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67. 파트너(2)
진호가 세영 그룹의 광고 모델이 됐다는 사실은 빠르게 퍼졌다.
대상이 맥주라는 사실도.
“전 회사랑은 계약을 끊고 경쟁업체로 넘어 간 거야?”
“자기가 끊었겠냐. 사고 이후로 끊긴 거지. 그 동안 다른 광고로 돌려막다가 이번에 임강준하고 계약했잖아. 정면으로 붙자 이거야.”
“이걸 치사하다고 해야 하나?”
“회사가 다 그렇지. 난 그보다 누가 이길지가 궁금하다. 최근 들어 뜨고 있는 신예 남자 배우와 홍진호. 정면에서 붙으면 실적으로 승패가 갈릴 거잖아.”
사람들은 세영과 영신이 맥주라는 상품을 두고 정면에서 부딪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각자 임강준과 진호라는 광고 모델을 사용해서 치르는 대리전.
신예 스타와 부활하는 슈퍼스타의 대결.
이것만 해도 흥미를 잡아 끌기에는 충분했다.
“그래도 이건 세영 쪽이 리스크가 크네.”
“그런 거야?”
“아무래도 영신이 이쪽은 꽉 잡고 있었잖아. 세영은 3번째 정도? 점유율로 치면 상대적으로 약소한 상태지. 진호까지 모델로 걸고 사활을 거는 거면 뒤가 없다는 거야.”
“반면 영신은 여유가 있다는 거구나.”
“있지. 기존 점유도 높을 뿐더러 모델도 안정적인 사람을 썼잖아. 광고 모델은 지금 잘 나가는 사람을 쓰는 쪽이 최선이야. 진호가 급 높은 스타기는 하지만 공백기가 있었고, 저번 뮤직비디오도 전성기만은 못하잖아.”
냉정하게 평가를 하자면 이랬다.
누리꾼이든 전문가든 세영보다는 영신 쪽에 손을 들어 주었다.
세영의 도박수는 분기 실적이 받쳐주지 않으면 상당히 치명적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분기 실적을 가리는 큰 요소 중 하나가 광고.
“재밌겠네. 어느 쪽이 더 멋진 광고를 때릴지.”
창과 검 없는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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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의 핵심은 제품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알리는가에 있다. 다만, 과거에는 그 성능과 효능 따위를 선전하는 것에 치중했던 반면 최근에는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것에 중점을 둔다.
예를 들어 맥주 하면 ‘XXX’하고 단번에 떠오르는 이름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해서 이번 광고는 스토리 라인을 가지고 갈까 합니다.”
“시리즈로 말입니까? 그건 영신도 그런다고 아는데.”
“이왕 맞붙는 거 확실하게 해야죠.”
광고 콘티 회의에서 감독을 만났다.
서규찬.
나름대로 이 바닥에서는 이름 꽤나 난 인물이었다.
“맥주를 가지고 스토리를 만든다. 쉽게 떠오르지 않는군요. 어떤 방식으로 갈 생각이죠?”
“어차피 맥주의 맛을 영상으로 잡아 낼 방법은 없습니다. 저희가 할 건 순간의 이미지. 이 맥주를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갈증을 그리는 겁니다.”
“갈증이라. 메마른 배경과 땀. 뭐, 이런 건가요?”
“그렇죠. 사막에서의 추격씬 이후, 차게 얼린 맥주를 마신다. 이게 기본 콘셉트입니다.”
진호가 펜을 빙빙 돌리며 말을 되새김질했다.
서규찬 감독의 말은 기본적인 광고 방식을 따르고 있었다.
맥주가 떠오르는 장면을 구상하고 마지막에 가장 맛있게 마시는 것으로 이미지를 박아 넣는 것이다.
효과적이고 전통적이다.
‘하지만 좀 약하단 말이야.’
상대인 영신의 방식도 비슷할 터.
그럼 어중간한 격차로 어중간한 효과만 나올 뿐이다.
“조금 더 파격적으로 가죠.”
“파격적으로 말입니까?”
“네. 이왕 시리즈로 광고를 만드는 김에 각본을 극적으로 쓰자 이겁니다. 맥주를 안 마셔도 광고를 볼 수밖에 없는 수준으로.”
“······그런 시도를 하다가 이도저도 아니게 된 경우가 많습니다.”
광고는 시간의 미학이다.
시리즈 광고들이 실패 한 건 결국 순간의 매력을 만들어 내지 못했기 때문.
서규찬도 그 부분을 지적했다.
“시리즈의 각 편마다 완결을 지어야죠.”
“30초도 안 되는 분량에 그걸 함축시키는 건 어려워요. 연속성이 깨지기도 쉽고.”
“어려운 부분은 제가 해 볼게요. 주제의 함축은 제 연기로 충당하고 마무리를 중심으로 각본을 짜 주세요.”
“말이 쉽지······”
연기력이 아무리 좋아도 이미지는 찰나에 결정된다.
그 찰나의 순간에 표현이 가능할 것인가.
괜히 광고에서 연기력 좋은 원로보다 잘 생기고 잘 나가는 신예배우를 쓰는 것이 아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니까.
“일단 해 봅시다. 임시 콘티를 짜고 찍어 본 뒤에 결과물이 마땅치 않으면 그때 포기해도 돼요.”
“허 참. 대표님이 최대한 진호 씨 말을 들어주라고 하긴 했지만.”
“그럼 고집 한 번 부려보겠습니다.”
“쩝. 알겠습니다. 해보고 난 뒤에 포기해도 늦지는 않겠죠.”
무리수일지 아닐지.
아직은 알지 못한 채 악수를 나누었다.
광고 계약 이후 3일째 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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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콘셉트가 정해졌다.
진호의 사랑 변천사 3단계.
첫 만남의 설렘, 깊어지는 사랑의 애틋함, 이별의 슬픔.
각각 단계에서 다른 방식으로 맥주를 접하는 것으로 광고가 마무리 된다.
즉, 광고 3편에서 진호는 각기 다른 감정 연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 이렇게 만났다고 은서 씨에게 혼나는 건 아니겠죠?”
“일은 일이니까요. 나중에 한 소리 하긴 하겠지만요.”
상대역인 윤 소리도 만났다.
연기 15년 차 베테랑이었다.
전체 비중은 낮지만 그때그때 상대 연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구력이 낮은 인물은 불가능했다.
“오늘 잘 부탁할게요. 진호 씨와 연기하는 걸 항상 기대하고 있었어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촬영 전 준비는 프로답게 진행했다.
들뜨지도 않고 너무 드라이 하지도 않았다.
적정선에서 감정을 잡고 대본을 숙지했다.
“슛 들어갑니다. 준비해 주세요.”
시작은 첫 만남의 설렘.
이제 막 시작하는 연인의 두근거림을 짧은 시간 안에 표현해야 했다.
쉬워 보이지만 그리 쉬운 연기는 아니었다.
광고 특성 상 임펙트가 없으면 그냥 그렇게 흘러가 버리기 때문.
연기는 연기로 하되, 광고의 특성을 살려야 했다.
“미안. 내가 늦었지?”
다가와 건네는 첫 마디.
잔 떨림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표정도 부끄러움과 설렘이 반반 섞여 있는 듯 해 배경과 잘 어우러졌다.
“······”
감독, 서규찬은 말없이 연기를 지켜봤다.
콘셉트에 맞게 진호의 연기는 훌륭했다.
설렘도 느껴지고 첫 만남의 어색함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상대역인 윤 소리 역시 연기에 잘 대응했다.
부끄러운 얼굴, 떨리는 목소리, 꼼지락거리는 손가락.
작은 부분까지 신경 써서 연기하는 것이 보였다.
‘이걸로 될까?’
하지만 그럼에도 서규찬은 부족함을 느꼈다.
완성도 높은 광고가 될 것 같긴 하지만 그것으로는 상대 광고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것 같지 않았다.
무언가 더 특별한 것이 필요했다.
“감독님.”
“진호 씨.”
순간,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촬영장이 스톱되고 두 사람이 눈만 깜빡였다.
그러다 먼저 대화를 이어간 것은 진호였다.
“특색이 부족해요. 설정 하나 추가하죠.”
“저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어떤 것이 좋을까요?”
“아예 반대 느낌으로 가는 건 어떨까요?”
“반대 느낌이라면?”
“사랑의 설렘. 하지만 주인공이 사이코패스라면? 살인마라면. 은유적으로 이를 표현해서 긴장감을 주는 건 어떨까요?”
“살인마. 살인마라.”
서규찬이 손톱을 물며 생각했다.
사랑의 설렘을 그려내는 장면에 주인공이 살인마인 배경을 삽입한다.
상충되는 설정이지만 그렇기에 독특하다.
“할 수 있습니까?”
“일단 느낌만 살려서 가 볼게요.”
서규찬이 사인을 주고 재차 녹화에 들어갔다.
진호는 앞선 것과 같은 연기를 그대로 재연했다.
하지만 미묘하게 표정과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그 차이는 상대역인 윤 소리가 가장 크게 느꼈다.
‘한 번에 다른 캐릭터로 한다고?’
몰입 수준이 굉장했다.
“어떤가요?”
“느낌이 신기하네요. 얼핏 보기에는 전과 같은 설렘인데, 곰곰이 짚어보면 뭔가 이상해요. 한번만 더 가 볼까요?”
“좋죠. 소리 씨도 괜찮죠?”
“네, 네. 괜찮습니다.”
이런 연기를 능숙하게 할 수 있다.
아니, 즉흥에서 꺼내서 재조립 할 수 있는 창의성과 도전의식이 더 대단하다.
배우라면 낯선 연기에 대한 두려움이 없을 수 없으니까.
‘대체 뭐가 망가졌다는 거야.’
윤 소리는 대중의 판단에 실소를 머금었다.
눈앞에 있는 진호라는 남자는 전혀 망가지지 않았다.
아니, 되레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더 대단하다.
“다시 갈게요.”
연기 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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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된 콘셉트로 촬영이 이어졌다.
같은 연기를 수십 번이나 반복했지만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은 없었다.
연기를 할 때 마다 미묘하게 변하는 느낌이 촬영장에 있는 모든 사람을 매료했기 때문이다.
“······허. 이건 이상하군요.”
“그렇죠? 하하. 저도 처음에 볼 때는 뭐 이런 광고가 있나 싶었지 뭡니까.”
결과물은 광고주에게도 전달되었다.
서규찬의 너털웃음에도 그는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이게 어떤 느낌입니까? 분명 사랑 콘셉트로 알고 있었는데. 미묘하게 느껴지는 긴장감이······”
“느낌이 오시죠? 주인공의 이질감? 그런 미묘한 느낌이 광고 끝까지 남아 있는 겁니다.”
“허. 그걸 의도했다 이겁니까? 어떤 설정으로?”
“살인마나 사이코패스 같은 느낌입니다. 설정을 배치해서 독특함을 주는 거죠. 사람들은 이걸 보면서도 자기가 왜 긴장감을 느끼는지 단번에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특히나 광고의 특성 상 그러지 못할 확률이 더더욱 높다.
처음에는 아마 ‘평범한 사랑 광고인가?’라고 평할 터.
하지만 집중해서 보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실제 광고가 가진 의미가 파악 될 것이다.
어째서 긴장감이 느껴지는가.
진호의 눈빛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광고에 관심이 쏠리기 시작하면 당연히 제품의 홍보 효과도 올라가겠죠. 그리고 어느 정도 예열이 되었을 때 두 번째 광고가 나가는 겁니다.”
“조금 더 노골적인 방식으로 말입니까?”
“은유를 주는 거죠. 설렘 이후에 느껴지는 애틋함. 하지만 뭔지 모를 긴장과 두려움. 그제야 사람들은 알게 될 겁니다. 이게 단순한 연인간의 사랑 이야기가 아님을.”
“호오. 이거 흥미진진하군요. 마치 스릴러 영화를 보는 기분입니다.”
“그렇죠! 바로 그겁니다! 스릴러 방식의 광고.”
전형에서 벗어나 있기에 파격.
하지만 과하지 않고 은근하기에 거부감은 적다.
게다가 ‘주인공이 무슨 생각이지?’라는 의문까지.
광고가 가질 수 있는 덕목들은 모조리 가지고 있다고 봐도 마땅하다.
“음. 음. 역시 진호 씨와 규찬 씨를 계약한 건 신의 한수였나 봅니다.”
“하하. 저보다야 진호 씨의 역량이 컸죠. 현장에서 즉석으로 설정을 바꾸는 방식에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습니까?”
“네. 배우의 시선만이 아니라 제작자의 시선도 가지고 있어요. 뭐, 연기는 두 말 할 필요도 없죠. 저번 뮤직비디오로 한물갔다는 이야기가 나온 걸로 아는데, 터무니없는 소리였습니다.”
“좋군요. 매우 좋아요.”
완성된 광고는 3부작 중 1부.
완벽이라 평할 수는 없지만 그 하나의 광고로 대표는 자신감을 가졌다.
회사의 사활을 걸고 시작한 일.
자신의 도박수가 성공하리란 자신감이었다.
“해 봅시다.”
광고 편성까지는 고작 며칠.
남은 건 정면 대결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