부 적혀 있다.

    하지만 알 베르노는 이를 읽지 않았다.

    그에게는 가치 없는 일이었다.

    “답은 안 할 거야?”

    “내가 그런 조잡한 캐스팅에 응할 거 같아?”

    “알. J.H라면 최근에 급부상 하는 회사라고. 너도 들어 봤잖아. 아시아의 미디어 공룡······”

    “집어치워. 그래봐야 애들 장난이라고. 머릿수만 많다고 영화 산업에서 이길 수 있다고 보는 건가? 우습기 짝이 없어.”

    그는 자국 문화와 영화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인종적 우월주의에서 나온 사고.

    자잘한 나라들이 힘을 모아봐야 대수롭지 않다는 것이 그의 평가였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이 개인 메일에 대한 것도 무시하는 거지?”

    “개인 메일? 누가 편지라도 쓴 건가?”

    “홍 진호라고 배우가 직접 썼어.”

    “······호오. 그래?”

    홍 진호, 이름 석 자에는 알 베르노도 반응했다.

    그나마 재주 좀 있는 동양인.

    이름이나마 기억하고 있는 건 그만큼 진호의 연기가 특색이었기 때문이다.

    손을 뻗어 타블릿 피씨를 받아 메일을 읽었다.

    그리 길지 않은, 1장 가량의 편지였다.

    “······하. 하하하. 이 원숭이 새끼가.”

    “왜? 무슨 일인데 그래?”

    “이 건방진 놈이 날 자극하는군. 자신이 있으면 캐스팅에 나와서 연기를 선보이라는 거야.”

    “직접 그리 말했다고?”

    매니저가 깜짝 놀라서 살피니, 알 베르노의 말에 과장은 없었다.

    놀랍도록 직설적으로 도발하는 문장이었다.

    일면식도 없는 나름 급 높은 배우들 사이에서 오갈 메일은 아니었다.

    “알. 이건 좌시 할 수 없어. 정식으로 항의 메일을 발송할게.”

    “흥. 됐어. 그렇게 맞서봐야 우리 품격만 떨어지겠지. 주제도 모르는 놈이 도발을 했으면 가서 눌러주면 그만이야.”

    “하지만 ······”

    “왜? 내가 그 모자란 놈에게 망신이라도 당할 것 같아?”

    “아니. 아니야. 알 너라면 누가 와도 압도 할 수 있지. 다른 누구도 아닌 알 베르노니까.”

    “그래. 내가 알 베르노야.”

    우월함에 의심 따위는 없었다.

    #

    진호가 멀리서 다가오는 알 베르노를 바라봤다.

    프로필이나 영상에서 보던 것보다 체구가 훨씬 컸다.

    키도 190cm는 족히 넘는 대다가 중후함이 가득했다.

    가만히 보기만 해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외모였다.

    [허. 고작 두 사람이 나온 건가?]

    알 베르노를 마중 나온 건 진호와 송학.

    나머지 사람들은 일부러 배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알 베르노. 진호라고 합니다]

    [이름은 알고 있다. 날 맞이하러 나온 건 두 사람이 전부인가?]

    [굳이 시끄럽게 할 필요는 없겠죠. 아니면 사람이라도 잔뜩 풀어서 화려하게 맞이해야 했던 겁니까?]

    [흥. 됐다. 어차피 그런 기대를 한 내가 잘못이니]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알 베르노는 진호를 무시하는 듯 봤고, 진호는 그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 넘겼다.

    [일단 자리부터 옮겨서 이야기를 할까요?]

    [시간 낭비는 필요 없다. 네가 메일에 남긴 이야기는 진짜겠지?]

    [그럼요. 저도 이름 있는 사람입니다. 한 입으로 두 말 하지는 않아요]

    [재미있군. 너도 내 평판에 대해서는 알 텐데?]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알 베르노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렇게 무리를 한 거죠]

    2사옥 별채로 이동했다.

    회사 직원까지 통재해서 주변에는 사람 한 명 없었다.

    [캐스팅 오디션을 하는 대가로 100만 달라를 주겠다. 다만, 실력이 기대에 못 미치면 캐스팅은 없던 일로 하겠다. 도발적인 문장이라고 생각 안 하나?]

    [그 정도 도발은 해야 응할 것 같아서요. 주변 평을 듣자하니 자존심이 대단하다고 하던데]

    [하하. 배짱은 인정해 주지.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아마도 네가 처음일 거다]

    [그렇습니까? 아직 제대로 된 상대를 못 만나 봤던 거 같네요]

    주고받는 말 사이에서 번개가 튀었다.

    알 베르노는 자신의 말에 꼬박꼬박 대꾸하는 진호를 흥미롭게 봤다.

    보통 190cm가 넘는 거구의 자신과 만나면 보통은 주눅 들기 마련이다.

    미국에서도 보통 그러했다.

    더 큰 체구의 사람도 배우 특유의 위압감에 겸손을 드러내곤 했으니까.

    [대본은 읽어 보셨나요?]

    [그런 구닥다리 대본은 필요 없다]

    [그럴 거 같았어요. 어차피 기대도 안했습니다]

    진호는 들고 있던 대본을 던져버렸다.

    도발하려던 알 베르노가 되레 놀랐다.

    [연기는 즉흥. 상황은 알 베르노 씨 매니저가 주어주는 것으로 하죠]

    [하. 지금 날 상대로 즉흥연기를 하겠다는 거냐? 그것도 모르는 주제로?]

    [이런 방식이 아니라면 알 베르노 씨도 납득을 하지 못하겠죠]

    [납득? 무슨 납득 말이냐?]

    [알 베르노 씨가 먼 거리를 비행하면서까지 이곳으로 온 이유]

    [무슨 소리지?]

    [알고 있을 겁니다. 제가 알 베르노 씨보다 연기를 잘 한다는 사실]

    알 베르노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그에게 연기는 자존심 그 자체였다.

    그걸 건드리는 건 화약통에 불을 던지는 격이다.

    ‘진짜로 에고 덩어리군.’

    진호의 눈에도 그건 훤히 보였다.

    불덩어리 같다고 보면 될까?

    알 베르노의 연기 혼은 불기둥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의 삐뚤어진 생각과는 관계없이 연기에 대한 에너지는 진짜였다.

    [······찍소리도 못하게 해 주마]

    [기대되네요]

    관중도 심판도 없이.

    세계적인 배우 두 명이 연기로 맞붙었다.

    #

    사실 즉흥 연기라는 건 순발력에 가깝다.

    정극으로 연기를 하려면 배역에 대한 연구와 끊임없는 연습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즉흥적인 연기를 가지고 승부를 가린다, 라고 말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두 사람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

    [주제는 배역]

    이건 자존심 싸움일 뿐이다.

    누가 이 상황에서 주도권을 가지는가.

    상대적 우월감을 지니는 것으로 승리의 이름을 쟁취하는 유치한 싸움이라 할 수 있다.

    [연기란 이런 거다, 꼬맹이. 너희의 얄팍한 연기로는 흉내 낼 수 없는 깊이. 내면에서 가지고 오는 슬픔과 격정이다]

    알 베르노가 자신이 연기했던 배역을 끄집어냈다.

    70년대 마피아.

    시가라도 문 듯 입가에 손을 대고 눈빛을 차갑게 가져갔다.

    순식간에 배역에 몰입되는 것이 보였다.

    연기력 자체는 거짓이 아니었다.

    [그런 걸 깊이라고 말하다니 우습네요]

    진호가 이에 맞서 형사 배역을 끄집어냈다.

    이미 한 번 깊이 파고들어 본 적 있기에 몰입은 쉬웠다.

    눈앞에 선 마피아에 맞서 삐딱한 태도를 취했다.

    그는 결코 온순한 양이 아니었다.

    눈빛 안에 살의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내 앞에서 건방 떨지 마라. 주제 모르는 원숭이는 언제라도 살 처분 될 수 있어. 이곳은 내 영역이다. 발밑을 기는 버러지 따위가 목소리를 높이지 마]

    알 베르노가 차가운 목소리로 응수했다.

    고압적이고 난폭한 마피아 그 자체였다.

    눈빛이 얼마나 매서운지 뒤에서 보던 송학은 말려야 하나 싶어 전전긍긍했다.

    [깡패새끼 하나가 뚫린 입이라도 잘도 떠드는군. 네놈이 입은 옷, 입에 문 시가, 마시는 와인. 그 어느 것 하나도 네놈 건 없어. 내가 차근차근 네 발밑을 부숴 나락까지 떨어뜨려 주마]

    진호도 지지 않았다.

    뒤틀린 정의감이라 해야 할까.

    찌를 듯 한 살의를 감추지 않은 채 마피아를 옥죄어 갔다.

    [고작 네놈이? 발버둥 쳐 봐야 변하는 건 없어. 태생이 쓰레기인 놈은 마지막도 쓰레기일 뿐이다. 내 전화 한 통이면 네놈은 다시 서류나 뒤적이는 처지가 될 거다]

    [그럼 어디 잘난 손가락을 놀려 봐. 내가 서류를 뒤적이는 게 빠를까 아니면 네놈 머리통에 공기구멍이 나는 것이 빠를까. 내기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하. 미친 새끼를 봤나. 본분도 잊고 그딴 소리나 지껄이는 거냐?]

    [마피아 새끼를 처단하는데 본분이 필요한가? 네놈 머리에 빵. 그리고 내 머리에 빵. 사이좋게 거리에 누우면 누가 과연 쓰레기일까?]

    비릿하게 웃으며 진호가 손가락을 총처럼 구부렸다.

    그 모습에 알 베르노는 순간 움찔했다.

    구부린 손을 권총으로 착각한 것이다.

    [하하. 겁이라도 먹은 건가? 아니면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건가? 누군가 네놈 머리에 구멍을 낼 수 있다는 상상. 우월한 네놈은 당하지 않을 거라 확신 할 수 있어?]

    [완전히 미쳤군. 그런 광기가 네놈의 태생을 말해주는 거다]

    [광기는 누구에게나 있어. 네가 무시한 신발쟁이한테 있을 수도 있고, 깔보고 지나친 장사치에게 있을 수도 있지. 그게 터져 나오는 온도가 다를 뿐이야. 나? 나는 매우 낮지. 네놈 같은 쓰레기를 보면 참지 못할 정도로]

    진호가 바짝 다가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의 거리.

    딱—

    순간, 진호가 이로 알 베르노의 코를 물려고 했다.

    움찔하며 빠진 덕분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알 베르노는 크게 당황했다.

    [이, 이게 뭐하는 짓이냐?]

    [너. 쉬운 먹잇감 같거든]

    알 베르노가 자신의 얼굴을 가리며 물러났다.

    항상 연기 할 때면 얼굴에 자신이 있었던 자신인데 지금은 확신이 없었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

    이 분위기를 막아 세운 건 알 베르노의 매니저.

    그는 황급히 다가와 알을 부축하며 뒤로 빠져나갔다.

    진호는 굳이 막지 않았다.

    [고작 이건가?]

    [······!]

    알아서 찾아 올 것이기 때문이다.

    #

    호텔로 돌아온 알 베르노는 화를 냈다.

    침대를 걷어차고 화장품을 집어 던졌다.

    그럼에도 풀리지 않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진정해, 알. 너답지 않게 왜 이리 흥분하고 그래]

    [시끄러워! 난 멀쩡하다고!]

    [내가 아는 알은 이렇지 않아. 그 동양인에게 뭐라도 느낀 거야?]

    [넌······하. 아니다]

    알이 마른 숨을 삼키며 호흡을 진정시켰다.

    이건 남에게 설명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당사자가 아니라면 느낄 수 없는 기분.

    ‘그 새끼. 진짜로 물려고 그랬어.’

    재빨리 피하지 않았으면 코가 뜯겼을 것이다.

    그 미친 짓.

    단순하게 머리로 그려서 나올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됐어, 알. 그만하고 돌아가자. 저런 광대 놀음에 우리가 계속 어울려 줄 이유는 없잖아]

    [나보도 도망가자는 거냐?]

    [이런 촌극에 휘둘릴 이유가 없다고. 네가 누구야? 알 베르노라고. 이런 우스운 꼴 당할 사람이 아니야]

    [그래. 나는 알 베르노지]

    알 베르노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알 베르노야. 동양의 작은 쥐새끼에게 겁먹고 도망 칠 수는 없어.’

    자신의 신념이 부정당하는 꼴은 인정 못 한다.

    연기는 그의 자아 그 자체.

    항상 우월하기만 했던 그에게 이는 참을 수 없는 굴욕이었다.

    [다시 그놈에게 연락해. 한 번 더 보자고]

    [알!]

    [연락해! 이대로는 돌아 갈 수 없어]

    반드시 본때를 보여준다.

    알 베르노가 이를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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