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154화 (154/178)
  • Chapter69. 스타의 품격(3)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었다.

    진호는 몇 날 며칠에 걸쳐서 연구한 캐릭터를 촬영장에서 펼쳐 보였다.

    고려 시대에서 넘어온 무사.

    파락호 같은 성격에 자유분방함을 가지고 있는 터라 시대를 넘어서도 적응은 손쉽게 했다.

    철부지의 말투를 따라하고 갑옷을 입은 채 PC방에 가기도 했다.

    독특하고 날 것 같은 캐릭터였다.

    하지만 그 내면에는 고려 시대에서 품고 온 아픈 사연도 있었다.

    간호 그런 면을 눈빛이나 대사 등에서 드러내는 것이 캐릭터의 주요 포인트였다.

    “오케이. 좋습니다.”

    “감독님, 한 번만 더 가면 안 될 까요?”

    “어디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느낌이 살짝 뜬 거 같아서요. 여기서는 분위기 좀 잡으면서 무거움을 주고 싶어요.”

    진호는 촬영을 매우 빡빡하게 진행했다.

    감독이 오케이 사인을 내려도 만족하지 못하면 몇 번이나 다시 촬영했다.

    이에 불만을 드러내는 스텝들도 제법 있었지만, 그럴 때면 직접 찾아가 양해를 구했다.

    커피도 사고 영양제도 사고.

    사비로 밥차도 불러서 점심과 저녁을 제공했다.

    최고의 결과를 위해서는 많은 것을 신경 써야 했다.

    “······와. 진짜 징하게 한다.”

    “쩔지. 저게 스타 배우의 품격이라 이거야.”

    재혁은 그런 진호의 일거수일투족에 혀를 내둘렀다.

    매니저의 말대로 그게 품격이라면 과연 자신이 따라 할 수 있을지 가늠도 안 됐다.

    “솔직히 말해서 그냥 연기만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타고난 재능이든 뭐든. 근데 사람이 저렇게까지 열심히 할 거라고는······”

    “왜 그런 말하잖아. 백조가 우아해 보이려고 물 밑에서 버둥거린다고. 스타가 된 이면에 어떤 노력이 있었는지를 알아야 하는 거지.”

    “내가 저걸 따라 할 수 있을까요?”

    “다 따라하면 과로사 할 걸? 당장은 할 수 있는 거만 해 봐라. 저거 반만 해도 어디 가서 못났다는 소리는 안 들을 거다.”

    재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눈이 있고 귀가 있는 사람.

    진호에 대한 평가가 다른 배우들과 비교해서 어떻게 나오는지 정도는 안다.

    “······선배님! 그건 제가 할게요!”

    스타의 품격이라는 것.

    주변을 감화시키는 향기와도 같았다.

    #

    촬영을 진행하다보면 각기 다른 방식으로 교류가 이루어지는 걸 볼 수 있다.

    친화력이 좋고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촬영 외적인 사석에서도 자주 얼굴을 드러낸다.

    스텝들 회식이나 배우 모임 등 말이다.

    반면 일적인 만남을 제외하고 모습을 드러내기를 꺼려하는 사람도 있다.

    현장에서도 격식을 취하고 어느 정도의 거리를 취한다.

    물론, 어느 쪽이 좋다고 말은 할 수 없다.

    “진호 씨. 오늘 회식 옵니까?”

    “또 회식입니까? 다들 체력도 좋으셔.”

    “으하하. 다 먹고 마시자고 하는 일인데 쥐어짜서라도 가야지. 스케줄 없으면 같이 가서 한 잔 합시다.”

    “선배님이 권하는데 거부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죠.”

    진호는 둘의 중간 정도다.

    일적으로 만난 사이에는 격식을 취하며 선을 긋지만 밖으로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지는 않는다.

    “역시 우리 스타. 다른 애들처럼 난 척 안 해서 좋다니까.”

    “전 그냥 술이 당겨서 가는 건데요?”

    “흐흐. 그래, 그렇지. 오늘 새벽까지 달려 보자고.”

    “그러다가 또 형수님한테 잡혀 가요.”

    “움하하. 잡아가려면 잡아가 보라지.”

    술과 일 사이로 단련된 베테랑들에 맞추려면 진호도 버겁기는 하지만 그 안에서 나름 얻는 게 있다.

    술이 들어가야 진심이 나온다고 하지 않는가.

    술자리에서 툭툭 뱉는 연기에 대한 생각이나 철학 등은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보물이다.

    물론, 90%이상은 주정을 받아주는 역할이지만.

    “저, 선배님. 저도 갈 수 있을까요?”

    “오. 재혁이. 술자리는 어려워서 안 온다면서.”

    “저도 좀 어울려 볼까 해서요.”

    “흐흐. 그래. 술자리에 젊은 애 끼면 우리야 좋지. 다 같이 어려지는 기분이라고.”

    재혁도 슬그머니 술자리에 끼었다.

    평소 이런 술자리를 싫어하던 재혁이었지만 촬영을 하면서 살짝 생각을 바꿨다.

    가끔은 이렇게 어울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걸로.

    “숙취 음료 미리 사 놔.”

    “······네?”

    “선배님들 속도 따라가려면 맨몸으로는 힘들어. 미리 사 놔.”

    툭툭, 어깨를 두드리는 진호.

    그 모습에 재혁은 잠깐 후회를 해 봤다.

    어쩌면 잘못된 선택이지 않았나 하는.

    #

    “우웨에에에엑!!”

    후회 할 일은 항상 현실로 다가오는 법.

    재혁은 3차 부대찌개 집에서 고꾸라졌다.

    변기를 부여잡고 게워내는 모습에 배우의 멋 따위는 없었다.

    “자자, 물 마셔. 그러니까 적당히 빠졌어야지.”

    “끄어어억. 컥. 마, 마시다 보니까······”

    “쯧쯧. 자기 주량도 모르고 달리면 어째. 물마시고 찬바람 좀 쐐.”

    “흐어어. 아니, 진호 형님은 어떻게 아직도 멀쩡합니까? 저보다 더 마신 거 같은데.”

    “다 요령이지.”

    진호는 술이 센 편이다.

    원래도 그랬는데 전생에 대한 힘을 쓰고난 뒤부터는 더 강해졌었다.

    그건 힘이 사라진 지금도 마찬가지.

    소주 네다섯 병 정도는 우스웠다.

    “끌끌. 고 녀석 뻗은 거냐?”

    “아, 선생님. 재혁이가 힘들어 해서 바람 좀 쐬게 할까 합니다.”

    “그래. 저 고주망태들 따라오려면 힘들지.”

    화장실은 야외 테라스로 연결되어 있었다.

    흡연가인 윤무환이 담배를 툭툭 치며 지나갔다.

    “정신 좀 드냐?”

    “······네. 입안에서 3일 삭은 청국장 맛이 나긴 하지만요.”

    “흐흐. 그 정도면 멀쩡하네. 가자, 바람 좀 쐬면 나아 질 거야.”

    진호가 늘어진 재력을 부축해서 테라스로 나갔다.

    윤무환은 이미 담배를 꼬나 문 채 야경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클클. 꼭 말린 오징어 같구나.”

    “끄응. 저, 지금 대꾸 할 기력도 없습니다.”

    “자식이. 그때는 바락바락 대들어 놓고서. 지금은 힘드냐?”

    “아, 선생님. 제발요. 지나간 일은 지나갈 일로.”

    “크흐흐. 들어가면 나랑 대작 좀 하자.”

    재혁이 살려달라는 듯 손을 비볐다.

    리딩에서 거하게 충돌했던 것 치고는 둘의 관계도 썩 나빠 보이지 않았다.

    “진호 네가 고생 좀 했다.”

    “제가요?”

    “그래. 저 싹수없는 놈 사람 하나 만들었잖아. 맡겨달라는 말에도 영 내키지 않았는데, 지금 꼴 보니까 그래도 구색은 갖췄네.”

    “제가 뭘 또 싹수가 없습니까.”

    “넌 인마 진호한테 감사해라. 처음 봤던 그 꼴이면 이 바닥에서 오래 못 갔어. 우리가 뒷방 늙은이라고 이 바닥에서 힘이 없는 거 같냐? 다들 한 다리 건너면 PD고 국장이야. 쓴 소리 돌면 너 써줄 사람이 남아 있을 거 같아?”

    툭 쏘는 윤무환의 말에 재혁이 앓는 얼굴을 했다.

    “한 방에 꽝 떠서 구름 위로 나는 놈들이야 우리가 무슨 대수겠냐만, 그렇지 않은 애들은 결국 사람 만나고 사람 대하는 일이라고.”

    “······저도 진호 형님한테 많이 배웠거든요.”

    “그러니까 감사하라고. 어디 가서 저런 걸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배우겠냐. 그것도 대충 나이 좀 많은 배우도 아니고 톱 찍은 배우한테.”

    재혁이 돌아보자 진호는 그냥 웃기만 했다.

    그는 그저 언제나처럼 했을 뿐이다.

    그 모습에서 얻는 것이 있고 없고는 재혁의 몫이었을 뿐.

    “그리고 진호 너는······”

    이번에는 진호였다.

    윤무환이 피고 있던 담배를 눌러서 끄며 말을 이었다.

    “힘 좀 빼라. 너무 완벽함을 추구하다가는 제풀에 꺾일 수 있어.”

    “그렇게 보였나요?”

    “그래. 사고니 뭐니 자세한 내용이야 모르지만, 너무 조바심 낼 거 없어. 지금도 충분히 훌륭하게 하고 있으니까.”

    “······그렇군요.”

    진호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자신에게 이런 얘기를 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 강렬한 연기에 칭송하고 부활에 경탄하기 바빴으니까.

    “인생은 길고 연기는 더 길어. 평생을 연기와 함께 할 거면 같이 걷는 법을 배워야 해. 죽어라 우겨넣다가 배역에 함몰되어 망가지는 애들이 얼마나 많냐.”

    “같이 걷는 법이라.”

    “뭐, 나도 이 나이 먹도록 연기의 연자도 제대로 못 배웠지만. 그래도 젊은 애들한테 한 두 마디 정도는 해 줄 수 있게 않겠냐?”

    “전 선생님에 항상 감탄하고 있습니다.”

    “흐흐, 아부는. 하여튼 힘 좀 빼라는 거다. 그렇게 해도 너라면 충분히 날 수 있으니까.”

    툭툭, 어깨를 두드리며 윤무환이 지나쳤다.

    진호는 그 감촉을 잠시 머금다 떠나간 자리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충고를 들을 기회라는 건 의외로 얼마 없다.

    “재혁아, 4차 가야지.”

    “웩.”

    고맙고 기뻤다.

    #

    드라마 첫 방송 날짜가 잡혔다.

    홍보 영상이 제작되고 방송 전 행사가 여러 가지로 잡혔다.

    바쁘기로는 촬영 때보다 더했다.

    “많이 힘들지?”

    은서와 만날 시간조차 부족했다.

    “이래저래 정식 복귀 작이니까. 제작사 쪽에서도 꽤나 빡빡하게 일정을 돌리나 봐.”

    “몇 개는 그냥 빼자. 굳이 다 참석 할 필요는 없잖아.”

    “그래도 어떻게 그러냐. 기다려준 팬들과 만나는 자리인데. 며칠 더 고생하고 그 뒤에 쉬는 편이 나아.”

    뮤직비디오와 광고를 찍었지만 제대로 연기로 복귀하는 건 이번 드라마가 처음이다.

    그만큼 세간의 관심이 클 수밖에 없다.

    과연 연기력이 돌아왔을까.

    과거 진호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을까.

    기다림이 길었던 만큼 사람들의 기대감도 큰 것이다.

    “오빠는 어때. 드라마 잘 뽑힌 거 같아?”

    “배역에는 최선을 다했지. 상대역도 괜찮고, 조연 분들의 연기도 훌륭했어. 특히, CG에 공을 많이 들여서 편집본이 볼 만 하더라.”

    “흐응. 상대 여배우가 예뻐서 그런 건 아니고?”

    “어허, 무슨 소리를. 끝나자마자 너 보려고 뛰어 온 거 안 보이냐?”

    “연락처는 받았지?”

    “안 받았어, 안 받았어. 그쪽에서도 웃으면서 말하더라. 연락처 받고 싶은데 그러면 너 화낼 거 같다고.”

    그제야 은서가 웃으며 안겨왔다.

    일은 일, 개인사는 개인사.

    딱 부러지게 나눈다고는 하지만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겠는가.

    “이번 드라마. 전부 사전 녹화로 진행되는 건가?”

    “응. 추가 편성이 없는 한은 아마 이대로 끝일 거야.”

    “시청률 따라 달라지겠네?”

    “스토리 공백을 만들어 뒀데. 근데, 굳이 뭐 연장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나 싶어. 지금 걸로도 충분히 완성도가 높게 나왔거든.”

    “그래? 나, 살짝 보여주면 안 될까?”

    “드라마 내용?”

    “응. 남들보다 먼저 보고 싶어.”

    진호가 잠시 머뭇거리다 일어났다.

    지겹도록 한 연기를 집에 와서도 또 하는 건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연인 아닌가.

    못 해 줄 것도 없다.

    근처에 굴러다니던 잡지를 둘둘 말아서 검처럼 쥐었다.

    “고려 무사, 백 동환이라 하오.”

    “꺄! 무사 오빠!”

    두 손을 모아 하트를 만드는 은서.

    진호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은 채 작중 배역을 멋들어지게 연기했다.

    소파를 방방 뛰며 대사하는 꼴이 우스울 수 있지만 이것도 하나의 역할이었다.

    연인 앞에서 광대가 된들 어떠하겠는가.

    이곳에서 만큼은 스타가 아니어도 좋았다.

    “공주는 입맞춤을 받으라!”

    “오시오, 무사님!”

    젊은 남녀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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