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136화 (136/178)
  • Chapter61. 진호가 없을 때(1)

    드라마 촬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진호가 미국에 체류하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났다.

    촬영은 연기력 이전에 체력과의 싸움.

    액션 연기를 소화하면서 시차까지 전부 감당하는 건 아무리 그라도 무리였다.

    본격 촬영이 있을 시기에는 계속해서 미국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조금 외롭네.”

    그의 빈자리를 느끼는 사람은 많았다.

    특히 옆구리 한 쪽을 채우고 있던 은서가 더더욱 그런 걸 느꼈다.

    “언니 옆에는 내가 있잖아요.”

    “세미야. 네가 채우는 온기와 오빠가 채우는 온기의 느낌이 다르다는 건 알지?”

    “헤헤. 세미는 어려서 몰라요.”

    “모르긴. 요 앙큼한 것아.”

    얄궂게 웃는 세미의 이마를 콕 짚어주며 한숨 쉬었다.

    연예계 바닥. 누구를 만나든 스케줄 때문에 서로에게 소홀하게 되는 건 당연하다 여겼다.

    그래서 누군가를 만나면 백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 한 적도 있다.

    하지만 생각은 생각일 뿐.

    보다시피 전 세계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바쁜 사람을 만나고 말았다.

    “선생님은 뭐래요?”

    “미안하다고 하지. 시간 내서 나오겠다고. 근데 그러지 말라고 했어. 드림의 드라마를 찍는 게 어디 흔한 기회도 아니고. 왔을 때 열심히 해야지.”

    “현모양처다.”

    “어려운 말을 잘도 아네.”

    “요즘 루카랑 같이 공부하고 있거든요.”

    “그래?”

    은서가 2사옥 쪽을 돌아봤다.

    생각해 보면 루카야 말로 가족과 떨어져 먼 타국에 와서 생활하고 있다.

    외롭기로 따지자면 그만 못할 것이다.

    “있다가 루카도 같이 해서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언니가 살게.”

    “진짜요? 아싸. 고기 먹어도 되죠?”

    “그래, 인마. 이 언니가 그래도 좀 벌어. 이번에 CF도 찍었다고.”

    “알죠, 알죠. 우리 은서 언니 왕 잘나가는 거.”

    빈 소리라도 칭찬은 좋다.

    은서가 씩 웃으며 세미의 머리를 헝클였다.

    ‘외로운 사람들끼리 부대껴야지.’

    은서 나름의 방법이었다.

    #

    루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바라봤다.

    반듯하게 늘어선 진열장들 안으로 가지각색의 음식들이 자리를 하고 있었다.

    어느 하나 맛없어 보이는 것이 없었다.

    “은서, 누나. 이거 다 먹는다!? 우리가!?”

    “그래. 오늘 이 누나가 힘 좀 썼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가져와서 먹으면 돼.”

    “루카 신난다!”

    “아니, 언니. 뷔페에서 생색내기에요?”

    “야. 그래도 이 뷔페 고급이야. 인당 4만원이라고.”

    1사옥으로 올라가는 길에 위치한 뷔페다.

    말마따나 제법 고급이라 음색 구색이 제법이었다.

    ‘그런가?’라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세미도 이내 루카 뒤를 쫓아 음식을 사냥하러 떠났다.

    “정작 난 광고 때문에 풀떼기만 먹어야 하는데.”

    은서는 툴툴 거리며 샐러드 코너로 움직였다.

    먹어도 안찌는 축복받은 체질 따위는 없으니 광고나 배역이 들어오면 허리를 졸라매야 했다.

    풀, 풀, 풀.

    접시 위로 쌓이는 초록 물결에 은서의 안색도 초록색으로 물들어갔다.

    “어? 너, 은서 아니냐?”

    “응?”

    그때, 누군가 은서의 이름을 불렀다.

    살짝 놀라며 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봤다.

    옅은 화장에 눌러쓴 모자라 알아 볼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맞네. 은서 맞구나. 잘 지냈어?”

    “······어. 준호 오빠. 오랜만이네.”

    “그래. 전에 시상식에서 스쳐가며 본 이후로 처음이다. 맞지?”

    “응. 그랬지, 아마.”

    예전에 잠깐 스치듯 사귀었던 남자다.

    당시에는 모델 일을 하면서 배우를 꿈꾸고 있었다.

    좋은 집에 좋은 부모.

    잘생긴 얼굴에 훤칠한 몸까지.

    조건도 굉장했었다.

    당시에는 이보다 좋은 남자가 없다고 생각 했을 만큼.

    “혼자 왔어? 합석할래?”

    “아니야. 나, 동생들이랑 왔어.”

    “동생들? 그 정도는 괜찮아. 오랜만에 봤는데 얘기라도 좀 하고 싶다.”

    “괜히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아. 오빠도 일행이 있을 거잖아.”

    “매니저 한명 뿐이야. 그러지 말고 와서 같이 먹자. 아니면 우리 헤어졌으니까 인사도 안 하는 사이가 된 건가?”

    이렇게 말 하면 거절하기 어렵다.

    ‘옛날 일도 있고······’

    예전에는 어렸다.

    바쁜 스케줄에 짬 내어 만나는 것이 힘들고 남을 배려 할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힘들면 투정부리고 그러다 싸우면 토라져 연락 끊기가 일쑤였다.

    어쩌면 보통의 연인과 다를 바 없는 일.

    하지만 그런 식으로 연락이 뚝 끊긴 채 헤어져 버린 게 못내 마음에는 짐으로 남아 있다.

    “어? 언니, 누구에요? 회사 사람?”

    “아. 세미야. 그냥······”

    “어? 세미 씨 아니에요? 전에 드라마 굴다리에 나왔던. 맞죠?”

    “와! 저 알아보세요!?”

    “그럼요. 어린 나이에도 연기력이 좋아서 눈에 확 들어오던데.”

    “와. 언니. 이 오빠 되게 좋은 사람 같다.”

    금세 넘어가서 헤실거리는 세미도 참 얄궂다.

    은서가 세미와 접시를 쌓은 채 곡예 부리고 있는 루카를 번갈아 바라봤다.

    “밥만. 밥만 같이 먹자.”

    그저 밥일 뿐이었다.

    #

    근황이라고 소식을 주고받는 것도 어쩐지 부담이다.

    자신이 최근에 영화에 캐스팅 되어 몸값이 올랐다는 말에 칭찬하기도 버겁다.

    잘 지내는 것 같아 기쁘다는 말도 어색하다.

    은서는 그냥 이 자리가 불편했다.

    “그러고 보니까 저기 세미와는 소속사가 다르지 않아? 어떻게 알게 된 거야?”

    “그냥 이래저래 알게 됐지.”

    “그 친구가 소개시켜 준 거야?”

    “응? 누구?”

    “홍 진호. 그쪽 소속사 친구들 아니야?”

    아마도 이것 때문일 것이다.

    마침 진호가 한국에 없는 상황에서 옛 남자친구와 만나는 상황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일을 거론하는 것조차.

    “같이 드라마 찍으면서 친해졌거든. 오가다가 애들 알게 됐고.”

    “흐응. 그것뿐이야?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너랑 진호 씨랑 굉장히 친하다고 하던데.”

    “뭐래. 이 바닥 소문을 그냥 믿어?”

    “그럼 그냥 소문이라는 거야?”

    “······어. 그냥 소문이야.”

    대외적으로는 아직 두 사람은 연인 관계가 아니다.

    사석이라고 해도 ‘나 진호 오빠 만나.’라고 말 할 수 없는 은서였다.

    “그래? 다행이네.”

    “다행이라고?”

    “하하. 혹시 그 사람하고 네가 만나는 거였으면 힘들 뻔 했지 뭐야. 워낙 잘나가는 사람이니까.”

    “아니, 진호 오빠랑 준호 오빠가 무슨 상관인데?”

    “무슨 상관이겠어.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은근한 얼굴에 은근한 목소리.

    은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뒤로 뺐다.

    가장 상대하기 싫은 상황이었다.

    “들어 봐 은서야. 그때는 우리가 어렸잖아. 서로 처지도 힘들었고.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너도 나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으니까, 이젠 돌볼 여유가 있잖아.”

    “그래서 뭐? 다시 만나자는 거야?”

    “응. 나, 안 그래도 주변 사람 통해서 네 소식 알아보고 있었어. 오늘 이렇게 만나는 거 보고 인연이다 싶더라. 우리 다시 한 번 만나보자.”

    “오빠. 오빠. 우리 이미 헤어진 사이야. 한 번 헤어진 연인은 다시 만나도 좋은 꼴 못 봐. 그냥 좋은 추억이다 생각하고 넘어가자.”

    준호는 좋은 조건이라면 더 갖추고 있다.

    여자라면 열 중 여덟은 그와의 만남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오빠 없을 때 이런 일 생기는 거 불편한데.’

    하지만 은서에게는 아니었다.

    그녀는 제안에 고려보다 자리에 없는 진호를 먼저 떠올렸다.

    “혹시 따로 만나는 사람이라도 있어?”

    “있어. 있는데 누군지는 오빠한테 말 할 수 없어.”

    “날피하고 싶어서 지어내는구나.”

    “있다니까. 그리고 없어도 오빠랑은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아.”

    “왜? 그때와 지금은 다르잖아. 한 번은 진지하게 생각해 줄 수 없어?”

    “······이러지 마. 오빠한테 안 좋은 소리 하고 싶지 않아. 그냥 옛날 친구 만났다 생각하고 지나가 줘.”

    은서는 아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식을 퍼오러 간 세미와 루카를 끌고 다른 자리로 옮길 생각이었다.

    “은서야. 나 진지해. 우리 다시 한 번 만나보자.”

    그런 그녀의 손목을 준호가 낚아챘다.

    힘이 강한 터라 은서가 순간적으로 휘청거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쓰고 있던 모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 저거 은서 아니야?”

    “진짜다. 그럼 저 남자는 누구야?”

    “와. 설마 비밀 연애중이야?”

    공교로운 일은 항상 연달아 일어나는 걸까.

    은서가 피가 나도록 입술을 씹은 뒤 준호의 손을 뿌리쳤다.

    “실례하겠습니다.”

    지금은 사람들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이 최선이었다.

    접시에 음식만 채우고 멀뚱멀뚱 보는 세미와 루카를 낚아채, 가게를 벗어났다.

    뒤에서 들려오는 카메라 소리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

    “아이, 씨.”

    다음 날.

    은서는 혹시나 하는 기대로 SNS를 확인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결과는 처참했다.

    [언니, 애인 있다는 말 사실이에요?]

    [와 비밀연애라니. 그럼 지금까지 한 말 죄다 거짓말이었네?]

    [그 남자 박준호죠? 박준호]

    [충격이다 진짜. 어떻게 말없이 남자를 만나냐?]

    이미 준호의 신상까지 다 밝혀진 채 비밀 연애하는 사람이 돼 있었다.

    글을 내리고 문자와 통화 목록을 살피니 이미 대표의 이름이 빼곡하게 보였다.

    머리를 양 손으로 잡아서 헝클였다.

    [너 당장 튀어 와라]

    마지막 문자는 어쩐지 살벌하기까지 했다.

    황급히 일어나 몸을 추스르고 회사로 이동했다.

    중간에 ‘저 가요.’라는 짧은 문자 하나를 남긴 채.

    “야이, 정신머리 없는 것아!”

    그렇게 회사에 도착하자 날벼락이 떨어졌다.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은서의 목이 어깨 안으로 폭 파고 들었다.

    “정신이 있어, 없어!? 내가 열애설 만들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어!? 이번에 배역 잡아서 광고도 따고 그랬는데 모조리 말아먹을 심산이야!?”

    “······아오 대표님. 목소리 좀 줄이세요. 귀청 떨어지겠어요.”

    “지금 그런 말이 나오냐? 내 전화기 불나는 거 안 보여?”

    “솔직히 저도 억울해요. 이건 그냥 사고라고요.”

    “사고요? 그러세요? 아주 그냥 세상천지가 다 억울하지.”

    비아냥거림에 은서가 울컥했다가 겨우 다스렸다.

    이 바닥, 사고 나면 당한 사람이 잘못 한 경우가 왕왕 있다.

    심호흡을 한 뒤 있었던 일을 풀어냈다.

    “옛날 남자친구라고? 전에 너 울고불고 했던 그 인간?”

    “네. 그때 그 사람이요. 애들 데리고 밥 먹으러 갔다가 우연하게 만났어요. 근황이나 주고받자는 말에 잠깐 합석했다가······”

    “아니, 잠깐이라도 합석을 왜 해? 너 아직 그 놈한테 마음이라도 있어?”

    “없어요! 없어! 그 인간하고는 예전에 끝났다고요! 나 지금 만나는 사람 있는 거 뻔히 알면······”

    “뭐시여?”

    은서가 석상이 된 듯 굳었다.

    옆에서는 매니저, 소윤이 이마를 손으로 짚은 채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다.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지금 만나는 사람이라고?”

    “끄응. 대표님. 내 나이가 몇입니까? 이제 허락받고 만날 나이 지났어요.”

    “아니, 시끄럽고. 누군지나 말 해! 남 몰래 누구를 만나고 다닌 거야!?”

    “······그건 말 못해요.”

    “왜!? 어디 엄한 놈팡이랑 놀아나는 거야!? 내 눈에 흑 들어가기 전에는 그런 골 못 본다!”

    대표가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아이돌을 할 때부터 배우로 전형한 지금까지.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딸처럼 키워 왔다.

    엄한 놈이라면 절대로 인정 할 마음이 없었다.

    “진호에요. 홍 진호.”

    “언니!”

    “이것아, 이 마당에 숨겨서 되니? 그냥 속편이 다 불고 해결하자.”

    비밀은 소윤의 발언으로 깨졌다.

    대표는 ‘진호? 진호?’라는 말을 반복하다 눈을 크게 뜨며 책상을 양 손으로 후려쳤다.

    “배우 홍 진호라고!?”

    “어휴. 그래요. 맞습니다. 저 진호 오빠랑 연애하고 있습니다. 왜요? 배라도 째시게요?”

    “야······이것 봐라. 아주 그냥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월척을 물어왔네.”

    “대표님. 내가 무슨 고양이에요? 그리고 연애하는데 월척이라니. 조선시대고 아니고.”

    “큼. 큼. 말이 그렇다는 거지.”

    대표가 표정을 가다듬었다.

    배우의 이미지나 이런 걸 다 떠나서 진호라면 급으로 따졌을 때 최상급 아닌가.

    딸 보내기 싫은 아버지의 마음으로 보자면 그래도 썩 마음에 드는 대상이었다.

    “그래. 우리 진호 군이랑 사귄다고? 언제부터냐?”

    “······”

    목소리가 나긋나긋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