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144화 (144/178)

Chapter64. 다시 처음부터(2)

은서가 애절한 얼굴로 눈물을 떨어뜨렸다.

손이 잘게 떨리고 눈동자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차게 흩날리는 눈 속에서 애절함이 더욱 짙어졌다.

“컷! 오케이!”

그리고 감독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은서가 숨을 토하며 바닥으로 쪼그려 앉았다.

감정 연기는 꽤나 깊은 피로감을 선사했다.

“하하. 수고했어. 이번에 연기 대박이라고.”

“헤헤. 괜찮았어요?”

“그럼! 완전히 제대로였어. 이번 거 방영되면 사람들이 너 보는 눈 완전 달라 질 걸?”

“아니면 감독님이 책임지기?”

“오케이. 내가 장담하지.”

드라마 마지막 촬영이었다.

24부작, 장편 드라마의 마지막이라 여운도 컸다.

감독, 상대배우, 원로배우, 스텝들.

돌아가면서 다 인사를 건넸다.

“수고했어.”

“······어? 진호 오빠!”

몰래 온 손님도 있었다.

불쑥 나타나 커피를 건네는 진호를 보며 은서가 깜짝 놀랐다.

“오늘 마지막 촬영이라면서. 어떤지 보러 왔지.”

“나 연기하는 것도 다 봤어?”

“응. 많이 늘었더라. 전하고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야.”

“에헴. 내가 이 정도라고.”

잰 채 하는 은서에 진호가 다시 웃었다.

사실 빈말도 아니었다.

연기자로 전향 당시 발연기라고 놀림 받던 모습은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깊어진 내공에 완급 조절까지.

이제 여배우라 부르는 것에 한 점의 의심도 없었다.

“어이쿠, 이거 유명인이 오셨네요.”

“우와! 저 진호 씨 팬이에요.”

“은서 언니 응원하러 오셨어요?”

진호의 등장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휴식기를 가지고 있다지만 진호는 슈퍼스타.

연예인의 연예인이라고 해야 할까.

오다가다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악수도 하고 사인도 하고 사진도 찍으며 스타 대접을 해 주었다.

“······소문에 의하면 완전히 망가졌다던데. 그래도 꼴은 멀쩡해 보이네.”

“겉만 그런 거지. 전에 들어보니까 무슨 극단에서 연기 연습을 하고 있다더라. 완전 초보수준이래. 불쌍하지. 한때 최고의 배우였는데.”

“재기하기는 어렵겠지?”

“망가진 사람이 쉽게 복구가 되겠냐?”

하지만 둥글게 모여든 사람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진호를 힐끔거리며 숙덕거리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좋은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회사에서도 부인하지 않고 본인도 이렇다 할 설명이 없다.

소문은 부풀고 입과 입을 통해서 퍼졌다.

“쯧쯧. 하여튼 저것들은. 대신 사과하죠. 귀담아 들을 필요는 없습니다.”

감독이 눈치를 채고 발 빠르게 사과를 했다.

스쳐가고 말 사람들에 비해서 감독은 언제 또 같이 일을 할 지 모르는 입장이었다.

“역시 소문이 그런 식으로 퍼지고 있나 보네요.”

“괜히들 입방아 찍는 겁니다. 연예인들이 괜히 피곤합니까. 쉰다 치면 소문만 늘어서.”

“······크게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은서, 회식 끝나면 일찍 보내주시는 거겠죠?”

“하하. 당연하죠. 아니, 그럴 게 아니라 진호 씨도 같이 회식 가는 게 어떻습니까?”

감독이 슬쩍 물었지만 진호는 고개를 저었다.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약속도 있고, 은서와는 회식보다 데이트를 하고 싶네요.”

“오오오. 로맨티스트!”

“휘익! 부럽다, 부러워!”

짓궂은 환호에 은서의 볼만 붉어졌다.

‘끝나고 연락해.’ 짧은 말을 덧붙이며 진호는 그렇게 물러났다.

약속이 있다는 말은 핑계가 아닌 진실.

“네, 선생님. 지금 가고 있어요.”

석음 정신병원, 주치의 은수.

상담 예약이었다.

#

힘을 잃고 처음부터 시작한다.

말은 쉽지만 이건 괴리감이 상당했다.

일단 진호는 그간의 일들을 전부 기억한다.

전생은 흐릿해 졌지만 해 왔던 일이 사라진 건 아니다.

그 모든 기억, 감정, 느낌들.

이런 게 있는데 개판으로 연기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실제로 힘이 사라져 연기력이 떨어진 부분과 완전히 엉망이 된 연기력에는 괴리가 있었다.

영이 될 것이 마이너가 된 느낌.

그래서 정신병원을 찾은 것이다.

“오랜만이네요, 진호 씨. 잘 지내셨어요?”

“글쎄요. 잘 지냈다고는 말하기 힘들겠네요.”

“전화상으로는 대충 들었어요. 총격으로 인한 일시적 장애······맞나요?”

3년간 주치의로 있었고 입이 무거운 사람이다.

진호가 그녀를 찾은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설명을 하기가 어려워요. 연기를 할 때면 무언가 콱 막힌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가슴이 답답하다는 건가요?”

“연기를 할 때 느껴지는 감정의 흐름 같은 게 있잖아요. 그걸 누가 바위로 막아 놓은 느낌이에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되지 않는. 미칠 노릇이죠.”

“흐음. 트라우마의 영향 치고는 독특하네요.”

은수는 차근차근 진호의 상태를 체크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진호는 흥미로운 대상이었다.

특정 대상에 대한 과잉 몰입도 그러했고, 이번 상태도 흔히 볼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트리거가 마땅하지 않은데.’

연기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

총격으로 인한 트라우마라 하기 에는 기묘한 반응이었다.

“우선은 증상부터 확인을 해 보죠. 최근까지 연습하던 연기가 있나요? 여기서 해 볼 만 한 것으로.”

“전에 하던 살인마 잭으로 할까요?”

“아. 괜찮겠네요. 과잉이 심했던 만큼 반응을 보기에는 좋을 거 같아요.”

진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살인마 잭에 대한 연기라면 머리에 온전히 남아 있었다.

당시에는 과잉 몰입으로 인한 제어 불능이 문제.

지금은 몰입 불가로 인한 표현 불능이 문제였다.

차이가 극명한 만큼 보기는 편했다.

“거리의 쓰레기들······”

잭을 흉내 내며 대사를 시작했다.

살인마. 길거리 여성들을 더러운 오물로 판단하여 스스로 정화하려는 미친 인간이다.

극단적인 감정의 파도가 머리에서 여실히 기억났다.

“잠깐만요. 이거, 진심으로 하신 거죠?”

“네.”

하지만 머리에서 기억하는 감정은 단 한 톨도 몸으로 표현되지 않았다.

“흐음. 신기하군요. 기피반응의 일종이라 생각했는데 그런 징후가 없어요.”

“그럼······?”

“아주 연기를 못한다, 라는 느낌만 있네요.”

“냉정하게 말하시네요.”

“치료는 냉정하게 해야죠.”

툭툭, 은수가 차트에 무언가를 끄덕였다.

“몇 가지 더 확인해 볼게요. 이번에도 진심으로 하셔야 합니다.”

“전 항상 진심입니다.”

그 뒤로 배역만 23개.

타인 앞에서 선보이는 최악의 연기 23선이 이어졌다.

#

최현석이 서류를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졌다.

이른 아침, 광고 계약 업체에서 온 메일이었다.

“이제 농구선수로 전업하셨습니까?”

“······왔냐.”

떨어진 쓰레기를 주워 쓰레기통으로 넣는 건 진호.

연락을 받고 방문한 참이었다.

“광고업체 몇 곳에서 연락이 왔다면서요?”

“어. 지난 분기에 연장 계약을 맺은 곳들.”

“좋은 소식은 아니겠네요.”

“끄응.”

최현석이 뒷머리를 긁었다.

어떻게든 상황 무마를 해보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그만큼 연예계 바닥 소문이 무섭고 빠르다는 증거였다.

“뭐랍니까?”

“업계 활동을 재개하지 않으면 계약을 취소하겠다고 하더라.”

“전에는 말이 없었는데 말이죠.”

“저울질하는 거지. 소문이 사실이면 손해니까.”

파다하게 퍼지고 있는 소문이다.

진호가 총격을 받은 뒤 충격으로 망가졌다는 내용.

연기는 못하는 건 둘째 치고 사람이 불구가 됐다는 등 정신이 오락가락 한다는 등.

별 별 이야기가 다 나돌고 있다.

“끊어요. 사고 나고 얼마나 지났다고 간을 봅니까. 그런 사람들하고는 오래 일 못해요.”

“한 곳 끊기 시작하면 우르르 몰려 올 거다.”

“상관없어요.”

“손해가 막심 할 거야.”

“차라리 잘 됐죠. 그 동안 승승장구한다고 너무 두서없이 파트너로 삼았어요. 이참에 걸러서 가죠.”

심각한 최현석과는 다르게 진호는 담담하게 반응했다. 지금 하는 이야기 속 금액이 수십, 수백억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사람이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곁에 남아주는 사람이 진짜라고 봅니다. 어쩌면 이것도 하나의 기회일지 몰라요.”

“어째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다?”

“대표님이 저 버릴 리 없잖아요.”

“가끔 그렇게 떠 볼 때는 버리고 싶기도 하다.”

진호가 가볍게 웃었다.

버릴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애써주지도 않을 것이다.

“에휴. 병원에서는 뭐래? 차도가 있다냐?”

“이제 치료 시작했어요.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있죠.”

“가능성은 보이고?”

“글쎄요. 조금은 보이는 것 같기도 해요.”

“오, 그래? 뭔데?”

“아직은 얘기 할 만 한 것이 아니에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나오면 그때 말씀 드릴게요.”

진호가 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주치의 은수와의 대담은 괜찮은 결과를 낳았지만 섣불리 긍정을 표하기는 어려웠다.

그 방법이라는 것이 상당히 이질적인 것이었으니.

“연습생 애들. 오늘도 아래에서 연습하죠?”

“어. 그렇긴 한데 왜? 또 가게?”

“애들 열정 좀 받게요.”

어떤 반응, 어떤 말이 나올지는 알고 있지만 뒤엉키지 않으면 얻지 못하는 것도 있다.

진호는 부끄러워하는 것도 수치스러워 하는 것도 전부 각오하고 있다.

어찌 발에 흙 한 점 묻히지 않고 산을 오르겠는가.

지금은 그저 묵묵히 걸을 뿐이다.

#

가까워지는 것은 어렵지만 멀어지는 건 쉽다.

진호에 대한 소문이 실체를 가지고 퍼지기 시작하자 주변에서 하나 둘 연락을 끊기 시작했다.

같이 연기를 하거나 예능 등에서 인연이 닿아서 전화번호를 교환한 사람이 몇 명일까.

수로 새도 백 명은 훌쩍 넘는다.

그 사람 중 사건 이후로 안부를 묻고 연락이 뚝 끊긴 사람이 80%가 넘었다.

“사람들이 그러면 안 되는데!”

“맞아, 맞아! 다들 못됐어!”

“응! 응!”

하윤, 세미, 루카 순이다.

셋 역시 소문에 대한 건 들어서 알고 있다.

1사옥 연습실에서 진호가 고전하고 있다는 것도 건너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리를 두진 않았다.

“진호 형, 처음부터 연기를 잘 한 건 아닌데. 이제 와서 살짝 문제가 생겼다고 외면이나 하고. 다들 그렇게 매정하냐.”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진호 선생님을 응원해 줘야 지. 나 힘들 때 진호 선생님이 얼마나 많이 도와줬는데. 혼자서 슬프고 그러면 안 돼.”

“루카도, 루카도!”

단순하게 엮인 인연들이 아니다.

문제 생겼다고 바로 등 돌리는 사람들과는 본질부터 달랐다.

“잘 말했다. 안 그래도 주변에서 진호 형 돕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아.”

“응. 응. 선아 언니도 온데. 엘린 언니랑 같이 와서 선생님 도와주고 싶다네.”

“아, 그랬어? 나도 빌 아저씨한테 연락 받았는데. 최대한 빨리 와 보기로 했어.”

“와. 오빠 언제부터 그렇게 영어를 잘 했어?”

“열심히 배웠지.”

“루카도! 루카도 할머니 오기로 했다!”

멀어지는 사람이 있다면 다가오는 사람도 있다.

진호가 다쳤을 당시 병문안 왔던 이들은 이번에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도움이 될지 안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마음으로 충분했다.

“좋았어. 그럼 우리도 진호 형 보러가자. 같이 갈사람?”

“나! 2번!”

“루카! 3번! 3번!!”

비죽 내민 엄지손가락에 세미와 루카가 냉큼 붙었다.

응원은 이렇듯 작은 것부터 쌓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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