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70. 재회(2)
편 가르기는 언제나 존재해 왔다.
혈통주의, 순혈주의, 유색인종 배척주의 등.
시대가 달라지며 수많은 사람들이 섞여 사는 세상이 됐음에도 그런 편 가르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말은 거창했지만 이번에도 그런 경우였다.
“직접 무력행사를 한다 이겁니까?”
“일전에 있었던 사고. 어쩌면 그것도 그들의 사주일 가능성이 있네. 그 이후로 주춤해서 추가 행동은 없었지만 다시 재기한 마당에 또 노릴 가능성은 충분하지.”
“어째서 절 노리는 걸까요?”
“이유라면 여러 가지가 있지. 문화적 상징성이라고 해야 할까. 자네는 자네 생각 이상으로 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네.”
왕호룽은 그것을 일본과의 경제 마찰에서 봤다.
국가 간의 일에 개인이 참여 할 수 있는 영역은 좁다.
헌데, 진호는 문화적 영향력으로 그 영역을 깨뜨렸다.
이건 특별한 이벤트나 이례적인 상황 따위로 설명이 안 되는 현상이었다.
조직 역시 이를 눈여겨 본 것이다.
“알다시피 최근 트렌드는 정치적 올바름이네. 백인 사회에 흑인이 섞이고 서구권에 아시아인들이 들어서고 있지. 어느 한 쪽에 편중되지 않은 올바람을 추구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이 퍼지고 있어.”
“이런 트렌드를 싫어한다는 건가요?”
“싫어하는 것을 넘어서 두려워하네. 지금껏 당연하게 누리고 있던 것들이 부서지고 있으니까. 문화적으로 봐도 누구도 건드릴 수 없다 생각한 명작들에 이런 정치적 올바름이 개입하고 있지 않은가.”
“개인적으로 썩 좋아하는 방향은 아닙니다만.”
“어차피 흐름을 이용해서 돈 벌려는 자들은 널리고 널려 있네. 문제는 이런 방향성이지. 지나침에 대한 반발로 시류가 누그러진다 해도 결국 방향 자체는 바뀌지 않아.”
지나친 PC즘은 지금도 비난을 받고 있다.
캐릭터의 인종을 바꾸거나 본래 있던 설정을 마음대로 훼손하는 일 등.
하지만 이런 부적절한 예시들이 반발을 산다고 해서 흐름이 바뀔 것은 아니다.
결국 많은 이들이 ‘옳다.’라고 말하는 방향은 과거의 기득권과는 배척되는 상황이니까.
“어렵군요. 이런 이야기는 소설에서나 가능 할 거라 생각했는데.”
“현실에서는 소설보다 더한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네. 상징을 죽여서 흐름을 바꾸는 건 기득권들이 자주 쓰는 방식이지.”
“제가 그 상징이라 이겁니까?”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 총격전에 몸을 던진 영웅. 그 영웅이 부상을 딛고 일어나 다시금 날개를 펼친다. 자네는 이미 문화적 상징이네. 그 흐름을 딛고 더 나아간다면 상상도 못할 파급력이 기다리고 있겠지.”
왕호룽이 생각하는 건 단순한 현상이 아니었다.
인식의 변화.
아시아의 배우가 역량을 인정받아 서구권에서 활동하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그 역시 테두리 안이었다.
만약, 진호가 이런 인식을 바꿀 만큼의 성공을 거두게 된다면 상황은 바뀐다.
정치적 올바름이 유행을 타는 것처럼.
더 이상 서구 문화가 우월한 것이라 이야기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맞다 그르다를 떠나서 이는 큰 변화였다.
“앞으로 자네를 방해하려고 나설 거네. 어쩌면 직접 죽이려 할 수도 있겠지.”
“······제가 그만둬야 하는 겁니까?”
“글쎄. 이건 내가 무어라 말 할 수 없는 영역이네. 목숨을 중히 여긴다면 여기서 멈추는 것도 답이 되겠지. 하지만······”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계시죠.”
“그래. 자네라면 여기서 멈추지 않을 거라는 걸 아네. 그럴 사람이었다면 재기조차 못했을 테니까.”
왕호룽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본 진호라는 사람은 부러질지언정 꺾일 사람이 아니었다.
“해서, 자네에게 한 가지 제안이 있네. 사실 이게 오늘 자네를 만난 목적이라고 할 수 있지.”
“제안이요?”
“그래.”
왕호룽이 숨을 고르고 이야기를 꺼냈다.
귀담아 듣던 진호의 눈이 점차 커져갔다.
이건 그로서도 받아들이기 쉬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진심이십니까?”
“그래.”
진호는 마른 침만을 삼켜야 했다.
#
중국 내 행사는 마무리 됐다.
몰린 인파만큼의 인기를 실감하고 귀국 행렬로 돌아섰다.
감독을 비롯한 모든 스텝들이 즐거워했다.
액수는 달라도 일이 잘 풀리면 결국 보너스로 돌아오는 법이니까.
“······”
하지만 한 사람 만큼은 그런 즐거움에 동참하지 못했다.
“형님. 무슨 고민 있어요?”
“응?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좀 피곤해서.”
“흐응. 며칠 전부터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시던데. 의사 선생님 불러올까요?”
“아니야. 그냥 쉬면 괜찮아 질 거야.”
진호였다.
재혁의 제안에도 고개만 젓고 푹 늘어진 자세를 유지했다.
“저번에 지인 분 만나고 오신다고 나간 뒤부터 그러는 거 같네요. 가서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요?”
“재혁아. 그런 건 물어보는 게 아니야.”
“윽. 죄송해요. 형님이 너무 쳐져 있으니까 걱정돼서 그렇죠.”
“자식이. 쳐져 있긴 누가 쳐져 있다고 그러냐. 그냥 생각 할 일이 있어서 그래.”
그 날.
왕호룽은 상당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을 했다.
며칠을 고민해도 답이 딱 나오지 않을 만큼 복잡한 문제이기도 했다.
‘농담으로 그런 말 할 사람은 아닌데.’
머리만 아플 뿐이었다.
“재혁아. 한 가지만 물어보자.”
“네, 형님. 뭐든지 물어보세요. 성심성의껏 답변 할게요.”
“만약 너한테 누가 100억을 준다고 치자. 근데 이 돈을 받으면 어떤 사명 같은 게 생겨.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지. 네게는 불편 할 수도 어려운 일일 수도 있어. 근데도 넌 돈을 받을 거냐?”
“와. 형님. 100억이면 일단 받고 봐야죠.”
“잘 생각해 봐. 그 돈이 없어도 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어. 근데 그 돈을 받는 순간 네게는 족쇄가 생기는 거야.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지.”
그제야 재혁도 진지하게 생각을 했다.
100억이 큰돈이기는 하지만 자유와 맞바꿀 가치가 있는 것일까.
꽤 진지한 문제였다.
“······저라면 받을 거 같아요. 생각해 봤는데, 어차피 이 바닥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사는 것도 아니잖아요. 100억이면 감수 할 가치가 있다고 봐요.”
“그러냐.”
“형님은 다르게 생각하세요?”
“글쎄. 나도 그걸 잘 모르겠어서 고민이다.”
한 번도 이런 식의 고민은 한 적이 없다.
무엇을 더 높은 가치로 둘 것인가.
선택에 대한 책임을 감내 할 수 있는가.
“도착하면 깨워라.”
“네, 형님.”
눈을 감고 한국에 도착 할 때 까지.
진호의 생각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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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는 이야기를 몇 사람과 우선 공유했다.
소속사 대표인 최현석과 연인인 은서였다.
“그러니까 황천의 대표인 왕호룽이 그런 제안을 했다고?”
“네. 농담 한 점 섞이지 않은 제안이었어요.”
“믿기 어려운 이야기로군. 아무리 그가 널 좋게 본다고 해도.”
“오빤 뭐라고 답했는데?”
“아직 답은 하지 않았어.”
혼자만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답은 할 수 없었다.
“아시아 통합 미디어 회사라.”
“대책 없는 규모라 처음에는 농담인줄 알았어요.”
“나 같아도 그럴 거다. 으르렁거리기 바쁜 아시아 국가를 묶어서 운영하는 것도 그렇지만, 그 대표를 너한테 주겠다니.”
“무늬만 있는 자리도 아니에요. 왕 형님의 말대로라면 실권을 쥐고 휘두르는 자리죠.”
왕호룽의 제안이라는 것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반 아시아 노선의 조직에 맞서서 통합적인 미디어 회사를 만들자는 거였다.
미국의 드림처럼 거대한 규모로.
“하지만 이상하잖아. 아무리 그 왕 회장이라는 사람이 오빠를 좋게 본다고 해도 중국 사람인 걸. 어째서 오빠한테 그 자리를 준다는 거지?”
“두 가지 이유가 있어. 하나는 중국 내의 문화 혁명이야.”
“무, 문화 혁명? 그거 위험한 거 아니야?”
“당은 썩었고 정쟁은 멈추지 않아. 그리고 내부적 문제를 힘으로만 찍어 누르지. 이게 중국의 현실이라는 거야. 그렇기에 이를 깨기 위해 강경책이 필요하다는 것이 형님의 생각이지.”
왕호룽은 어느 정도는 광신적인 인물이다.
황천의 바람을 믿는 옛 태평도의 장각처럼.
그는 문화의 힘이 중국의 병폐를 씻어 낼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다.
“그게 성공 할 거라 믿는 거야?”
“글쎄. 성공 여부와는 별개로 이런 시도조차 없으면 결국 중국은 자멸할 거라는 것이 형님의 생각이니까.”
“으아. 뭔가 좀 무서운 사람 같아.”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쟁을 거치며 그는 더 날카로워졌다.
아마도 이번 제안이 그가 힘을 쏟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두 번째는 뭔데?”
“천인지론이에요.”
“천인?”
“하늘에서 내린 사람만이 막중한 임무를 맡을 수 있다. 형님은 제가 그 천인이라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국적은 달라도 제게 대표를 맡긴다는 거죠.”
“허. 괴상한 이론이군.”
나라를 바꾸고 대륙 간의 문화적 충돌을 다루게 될 사람. 왕호룽은 오직 하늘이 점지한 인물만이 그 선두에 설 수 있다고 굳건히 믿었다.
“만약 오빠가 그 자리를 맡으면 어떻게 되는 건데? 생각만 있다고 일이 성사되는 건 아니잖아. 중국이야 그렇다 치고 일본을 비롯한 다른 나라는 어째?”
“모든 건 자본 아래에서 이루어진다. 이게 형님의 말이야. 돈이 있으면 기회는 생긴다는 거지.”
“······중국의 회장이 그렇게 말하니까 그럴싸해 보이네. 몇 천 억씩 쓴다는 거지?”
“조 단위야.”
“켁.”
은서가 혀를 깨물었다.
돈에 무감각해졌다고는 해도 조 단위는 이야기가 달랐다.
“조 단위로 미디어 회사를 차린 뒤 아시아 통합 영상물을 만들겠다, 이건가?”
“일단은 그래요. 마치 드림의 슈퍼 히어로 프로젝트 같은 거죠.”
“하지만 자본이 있어도 기술력이 부족하면 끝이야. 그쪽은 수십 년 전부터 기술을 쌓아 올렸어. 이걸 돈으로 전부 메울 수 있다고 봐?”
“황천은 일찌감치 기술자들을 포섭하고 있었어요. 미국의 유명 CG팀이나 프로그래머들. 리스트를 직접 보면 놀랄 겁니다.”
황천의 중국몽은 꽤나 높은 단계까지 진척됐었다.
다만 그것을 사용해서 나갈 만큼의 성숙도가 부족했을 뿐.
“말인즉슨, 모든 기반은 황천에서 제공 할 테니 얼굴 마담으로 네가 오라는 거 아니냐.”
“전체적으로 보자면 그렇죠. 아무리 기술력이 좋고 자본이 충만하다고 해도 이를 성사시킬 사람이 없으면 안 되니까요.”
“너라면. 되는 거냐?”
“······”
진호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머리로 그림을 그려 보아도 쉽게 답이 안 나오는 문제였다.
왕호룽의 제안은 현실적인 미디어 판도를 완전히 깨뜨리는 시도였다.
과연 사람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리고 이런 환경에서 인정받을 제작물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네게도 도전이라 이거구나.”
“네. 솔직히 장담은 못하겠어요. 개인이 할리우드에 도전해서 성공하는 것만 해도 버거운 일이잖아요. 직접 만든 제작물로 상대를 할 수 있을까요?”
“몇 몇 중국의 영화들이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수였지. 실제로 호응을 받아 냈다고 보기는 어려워.”
“선입견도 있고, 거대 기업들과의 자본 싸움도 있을 거예요. 유통이나 배급은 두 말 할 것도 없죠.”
늘어놓고 보니 상당히 가능성이 낮은 도박이었다.
기존 체계에 도전장을 내미는 격이니까.
“그래서 오빠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확신이 안 서서 이렇게 묻고 있잖아.”
“아니, 주변에 자잘한 건 다 내려놓고 생각해 보자고. 해 보고 싶어, 아니야?”
“그렇게 쉬운 문제가······”
“성공과 실패는 따지지 말자. 하고 싶은지, 하고 싶지 않은지. 오직 그것만 보자, 오빠.”
진호가 입술을 떼지 못했다.
왕호룽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 그가 지는 짐들은 천근이라 불러도 모자라다.
회사 식구들, 가족, 은서, 지인들.
모두가 힘들어 질지도 모르는 일.
어쩌면 이룬 것조차 모두 잃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응. 어떤 건데?”
“하지만 그래도 도전해 보고 싶어. 다른 모든 건 제쳐 두고라도 직접 미디어 공룡과 싸워보고 싶어. 어디까지 통할 수 있는 건지. 어디까지 올라 갈 수 있는지.”
끝없이 고민하던 이유.
모든 불확실한 조건들 사이에서도 결국 하고 싶기 때문이다.
욕심이고 실수일지 모르는 일임에도 말이다.
“그럼 됐네. 난 찬성.”
“······그래. 이만큼 키웠으면 됐다. 이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날뛰어도 되겠지. 더 큰 물이 있다면 나도 전력으로 서포트 해 주마.”
“그렇게 간단하게 정해도 되는 겁니까?”
“너랑 일하면서 알게 된 게 하나 있지. 믿고 간다. 그러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다.”
“히히. 나도 대표님하고 같은 생각이야. 오빠라면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해 낼 거라는 믿음이 있어. 오빠는 그런 남자니까.”
믿음이 기쁜 걸까.
아니면 허락에 마음이 풀어진 걸까.
진호는 눈시울이 붉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고마워. 고맙습니다.”
목소리마저 잘게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