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71. 시작과 끝은 사람이다(2)
몸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중년 남자.
이름은 박태준.
나이 38살로 연극무대에 몸담은 경험이 있었다.
유명한 작품은 없었지만 근근이 드라마 단역에도 얼굴을 비쳤었다.
전형적인 단역 연기 인생.
그렇게 몇 년을 고생하다 생활고에 지쳐 연극무대를 떠나서 회사 생활을 했었다.
다시 복귀 한 건 그로부터 5년 뒤.
뒤늦게 연기에 불이 붙어서 무대를 전전하다가 오디션 소식을 듣고 찾아온 것이다.
“다시 복귀하신 이유가 뭐죠?”
“회사 생활도 좋았지만 결국 제 꿈은 연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거 같은데. 나이도 적지 않고요.”
“주변에서는 많이 만류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도전하는 것에 나이는 상관없다고 여겼습니다.”
“포부만큼 실력이 있는지 한 번 볼게요.”
박태준이 준비해 온 연기를 시작했다.
다년간 연극무대에서 활동했던 만큼 실력 자체는 제법 단단했다.
하지만 역시 앞선 지원자들과 차별화를 할 만큼의 실력은 아니었다.
‘그럼 저 연기는 뭐지?’
몸 주변에서 흔들리는 연기.
진짜로 몸에 불이 붙은 건 아닐 테고.
진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박태준을 관찰했다.
“······”
그러다 문득.
진호는 연기의 형태가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콕 집어서 말하기는 힘들지만 언젠가 한 번쯤 봤을 법 한 그런 형태.
하지만 대체 어디에서?
뿌연 연기와 나들이라도 간 적이 있는 걸까?
기억을 더듬었다.
‘예전에 별자리를 훑었을 때.’
툭 하고 떠오른 기억.
한창 전생의 힘을 탐구 할 때 별자리로 그 삶들을 늘어놓은 적이 있다.
그때, 스치듯이 봤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수천, 수만의 삶 중 하나.
그 흔적이 박태준의 어깨 위로 나타난 것이다.
“허억. 헉. 제 연기 어떻습니까?”
“박 태준 씨. 태준 씨는 연기를 할 때 어떤 마음으로 하시나요?”
“그야 최선을 다한다는 느낌?”
“그 최선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거죠?”
“으, 음. 배역에 맞는 감정?”
“미묘하네요.”
대체 어째서 전생의 삶 중 하나가 박태준의 어깨 위로 나타난 걸까.
그의 전생이기 때문에?
하지만 왜 그만 연기로 그 전생이 보이는 걸까.
힘이 사라진 지금에 와서야.
“다, 다시 해 보겠습니다! 더 잘 할 수 있어요!”
“조급해 하지 마세요. 연기에만 집중하는 겁니다. 자신의 감정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에만 정신을 쏟으세요.”
“네!”
다시 한 번 박태준이 움직였다.
어깨 위의 연기도 그의 움직임에 따라서 춤을 추었다.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고.
마치 웃고 우는 사람과 같은 모습이었다.
“잠깐만요. 거기서 한 번 숨 고르시고.”
“네?”
“천천히. 감정을 느리게 잡아가세요. 너무 급하니까 자꾸 흐트러지잖아요.”
“아, 네.”
연기의 흔들림에 맞춰서 조언했다.
그러자 박태준의 연기가 조금씩 생기를 띄워갔다.
특색 없던 연기에 생명을 불어넣은 격이다.
같은 연기를 해도 누구는 재미있고 누구는 재미없는 이유가 이런 것에 있다.
사소한 디테일.
미묘한 호흡, 표정의 변화 등.
많은 것을 바꾸지 않아도 연기는 달라 질 수 있다.
“연기가 확 살아나네요.”
진호와 같이 참석한 임원의 평이었다.
별다를 것 없는 지원자를 왜 계속해서 보나 싶었는데, 변한 연기는 제법 그럴싸했다.
“다시 숨 고르시고. 머리에든 생각은 지우고 감정 그대로 갑시다.”
“네, 네!”
진호의 조언이 거듭 될수록 박태준의 연기는 일변했다. 기본기가 있던 사람이기에 그런 것도 있었지만, 무언가 맥을 탁 뚫어 준 느낌이었다.
사람이 변하는 건 작은 발판에 부터라 하던가.
박태준은 연기 인생에서의 터닝 포인트를 잡은 것이다.
“허. 같은 사람이 맞는 겁니까? 연기가 이렇게 달라지다니. 보고도 믿기가 어렵네요.”
“아마······자신의 연기에 대한 확신이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계속 머리에서 구상하고 바꾸고를 반복한 거죠. 그걸 단순하게 하니까 실력이 나오는 겁니다.”
“이야. 그런 건 한 번에 파악하신 겁니까?”
“······”
파악한 건 아니다.
그저 보였을 뿐이다.
박태준 어깨 위의 연기는 그의 부족함과 망설임을 여실이 보여 주었다.
‘눈에 보인 이유는 모르겠지만.’
확 변한 박태준의 연기만 봐도 이건 도움이 됐다.
“이 분도 최종으로 올립시다.”
“네.”
합격 도장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
오디션 최종 결정까지 일주일의 심사 기간이 정해졌다. 정해진 연기를 보고 진호를 포함한 임원들이 평가를 해서 정하는 방식이었다.
처음에는 열 명 중 여덟이 다른 사람을 택했다.
각기 보는 방식이 달랐으니까.
하지만 일주일의 심사 기간이 다 지나갈 무렵에는 만장일치로 한 사람이 뽑혔다.
그게 박태준이었다.
“축하드립니다. 우리와 함께 하게 됐어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할게요!”
“최선은 기본이고 최고를 만들어 봅시다.”
“네!”
이견은 없었다.
일주일의 시간 동안 박태준의 연기는 그야말로 괄목상대. 최종에 올라온 다른 배우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훌륭한 연기를 선보였다.
심지어 누군가는 ‘전에는 가볍게 한 건가?’ 라고 물을 정도였다.
“이번에는 중국으로 넘어가죠.”
“중국이요?”
“네. 주연급 조연으로 쓸 배우가 필요합니다.”
주연 캐스팅 오디션이 끝나자 황천의 임원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한중 합작 영화라는 얘기는 못 들었습니다만.”
“그렇게 거창하게 가는 건 아닙니다. 다만, 모양새 때문에 중국 배우를 섞어서 쓰는 거죠.”
“보여주기라 이건가요?”
“네. 게다가 회장님께서 이번 오디션을 굉장히 만족스럽게 보셨거든요. 비슷한 효과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사람을 고르라 이거군요.”
중국 땅이 얼마나 넓고 배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왕호룽이 원하는 건 그 중에서 옥석을 가려내는 일.
어차피 자본 대 자본의 경쟁을 넘어서면 배우와 배우의 대결이 남는다.
사람들의 선입견과 인종, 언어의 차이를 불식시키려면 어중간한 배우들의 집합으로는 안 된다.
진호의 독특한 식견이 필요한 부분이었다.
“카테고리 분류를 먼저 준비해 주세요.”
“네.”
이번에도 박태준 같은 경우가 또 나올 것인가.
진호에게도 궁금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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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내 오디션에는 600명을 훌쩍 넘는 사람이 모였다. 이 역시 사람을 동원해 1차, 2차, 3차, 4차 등으로 거르고 걸러서 1000명 안쪽으로 추렸다.
그리고 직접 두 눈으로 사람을 선별했다.
“저 사람. 저 사람을 다시 보고 싶군요.”
이곳에도 박태준과 비슷한 경우가 있었다.
쥔쳰이라는 산서성에서 올라온 배우였다.
단역만 빈번하게 출연하던 배우였지만 가지고 있는 잠재력은 대단했다.
진호가 예의 연기를 보고 몇 가지 조언을 해 주자 금세 연기력이 올랐다.
동행한 임원들은 기적이라 놀랐다.
“힘을 다 잃었더니, 하나씩 돌아오는 건가.”
하지만 진호는 기적이 아님을 알았다.
두 눈으로 보는 것은 대상의 잠재력.
아니, 좀 더 쉽게 표현하자면 연기혼이었다.
터질 수 있는데 터지지 못한 연기에 대한 에너지가 시각적으로 확인이 된 것이다.
연기로 나타난 전생의 흔적은 아마도 가장 이해하기 쉬운 척도.
진호만큼 삶에서 연기를 뽑아내는 것에 익숙한 사람은 없으니까.
“모든 걸 포기한 뒤에 다시 돌아오는 건가.”
기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복잡한 기분이었다.
단지 보는 것 하나였지만 다시는 느끼지 못할 힘이었으니 감회가 남달랐다.
게다가 조금 신기하기도 했다.
“필요 할 때 딱 맞춰서 능력이 돌아오다니. 마치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기분이네.”
누군가, 라는 말로 포장했지만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아니, 사람이라기보다는 어떤 존재. 아직도 그 존재가 무엇이라 단정 하지는 못하지만 있는 것만으로 가슴 한 쪽이 든든해진다.
평생을 함께 해 온 친구같은 존재니까.
“다른 조연 오디션은 없습니까?”
행보에 망설임이 없었다.
#
배우 캐스팅이 끝나고 제작에 들어갔다.
여기서 진호는 연출 조언 정도의 인원으로 배정되었다.
실제 작품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대신 나름의 방식으로 조언을 하는 형태였다.
“이렇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샷이 너무 정면에서 들어오니까 느낌이 밋밋한 거 같으니, 측면으로 쭉 밀어서 찍어보죠.”
“측면에서 말입니까?”
“네. 다이나믹한 장면이니 빠르게 교차하는 방식으로.”
하지만 하다보면 어디 조언만으로 만족이 되겠는가.
감독의 허락 하에 연출과 시나리오 등에도 영향을 주었다.
처음에는 과도한 간섭이라 소극적이었던 행동도 뒤에 가서는 점차 과감해졌다.
애초에 조언이라는 것이 질 떨어지는 거였다면 감독이나 스텝들도 받아들이지 않았을 터.
진호의 조언들은 하나같이 영양가 만점이었다.
촬영 시퀀스를 바꾸고 시나리오도 수정했다.
“좀 더 강하게. 몸에 힘을 주어 뱉은 뒤에 쭉 빼는 겁니다.”
“이 악물 듯이 말이죠?”
“한 번에 탁. 뱉어내는 느낌으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역시 연기였다.
비중이 적은 단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진호가 직접 뽑은 사람들이다.
각자 연기 성향이 다르고 잠재력이 드러나는 부분도 상이했다.
이를 총괄적으로 제어 할 수 있는 건 진호가 유일했다.
연기 방향을 제어하고 합이 맞는 씬을 붙이고 폭발적으로 끌어올리는 방식을 제안했다.
한 명으로도 충분했던 씬이 둘, 셋씩 짝을 지어 만들어지니 효과가 굉장했다.
이제 막 잠재력이 터지기 시작한 이들이 서로에게 자극을 받아서 더 열성적으로 연기를 하는 것이다.
“이거 생각보다 좋은 작품이 나오겠는데요?”
“그러게요. 회장님의 의도는 이게 아니었는데.”
“잘 되면 좋은 거죠. 또 압니까, 시작 작품부터 대박을 칠지.”
임원들은 생각으로 잘 굴러가는 영화 제작에 희희낙락했다.
시작은 그저 불씨였지만 활활 타오른다고 나쁠 건 없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생각보다 너무 잘 맞아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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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 미디어 회사 J.H탄생]
석 달의 촬영기간이 지났을 때.
대대적으로 언론에 이야기가 흘러들어갔다.
배우 진호를 중심으로 중국의 황천과 한국의 블루아이. 아시아 계열 미디어 회사들이 힘을 모아 거대 연합 회사를 만든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다들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다.
언어가 다른 아시아 여러 나라들이 연합체계를 만들어 봐야 별 다른 의미가 없었으니까.
무모한 도전.
거대 자본이 유명한 배우 하나를 가지고 무리수를 던진다는 의견이 팽배했다.
[J.H의 첫 번째 영화 예고편 공개]
[색다른 얼굴을. 도전적인 영화에 호평일색]
[또 다른 공룡의 탄생? 작 작품을 선보이다]
하지만 그 반응은 예고편이 나옴과 동시에 들어갔다.
굉장한 수준의 연기와 CG.
완성본이 아님에도 알 수 있는 훌륭한 연출 등이 시청자들의 눈에 각인된 것이다.
이건 어설프게 시도한 작품이 아니었다.
[아시아 통합 미디어 회사. 세계에 도전장을 던지는 것인가?]
한 칼럼의 제목처럼.
도전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