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67. 파트너(1)
뮤직비디오로 재기의 신호탄을 쏴 올렸다.
몰락이라 평가받던 진호가 다시금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시장은 이에 발 빠르게 대처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세계적으로 활동하던 스타다.
그 이름값과 상업성은 부연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
발 뺐던 회사들이 넌지시 선을 연결하고자 했다.
“이런 쌍놈의 새끼들. 힘들 때는 냉큼 잘라버린 주제에 이제 와서 뭐가 어째?”
최현석은 그런 행보에 화를 냈다.
사업이 돈으로 이루어진 탑이라 해도 그 내면에는 신뢰 관계가 필수적이다.
대뜸 등 진 회사들이 예뻐 보일 리 없다.
“계약 조건도 후려치고 있네요. 이것들 아직도 간 보고 있어요.”
“쥐새끼 같은 것들. 주판 튕겨서 손해 볼 건 최대한 줄이려는 거지. 흥. 좋다 이거야. 장사치니까. 근데, 뒤도 안 보고 거래 끊었으면 사과라도 한 마디 해야 하는 거 아니냐?”
건넨 건 고작 메일 한 통.
사무적으로 협력을 요구하는 태도에 최현석은 더 불이 났다.
“굳이 목 맬 필요는 없어요. 널리고 널린 게 브랜드에요. 사업 파트너는 다시 찾으면 그만이죠.”
“맞다. 맞아. 네 말대로 우리가 을이 아니잖아. 어차피 파트너가 되고 싶다는 이들은 많다고.”
“그 전에 계약 안 끊고 이어가준 회사들도 있죠?”
“있지. 몇 곳 안 되기는 하지만.”
“따로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네요. 파트너로서 관계도 돈독히 할 겸.”
힘들 때 남아주는 사람이 고마운 법이다.
진호는 빠르게 손 끊은 회사들과 다르게 격려 메일 등을 보내며 응원해준 이들을 챙겼다.
사업도 결국 사람끼리 하는 일이다.
힘들 때 챙겨준 사람들에게 마음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정식으로 연기 복귀하고 활동 시작하면 우선적으로 광고 연결하자.”
“그래야죠. 필요하면 염가에 해 줄 생각입니다.”
“어지간히 고마웠던 모양이네.”
“그런 것도 있지만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서요. 챙겨 준만큼 보답한다. 개인이기 이전에 브랜드로 평가를 받잖아요. 이미지를 챙겨서 나쁠 건 없죠.”
특히 한국에서는 이런 이미지가 잘 먹힌다.
“사업가 다 됐네.”
“기회가 있을 때 열심히 해야죠. 이번 일 겪고 알았어요. 사람은 영원히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을요.”
“자식이. 누가 보면 백발이 성성한 노인인 줄 알겠다.”
“그러게요.”
백발이 성성하다 못해, 썩어서 먼지가 될 만큼의 삶.
어쩌면 그 많은 걸 경험하고 놓아주었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진호는 삶에 대한 애척이 그 어느 때보다 강했다.
#
진호가 행보를 결정하고 난 뒤, 당황하는 이들이 꽤 많아졌다.
넌지시 계약을 제안했던 회사의 직원들이다.
회사 방침으로 계약 조건을 줄이고 여러 가지 안전장치를 달았을 뿐인데 대뜸 거부 반응이 나왔다.
그래도 대기업인데.
업계에서는 계약 못 해 안달인 이들이 숱하게 많은 회사이니 이렇게 단번에 거부 할 거라고는 예상 못했다.
직원부터 선임급.
그리고 임원까지.
줄줄이 사태에 대해서 보고를 받으며 피드백에 들어갔다.
“이렇게 된 거 계약은 포기합시다. 재기를 했다고는 하지만 상황을 보니 썩 멀쩡한 것 같지는 않던데.”
“맞습니다. 굳이 우리가 일개 연예인 하나에 매달릴 이유는 없죠.”
“그래요. 어차피 대타로 구해 둔 임강준이라는 친구도 있지 않습니까. 이번에 드라마로 활 떠서 이미지도 좋던데. 마스크도 훌륭하고 본사 이미지에도 좋을 거 같습니다.”
그렇게 모아져 나온 의견이 이런 것.
애초에 광고 모델이라는 건 그때그때 이미지 좋은 사람들로 선별하면 되는 일.
조금은 당황했지만 큰 사건은 아니었다.
“죄송합니다만, 그렇게 넘어 갈 일은 아닙니다. 계약 공백을 틈나 경쟁 회사에서 문의를 넣는다고 들었습니다. 이러다가 경쟁에서 패배한 식으로 보이는 건 아닐까 걱정됩니다.”
“쯧쯧. 어차피 그때 그때인 연예인입니다. 넘어가면 넘어가는 대로 쓰라고 하세요. 우리는 지금 뜨는 사람을 쓰면 됩니다. 연예인 나부랭이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광고 효과를 무시하시면 곤란합니다.”
“에헤이. 누가 무시를 한다고 그러세요. 광고 열심히 하세요. 근데, 어차피 배우 하나잖아요. 대체 할 사람이라면 널리고 널렸는데 뭘 그리 연연하십니까.”
광고 쪽 대표자는 임원들의 발언에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트랜드에 맞는 광고와 연예인 효과.
대충 이해하는 듯 하지만 임원들의 시선에서는 그래봐야 잡술일 뿐이다.
대체 가능한 물건에 불과한 것이다.
“이대로 놓치면 반드시 후회할 겁니다. 진호 씨가 예전만큼 활동을 하기 시작하면 광고 효과는 비할 바가 아닙니다. 지금 잘 나가는 사람을 쓴다 해도 따라 갈 수 없어요.”
“하하. 과대포장이 심하군요. 지난 분기 실적이 좋았던 건 회사 물품의 질이 뛰어나서지, 결코 광고 효과 때문이 아닙니다. 안 그렇습니까, 임원님들?”
“암요. 우리 물건이 좋아서 잘 팔린 걸 고작 연예인 하나 덕으로 돌리면 안 되죠.”
“하하. 말씀 잘 하셨습니다. 이번 분기도 호황이라고 하니 기대해 보죠.”
껄껄거리는 임원들의 모습에 대표는 포기했다.
어차피 실무와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숫자로 평가를 하고 앞으로 떨어지는 성과금만 잘 받으면 그만.
실제 판매 성적에 무엇이 영향을 주는지 따위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세영 그룹에서 제안을 넣었다고 했는데.’
경쟁 업체의 제안.
만약 진호 측에서 이를 받아들인다면 과연 어느 정도까지 영향을 받을까.
부디 받지 않기를.
받는다 해도 영향이 적기를.
대표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기도뿐이었다.
#
다른 회사도 비슷비슷했다.
이미 진호가 주춤 할 때 계약을 단절한 만큼 재계약에 목매는 입장이 아니었다.
되레 활발한 건 계약의 공백을 노린 경쟁 업체였다.
특히, 그 중에서도 세영 그룹이 적극적이었다.
“전 진호 씨가 금방 복귀 할 거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계약 건으로 잡힌 미팅에 실무자가 아닌 회사 대표가 직접 나왔다.
세영 그룹이 한 손에 꼽히는 대형 기업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이름 좀 있는 곳이다.
그런 회사의 대표가 직접 움직인 것이다.
“주변에서 많이들 도와주신 덕분이죠. 혼자였으면 힘들었을 겁니다.”
“역시 겸손하시네요. 아, 이번 뮤직비디오도 잘 봤습니다. 기가 막히더군요. 그걸 보는 순간 딱 느낌이 온 겁니다. 반드시 계약을 해야겠다고.”
“주류 쪽으로 전념을 하신다고요?”
“네. 몇 가지 소소한 사업을 접고 주류에 매진할까 합니다. 국산 주류 사업이 레드오션이기는 하지만 어디 살 길 하나 없겠습니까?”
세영은 다양한 업종에 손을 대고 있는 다목적 회사였다. 그걸 이번에 대량 정리하면서 주류 사업으로 전념하기로 한 것이다.
어찌 보면 도박수.
국내의 주류 사업은 이미 점유율이 타이트하게 고정되어 있는 터라 변동폭이 적었다.
투자 대비 수익이 불확실했다.
“사실 이전에 진호 씨와 계약하면서 회사 이미지를 바꿔볼까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영신과 손을 잡고 있었던 터라 불가능했죠.”
“그래서 이번 기회에 시도하는 건가요?”
“전 개인적으로 국내가 아닌 세계화에 사활을 걸고 있거든요. 그걸 위해서는 진호 씨 같은 국가적인 인지도가 있는 간판스타가 필요합니다.”
“위험한 도박을 즐기시는군요.”
“하하. 인생 어차피 도박 아닙니까.”
호탕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무모하다고 해야 할까.
대기업의 대표 치고는 방식이 상당히 도발적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가 가지고 온 제안서는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단순히 상품 하나에 이미지를 소모하는 것이 아닌, 전체적인 파트너쉽이었다.
계약금 역시 회사 주식으로 주어지는 형태였다.
주가가 오르면 수익도 오르는, 나름의 성과금이었다.
“조건은 매우 마음에 듭니다. 사고 이후로 주춤한 상대에게 이런 너그러운 제안이라니 감사할 따름이죠. 다만.”
“다만?”
“계약은 신중하게 하고 싶습니다. 제품을 알아보고 회사의 이념과 제 가치를 비교해 보고 싶네요. 조금 과하다 싶긴······”
“하하하. 아닙니다, 아니에요.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저야 말로 드리고 싶었던 말입니다. 파트너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를 잘 알아야죠. 덥석 받아 들였으면 되레 실망했을 겁니다. 하하하.”
신중하던 진호가 무색해질 만큼의 반응이었다.
“생각보다 절 더 신뢰하고 있나 보군요.”
“그럼요. 진호 씨는 모르지만 업계에서는 이미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개인적인 귀띔도 받았죠.”
“소문? 개인적인 귀띔이라니요?”
“의리 말입니다. 촌스럽고 덜떨어진 가치 같지만 전 사업에서 의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진호 씨가 계약 파기를 안 하고 남아준 이들에게 후한 조건을 제시했다는 걸 이미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제 친구 중 하나가 삼오 대표거든요.”
“아. 삼오 정수의 대표님이?”
“네. 하하. 그 친구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더이다. 젊은 친구가 진국이라고. 사람이 사업을 하다보면 실패도 하고 오판도 하는 법이죠. 그럴 때 의리를 가지고 남아주는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든든합니까. 전 진호 씨와 그런 관계가 되고 싶습니다.”
그렇게 된 건가.
진호는 유독 친근한 대표의 태도를 이제야 이해 할 수 있었다.
의리에 의리로 답한 것이 또 다른 기회를 준 격이다.
“저도 그런 관계가 됐으면 하는군요.”
“하하. 회사는 열려 있습니다. 언제든지 방문해 주시기를.”
호탕하게 웃는 얼굴에 진호도 밝은 미소로 답했다.
인생지사 새옹지마라 하던가.
이런 일도 있나 보다.
#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던가.
진호는 다음 날 그대로 세영 그룹을 방문했다.
밖에서는 알 수 없는 정보를 얻고 회사의 방침이나 가치관 등을 파악했다.
단순 광고라면 표면적인 정보만으로 충분했지만 파트너쉽은 달랐다.
적어도 동행 할 가치가 있는 기업이어야 했다.
“광고 제안서 들어왔다.”
그리고 세영 그룹은 그런 면에서 조건을 충족시켰다.
성자 같은 그룹이라는 건 아니지만 모난 구석은 없었다.
회사 가치관도 튼튼했고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한 기부 활동이나 연계 활동도 많았다.
그렇다고 반사회적인 행동을 하는 오너 일가나 이력도 없었다.
“이쪽도 굉장히 발 빠르네요.”
“주력 사업으로 밀기 시작했으니까. 하루하루가 돈이라고. 광고 감독도 구했고, 전체 콘티 구성안도 오늘 중으로 보내준단다.”
“뮤직비디오 다음은 광고인가요.”
“나쁘지 않아. 지금은 계속 얼굴을 비추면서 네 존재를 알리는 편이 낫지.”
“시나리오 들어온 것도 있지 않아요?”
“네가 할 만한 역은 없어. 필요하면 보내줄게.”
“대표님 선택을 믿을게요.”
진호의 복귀와 동시에 시나리오가 어마어마하게 들어왔다. 연기력이 떨어지든 어떻든 간에 인지도가 없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들어온 시나리오 중 마땅한 것이 없었다.
비중이 낮거나 이미지와 안 맞거나 시나리오 자체가 엉망인 것들.
굵직굵직한 제작사도 더러 있었지만 소모하려는 방식이 마땅하지 않았다.
최현석은 일회용 소모품으로 진호를 내보낼 마음은 없었다.
“진호야. 그리고 전에 계약했던 영신에서 임강준을 모델로 세웠다. 드라마처럼 8부작으로 광고를 때린다고 하더라.”
“임강준이면 전에 주말 드라마로 뜬 배우죠?”
“그래. 최근 젊은 애들 중에서는 가장 잘 나가지. 마스크 좋고 발성 좋고 그래서.”
“확실히 광고 모델로는 최적이네요.”
“너 손절하고 바로 계약 때린 거야. 지금껏 눈치 보다가 안 된다고 하니까 바로 광고 날리는 거 봐라.”
최현석이 이를 갈았다.
회사가 저울질 하는 것이 일상이라고는 하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기분 좋을 수 없었다.
“그럼 광고로 붙는 겁니까?”
“빠르게 찍으면. 세영에서 주류 사업에 전념하기로 한 이상 어차피 맞붙는 건 어쩔 수 없는 수순이지.”
“잘생긴 배우랑 정면 승부하는 건 부담되는데.”
“자식아, 넌 연기력이 있잖아. 잘생김을 연기하라고.”
“말이 쉽죠, 참.”
진호가 머쓱하게 웃으며 답했다.
잘생김을 연기하라.
말은 쉽지만 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우리 대표님 기대에는 부응해 봐야죠.”
“그래. 난 믿고 있다. 가서 혼쭐을 내 주라고.”
“광고 찍으러 가는 겁니다, 광고.”
“그게 그거지 뭐. 하여튼 너만 믿는다.”
“넵. 믿고 맡겨 주세요.”
그래도 한다.
아니, 하고 만다.
그것이 지금 진호의 각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