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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만 전생 배우-153화 (153/178)
  • Chapter69. 스타의 품격(2)

    윤무환은 얼굴까지 붉었다.

    숨을 거칠게 내쉬더니 들고 있던 대본을 테이블에 휙 던지기까지 했다.

    “선배님, 진정하시죠.”

    바로 옆자리에 있던 다른 배우가 말렸다.

    “지금 진정하게 됐나? 저 되바라진 연기를 보라고. 배역을 얼마나 가볍게 봤으면 이런 자리에서 저따위로 하겠어!?”

    “끄응. 선배님.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보면 뭐!? 내가 못 할 말이라도 했나? 리딩이라고 어설프게 해서 좋은 게 아니라고!”

    씩씩거리며 쏟아내는 목소리에 사방이 조용해졌다.

    이 말의 표적이 된 재혁은 붉어진 얼굴을 한 채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썩 납득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저 당장의 화를 피해 숙이는 얼굴.

    “······대충 한 건 아닌데.”

    그러니 이런 말까지 중얼거릴 수 있는 것이다.

    “뭐!?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아이고, 선배님.”

    “뭐가요? 내가 뭐 크게 잘못 했습니까? 그냥 비슷하게 맞춰서 연기를 했는데. 괜히 화를 내고 그러셔.”

    “야야, 재혁아. 넌 조용히 하고 있어.”

    조금 잠잠해지나 싶던 불씨에 기름을 부은 격이다.

    윤무환이 팔까지 걷으며 날뛰자 다른 배우들이 황급히 둘 사이를 중재했다.

    배우간의 마찰.

    흔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희귀한 볼일도 아니었다.

    “재혁아. 그만 해라. 잘못 했으면 선배님께 사과드리고 넘어가야지. 하나하나 대들 생각이야?”

    결국 보다 못한 진호가 나섰다.

    역정 내던 윤무환도 그가 나서자 한 걸음 물러나 주었다.

    “죄, 죄송합니다. 근데 뭐 그렇게 소리 칠 만큼 잘못 한 것도 아닌데 너무 하잖아요.”

    “너. 아직도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거냐?”

    “리딩이잖아요. 정식 촬영도 아닌데, 대사 합만 잘 맞추면 그만이죠. 나름대로 분위기 맞춰서 연기했는데 너무하시네.”

    “하아. 넌 기초가 안 되어 있구나.”

    재혁의 연기는 말 그대로 대사 맞추기에 불과했다.

    힘주어 씬을 소화하던 윤무환이 무안해질 만큼 딱딱했다.

    과하게 화를 내기는 했으나 행동에 이유가 없는 건 아니었다.

    “선생님, 저랑 씬 맞춰보죠.”

    “으, 응?”

    “재혁이랑 했던 씬 말입니다. 저랑 맞춰 보죠. 저기 저 천둥벌거숭이가 뭘 놓치고 지나가는지 알려줘야지 않겠습니까.”

    “대사는?”

    “이미 외웠습니다.”

    진호는 자신의 배역만이 아니라 대본 전체를 다 외웠다. 전체 흐름을 알기 위해서 일부러 전체 대본을 구해서 연구한 덕이다.

    윤무환이 ‘이것 봐라’란 얼굴을 한 채 끄덕였다.

    “씬 3-2. 시작하겠습니다.”

    진호는 별다른 준비 없이 곧바로 연기에 들어갔다.

    재역의 배역은 여자주인공의 남동생 역할.

    조부인 윤무환과 자주 마찰을 일으키는 인물이다.

    “아, 할아버지! 그건 너무하죠! 저도 가오가 있는데, 겨우 2만원 가지고 어떻게 가요? 애들이 절 병신으로 본다고요!”

    “이놈이, 그래도! 할애비 앞에서 병신이 뭐냐, 병신이! 그리고 2만원이 어디 뉘집 자식이야? 부르면 나오게? 땅 파면 나와? 집에서 빈둥빈둥 놀고먹는 자식이 어디서 헛소리야?”

    “아, 진짜! 할아버지, 우리 할아버지 맞아요? 남들은 대학 들어가면 차도 사주고 그러더만! 난 구겨진 몇 푼 가지고 애들 만나러 가야 해!”

    “이놈아! 우리가 무슨 재벌가냐? 없으면 없는 대로 아껴 써야지! 누나는 밥벌이 한다고 그 고생을 하는데, 하나 있는 동생이란 놈은 아주 그냥 백수 짓만 하고!”

    순간 장면이 그려질 정도의 합이었다.

    조금은 낡은 아파트 현관.

    후줄근한 집업 티셔츠에 더벅머리를 한 청년이 꼬장꼬장해 보이는 노인과 말싸움을 하는 장면이었다.

    성격, 상황, 배경 등.

    한 합에서 모든 것이 드러났다.

    “잠깐 끊고 가시죠.”

    “흠. 흠. 그래. 어떤가?”

    “작가님. 중간에 호흡이 조금 길지 않나요? 살짝 끊고 한 번씩 더 주고받는 걸로 가죠. 윤 선생님. 어떤가요?”

    “첫 번째 대사에서?”

    “네. 한 번 쏘아보고 난 뒤에 재혁이 말 하는 거죠. 아이 씨, 그냥 애들이 그런다고요. 이 정도로 해서 한 번 돌아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합니다.”

    “그럼 너무 순해지지 않나?”

    “전 그편이 나을 거 같아요.”

    윤무환은 고개를 젓고 작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넌 어떠냐, 재혁아?”

    진호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 재혁에게 물었다.

    “네, 네?”

    “어떠냐고. 네 씬이잖아. 어떤 방식으로 대화가 흘러가는 것이 나을 거 같냐?”

    “그건······잘 모르겠어요.”

    “네가 생각 한 캐릭터가 있는 거 아니었어? 주변 분위기, 대사를 주고받는 캐릭터의 성격. 이런 걸 고려해서 가장 어울리는 걸 뽑아내야지. 설마 연기라는 게 주어진 대사만 읊으면 끝이라고 본 거냐?”

    “······”

    재혁이 입만 달싹일 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냥 그대로 할 거면 굳이 바쁜 시간을 쪼개서 리딩을 할까. 선배님들은 굳이 열을 내며 진지하게 연기를 하실까. 다 이유가 있어서야. 진지하게 부딪쳐 봐야 모습이 그려지거든. 더 어울리는 장면도 그려지고. 대충 말이나 주고받는 자리가 아니야, 이곳은.”

    “······죄송합니다.”

    그제야 고개를 푹 숙이며 사과하는 재혁.

    납득했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 번에 압도 된 건 사실이었다.

    “아직 어리고 이 바닥 경험이 적으니 그럴 수 있어. 하지만 제대로 연기하고 싶으면 명심해 둬. 모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최선이라는 걸 시도해 볼 수조차 없다는 걸.”

    “······네. 명심할게요.”

    진호가 축 늘어진 재혁을 한 동안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윤무환을 비롯해서 감독과 작가진들.

    장내의 모든 사람들이 그만 바라보고 있었다.

    “해프닝으로 넘어갈까요? 윤 선생님도 한 번만 봐주시죠. 제가 잘 지도하겠습니다.”

    “허. 허허. 이거 뭐 아니라고 할 수 없겠구만. 내가 진호 씨 봐서 특별히 넘어가 주겠어. 하하.”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렇게 해프닝으로.

    파탄 날 뻔 했던 사고는 무사히 봉합되었다.

    #

    재혁은 납득하지 못했다.

    진호의 말에 일리가 있는 건 알겠다.

    리딩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하는지도 이해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그 정도로 욕먹을 짓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좀 너무하지 않냐? 그래도 팬인데. 처음부터 살갑게 굴었는데 내 편 좀 들어주지.”

    매니저에게 투덜거렸다.

    “야, 야. 스타가 괜히 스타겠냐. 그냥 보고 배워. 나이 많은 배우들 앞에서 네 편 들면 꼴이 뭐가 되겠냐?”

    “아, 형. 형은 누구 편인데?”

    “나? 나야 당연히 돈 주는 대표님이지. 너는 인마 서비스업 고객 1번이라고. 자식아.”

    “진짜 치사해라. 주변에 어떻게 내 편이 한 명도 없냐?”

    입술을 비죽 내밀며 투덜거리는 재혁.

    그런 재혁의 머리를 매니저가 양 손으로 콱 눌렀다.

    “야. 너, 이번에 드라마 들어가면서 대표님한테 뭐라고 했어? 쥐 죽은 듯이 보고 배운다고 했지?”

    “그건 진호 형님 나온다니까 한 말이지. 내가 뭐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럴 이유가 있나?”

    “아이고, 이 건방진 애새끼를 봤나. 나무에 묶어다가 3박 4일은 패야 정신을 차릴 텐데.”

    “형은 말 좀 살벌하게 하지 마라.”

    “요즘 애들이 안 맞아서 그래요. 작정하고 두들겨 맞아야 정신이 번쩍 드는데. 나 때 같으면 그딴 말 하면 아작 났다고.”

    “으으. 꼰대.”

    “자식아. 꼰대 시절에도 배울 게 있는 법이야.”

    재혁이 진저리를 쳤다.

    오래되고 고루한 것들은 질색이었다.

    그건 연기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그때 그 연기는 좋았는데······’

    리딩 때의 모습을 떠올리다 고개를 푸르르 흔들었다.

    인정하자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촬영장 도착하면 깨워 주기나 해.”

    안대를 쓰고 눈을 감아 버렸다.

    #

    촬영장에 도착한 재혁은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는 진호를 발견했다.

    몇 몇 나이 많은 배우들과 함께였다.

    늦은 건가 싶어서 시계를 봤지만 그건 아니었다.

    “진호 형님. 그리고 저기 선생님들 안녕하세요.”

    비죽비죽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오. 왔구나.”

    “왜 이렇게 일찍 나오셨어요? 전 제가 제일 먼저 온 거라고 생각했는데.”

    “촬영장 분위기 좀 보고 다른 배우들하고 얘기 하려고 나왔지. 미리 와서 한 바퀴 돌고 그러면 연기 할 때 도움이 된다.”

    “······에이. 설마요.”

    설마 하는 재혁의 얼굴에도 진호는 웃기만 했다.

    “따라와 봐.”

    “어딜 가요? 촬영 준비 안 해요?”

    “이것도 준비 과정이야. 너 조명 감독님들하고 인사했어?”

    “아뇨.”

    “그러면 안 되지. 여기 스텝분들은 전부 널 위해서 일하시는 거라고. 오고 갈 때 마다 꼭 인사하고 한두 마디씩 건네.”

    이번에도 재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조명 감독하고 연기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서 감독님, 여기 재혁이요.”

    “아, 안녕하세요.”

    “오, 그래요. 반가워요 재혁 씨.”

    그래도 등 떠 미니 일단 인사는 했다.

    “오늘 재혁이 타이트하게 샷 많이 들어오죠?”

    “네. 꽤 자주 들어갑니다.”

    “조명 잘 부탁드려요. 너무 밝으면 귀신 같으니까 생기 있는 정도로. 아시죠?”

    “하하. 진호 씨 부탁이라면 신경 써서 해 드려야죠. 오늘 최상으로 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조명 감독을 거쳐서 오디오, 촬영, 분장, 기타 다른 스텝들까지 전부 인사를 건넸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뻘 짓인가 싶던 재혁도 뒤에서는 의미를 이해했다.

    “이제 인사하는 이유를 알겠지?”

    “은근히 사람 가려가면서 해주는 게 있네요.”

    “불평하지 마라. 일이긴 하지만 감독님들도 사람이야. 마음 가는 사람한테는 신경 써 주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소홀한 게 사실이라고.”

    “끄응. 그런 건 생각 못 해 봤어요.”

    “내가 말했지. 항상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아무리 사소한 거라고 소홀히 여겨서는 안 돼. 모든 것이 연기와 직결된다고 생각하고 행동해.”

    “······그렇게 하면 피곤해서 어떻게 살아요?”

    진호가 빙글 돌아 재혁과 마주섰다.

    “다른 직장은 어떨 거 같냐?”

    “네?”

    “농부는? 광부는? 회사원은? 어디 쉬운 일이 있을 거 같아? 네가 그 일에서 성공하고 싶다면 어설프면 안 돼. 대충 이 정도, 라는 생각으로는 성공 할 수 없어.”

    “진호 형님은 굉장히 피곤하게 생활하시네요.”

    “피곤하지. 근데 우리가 이정도로 피곤하지 않으면 그 많은 명예와 그 많은 사랑과 그 많은 돈을 벌 자격이 있다고 보냐?”

    진호는 광고 회사원을 거쳐서 정상에서 다시 나락까지 가 봤던 사람이다.

    그렇기에 위치의 대가라는 것이 얼마나 혹독한지 잘 알고 있다.

    “성공하고 싶으면 네 일에 품격을 갖춰.”

    “품격이요?”

    “남을 배려하고, 항상 주변을 생각하고, 행동에 자만하지 않는. 품격을 갖추고 실력을 키우면 성공을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거야.”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근데 진호 형님이 그렇게 말하니까 느낌은 있네요.”

    “한 번에 이해할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래도 넌 아주 싹수가 없는 놈 같진 않아서 이렇게 말 해 주는 거야. 완전 되바라진 놈이었으면 나도 그냥 좋은 소리만 하다가 일 보고 헤어졌을 거다.”

    재혁은 살짝 움찔했다.

    웃으며 말하는 진호였지만 그 눈빛이 어쩐지 매서웠기 때문이다.

    마치 ‘너도 싹수없으면 끊어버린다.’라는 협박 같기도 했다.

    “그럼 촬영 준비 끝내러 가자.”

    “네.”

    자신도 모르게 답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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