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62. 슈퍼 히어로(2)
북적이는 가게 안은 한국과 다르지 않았다.
복잡한 메뉴판 속, 그럭저럭 익숙한 메뉴들을 시킨 뒤 자리를 잡았다.
버거에, 버거에, 버거.
다들 햄버거는 참 좋아한다 싶었다.
“형. 얼마나 딜레이 될 거 같아?”
“모르겠다. 신고가 들어오면 현장 수색을 다 해야 하는 터라. 절차가 끝나고 나서야 재개 될 수 있을 거야.”
“아, 진짜. 이름대로 지옥으로 꺼졌으면 좋겠다.”
“큭큭. 그러게 말이다.”
못마땅한 놈들을 씹어주며 시간을 보냈다.
본토의 햄버거는 한국에서 먹던 것보다 훨씬 무겁고 눅진했다.
주륵주륵 흐르는 치즈에 처음에는 즐거워 한 진호지만 몇 입 먹기도 전에 항복 선언을 했다.
“역시 난 한식이 좋다.”
“그러니까 종종 패스트푸드도 먹고 그러라니까.”
“어머니가 보내주신 밑반찬이 있는데 어떻게 그러냐. 김치 없으면 힘 못 쓴다고.”
“토종 새끼 나셨어요.”
“입에 맞으면 형이 다 먹어. 난 못 먹겠다.”
반절 쯤 먹은 햄버거를 송학에게 건네며 진호가 몸을 뒤로 기울였다.
입맛도 입맛이었지만 계속 된 촬영 딜레이에 나름대로 스트레스가 쌓여 있었다.
“진호 맞죠? 진호?”
“응?”
그때였다.
앳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소매를 쿡쿡 당겼다.
늘어져 있던 진호가 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봤다.
“와, 맞다! 영화배우 진호 맞죠!?”
“······어. 그래. 한국에서 왔니?”
“네! 엄마랑 같이 놀러왔어요! 우와, 대따 신기해요! 나 아저씨 사진 방금 보고 왔는데!”
일곱 살 정도 됐을까.
귀엽게 생긴 남자 아이가 치즈스틱을 한 손에 든 채 해맑게 웃고 있었다.
미국에 관광을 왔다가 우연히 발견한 모양이었다.
진호가 싱긋 웃었다.
“우리 친구가 이 형을 어떻게 알까?”
“엄마가 팬이에요! 너는 못 본다고 그래서 다는 못 봤지만 영화도 조금 봤어요!”
“그래? 형한테 꼬마 팬이 생겼네.”
“꼬마 아닌데. 나 진우라고 해요! 진우!”
“그래, 그래. 진우. 형이랑 이름도 비슷하네. 사인이라도 해줄까?”
송학이 기다렸다는 듯 팬을 내밀었다.
팬서비스는 배우의 일과 중 하나.
귀여운 소년 팬을 위해서라면 열장도 힘들지 않았다.
“아뇨, 괜찮아요. 전 아직 그 정도 팬이 아니에요.”
“하, 하하. 그러니? 이 형이 좀 더 분발을 해야겠네?”
“헤헤. 그래도 형 나오는 광고는 자주 봐요. 나올 때마다 엄마가 소리 질러서 귀찮기는 하지만요.”
진호가 머쓱하니 웃었다.
낄낄 웃는 송학이 얄미워 감자튀김을 하나 던졌다.
“근데, 어머니는 어디 계시니? 왜 혼자서 여기에 있어.”
“우리 엄마 길치라서 종종 헤매요. 여기서 기다리면 분명 올 거예요.”
“그래? 진우가 굉장히 영특하구나.”
“그 머리로 공부를 하면 좋을 텐데, 라고 엄마가 말 하곤 하죠. 근데 공부는 하기 싫은걸요.”
“아. 그건 형도 공감한다. 공부, 참 하기 싫지.”
“역시. 형은 성공한 이유가 있는 거 같아요.”
진호가 배를 잡고 웃었다.
꼬마 팬의 입담이 어지간한 성인 못지않았다.
아예 옆 자리를 내어주었다.
“어머니 기다리면서 뭐라도 더 먹을래? 형이 사줄게.”
“어? 그래도 돼요? 엄마가 처음 보는 사람이 뭐 사주면 따라가지 말라고 그랬는데.”
“형은 처음 보는 사람이 아니잖아.”
“아. 맞네요. 그럼 저 이거 먹을래요.”
조그만 손으로 메뉴를 쿡쿡 찔렀다.
아이들이 좋아할 법 한 아이스크림이었다.
역시 애는 애군.
진호가 가볍게 웃으며 주문을 위해 움직이려 했다.
[움직이지 마!!]
그 순간이었다.
가게 문을 박차며 일단의 무리가 난입했다.
얼굴에는 검은 색 스키 마스크를.
손에는 총을 들고 있었다.
놀란 사람들이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총을 들고 사방으로 갈겼다.
콰콰콰콰콰!!
그제야 사람들이 놀란 생선마냥 튀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르며 테이블 뒤로 몸을 던지고 머리만 의자 아래로 감추기도 했다.
삽시간에 주빈이 아비규환으로 돌변했다.
[움직이는 놈은 머리에 바람구멍을 내주겠어]
강도.
[여긴 우리 그린 헬이 장악했다]
아니, 테러였다.
#
몰래카메라인가.
장난기 많은 동네 청년들의 연극인가.
순간적으로 별의별 생각들이 스쳐갔다.
하지만 주변을 보라.
부서진 테이블과 흩어진 음식들.
겁에 질려 벌벌 떠는 아이들과 울고 있는 사람들.
장난도 연기도 아니었다.
[움직여! 전부 이 앞으로 모여라!]
타타탕.
다시 한 번 총성이 들려왔다.
반항하는 사람은 없었다.
고개를 처박고 바닥을 기듯이 움직였다.
“괜찮을 거야. 내 손 잡고 있어.”
진호는 일단 눈앞의 아이부터 챙기기로 했다.
진우의 손을 잡아 품으로 당긴 뒤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이럴 때는 눈에 단 띄는 편이 낫다.
경찰이 움직여 해결 할 때 까지 숨죽이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이 안에 영화배우가 있는 걸 안다. 당장 앞으로 튀어나와]
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라면 어찌해야 할까.
[셋 샐 동안에 나오지 않으면 한 놈씩 머리에 구멍을 내 주마. 우린 농담을 하지 않아]
철컥.
장전되는 소리에 사람들이 일제히 몸을 숙였다.
눈앞에서 수십 발을 쏘는 걸 봤으니 농담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가지 마. 숙이고 있어.”
“······”
송학은 만류했다.
죽고 사는 건 자존심이나 부끄러움의 영역이 아니었다. 총 맞으면 죽는 건 누구나 같다. 진호가 나가서 총에 맞는 꼴을 볼 수는 없었다.
[안 나와? 그럼 이 계집년부터 쏴 죽여야겠군]
[그만! 난 여기 있다. 찾고 있는 배우가 내가 맞다면]
테러범의 총구가 낯선 여자의 얼굴을 겨누었을 때.
진호는 송학의 만류를 뿌리치고 나갔다.
도저히 숨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맞아? 이 놈이 그 진호라는 배우인가?]
[쯧. 동양인들은 다 비슷하게 생겨서 헷갈리는군. 잠깐 있어 봐. 음. 맞다. 그 놈이야]
놈들은 진호의 얼굴이 박힌 몽타주까지 들고 있었다.
작정하고 그를 노린 테러였다.
[어째서 이러는 거지? 돈이 목적이라면 방법은 많아. 여기 있는 사람들은 풀어주라고]
[돈? 웃기고 앉아 있군. 자본주의에 찌들어서 검은 돈을 받아먹는 쓰레기다운 답이다]
[그럼 대체 목적이 뭐야? 네놈들도 알 텐데? 이런 장소에서 테러를 벌이면 도망 갈 방법이 없다는 거]
진호가 주변을 눈으로 훑었다.
어디 구석의 조용한 거리도 아니고 도심 한복판이다.
곧 경찰이 들이닥쳐서 주변을 포위 할 터.
도망 칠 방법 따위는 없다.
[흐흐. 흐흐흐. 도망? 우리가 왜 도망을 치겠어. 우린 순교자라고. 이 세상에 경종을 울리는 순교자들. 모두 죽음은 각오하고 왔다]
[······대체 뭘 위한 순교라는 거지?]
[바로 네놈 같은 기생충들! 우리의 성스러운 땅으로 기어 들어와 자본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오물을 뿌려대는 벌레들 말이다!]
핏대 세우며 말 하는 테러범.
진호는 상대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봤다.
복면으로 대부분을 가렸지만 눈가나 목 언저리 등은 전부 드러나 있었다.
‘이 새끼들 전부 약에 찌들었어.’
전형적인 약쟁이의 면모였다.
[내가 그런 기생충이기 때문에 죽이겠다는 거냐?]
[그래. 너 같은 것들이 신성한 땅에서 오물을 투척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괴로워하는 거야. 세상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네놈 같은 기생충을 박멸해야 한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닥쳐! 네깟 놈 하나 때문에······!]
단순히 약 때문에 흐트러진 것 이상이 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원인이 트리거가 되어 이런 사단을 낸 모습이었다.
‘잘하면 사람들은 내보낼 수 있겠어.’
진호는 차분하게 숨을 골랐다.
[좋아. 내가 그런 기생충이라고 치자. 그럼 다른 사람들은? 이들도 죄가 있는 건가?]
[기생충과 어울렸다면 그것 자체로 죄다. 신성한 대지를 정화하는 작업은 엄정해야 하는 법. 빠져나갈 수 없다]
[그건 너무 줏대 없는 말 아닌가? 죄 없는 아이를 죽이는 일이 어디가 신성하다는 거지?]
[닥쳐!]
퍽, 소리에 진호의 얼굴이 돌아갔다.
개머리판을 정통으로 맞은 것이다.
볼이 붓고 입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
[까불지 마라, 건방진 놈. 우리가 널 아껴서 살려주고 있다고 보는 거냐?]
[······방송사를 기다리고 있겠지]
[어떻게 알았지?]
[뻔하지. 잘나고 잘난 정화를 알리려면 누군가 알아줘야 하니까. 결국 너흰 관심이 필요한 열등 종자라는 의미다]
[이 새끼가!!]
콱.
두 번째 공격은 손으로 막았다.
진호는 개머리판을 움켜 쥔 채 테러범을 노려봤다.
눈이 화산을 머금은 듯 이글거렸다.
그 시선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테러범이 순간 움찔하며 물러 날 정도였다.
[너희가 원하는 관심이라면 내가 다 주겠다. 필요한 것도 나뿐이잖아.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풀어 줘]
[닥쳐! 닥쳐!! 결정은 내가 해! 기생충 따위는 입 닥치고 있어!]
[······]
미친놈을 설득하는 건 쉽지 않다.
조금 더 강하게 나가 볼까?
아니면 이대로 경찰이 개입 할 때 까지 기다려야 하는 걸까.
진호는 쉬이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으, 으으으······”
그때였다.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쪽에서 누군가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배를 손으로 움켜쥐고 있었는데, 주변이 온통 붉었다.
‘피. 피!’ 누군가의 외침처럼 그건 피였다.
[뭐야, 저 계집은?]
[2층에서 서성거리던 걸 잡아왔습니다. 갑자기 튀어나와서 그만······]
[쯧. 구석에 처박아 둬!]
우발 사격으로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얼굴은 창백하고 흘러나온 피 또한 적지 않았다.
“지, 진우야······”
“엄마? 엄마! 엄마!!”
게다가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송학의 뒤편에 숨어 있던 진우가 여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총알처럼 튀어나갔다.
[뭐야!? 저 꼬맹이 잡아!]
[이 쥐새끼가! 어디서 설치는 거야!?]
몇 걸음 가지도 못한 채 진우는 테러범의 손에 잡혔다.
뒷덜미를 잡힌 채 발만 동동 굴렀다.
“이거 놔! 엄마가 아프다고! 엄마가 아파! 으아아앙!”
총이고 뭐고 일단 엄마부터.
고작 일곱 살 된 아이가 주변을 얼마나 보겠는가.
눈물 터져 나와 펑펑 울었다.
[시끄러워! 닥치지 않으면 네놈도 저 계집하고 똑같이 만들어 주마!]
테러범의 총구가 이번에는 진우에게로 향했다.
짜증으로 가득 차 있는 그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듯 보였다.
“으아아앙! 엄마 아프지 마!”
“주, 진우야 도망가 엄마는 괜찮으니까 도망 가.”
“나빠! 나빠! 엄마 아프게 하지 마! 으아앙!”
진우는 아예 영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눈물만 펑펑 흘리며 엄마를 향해 기어갔을 뿐이다.
총 든 사람들은 나쁜 놈, 엄마는 아픈 사람.
아이의 눈에 보이는 것 그게 전부였다.
[으. 으으으으! 시끄러워! 시끄럽다고!]
[잠깐! 아이일 뿐이야!]
[넌 끼어들지 마! 내 말을 안 듣는 놈은 벌을 받아야 한다! 그게 내 규칙이야!]
끼릭.
테러범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
마찰음이 지독할 만큼 크게 진호의 귀를 울렸다.
그러자 수십, 수백의 전생이 동시에 움직였다.
타앙!!!
총성이 들린 건 그 직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