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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만 전생 배우-135화 (135/178)
  • Chapter60. 차별 앞에서(3)

    니어슨은 코웃음 쳤다.

    그는 복싱, 킥복싱, 주짓수, 레슬링 등 다양한 무술을 섭렵한 유단자였다.

    액션 연기를 위해서 십 수 년을 몸 관리에만 힘 써 온 사람이라 이거다.

    키도, 체중도, 힘도 자신보다 약한 동양인에게 질 가능성 따위는 전무했다.

    [올라와 보라고. 여기서 차이가 뭔지를 확실하게 알려 줄 테니까]

    [난 분명히 경고를 했다]

    링을 잡고 진호가 위로 올라갔다.

    목을 좌우로 꺾고 가볍게 몸을 풀었다.

    일찌감치 움직이기 시작한 전생의 무인들이 사납게 그렁거리고 있었다.

    [자자. 남자답게 가자고. 3분 씩 3라운드. 스파링을 해서 결과가 나오면 깔끔하게 승복하는 걸로]

    [흐흐. 시원해서 좋군. 내가 이기면 저 놈을 쫓아 낼 수도 있는 건가?]

    [무리야, 그건. 대신 씬 촬영에 한해서는 진 쪽이 이긴 쪽을 수발 드는 걸로 하지. 어떤가?]

    바이슨이 제안을 내어 놓았다.

    그로서도 계속해서 다툼이 이어지면 곤란한 터.

    적당한 미끼를 주어 불화를 무마시킬 생각이었다.

    [흥. 그 정도로 만족하는 수밖에. 넌 어떠냐, 원숭이]

    [글쎄. 그것까지 생각 할 수 있으려나? 싸우다 보면 실수로 네놈 목을 부러뜨릴지도 모르는데]

    [······헛소리 하고 앉아 있군]

    [말했을 텐데. 목숨을 걸라고]

    진호가 몸의 중심을 낮췄다.

    권투도 킥복싱도 레슬링도 아닌 기묘한 자세였다.

    니어슨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그를 노려보다 맞상대할 자세를 취했다.

    [건방진 네놈 주둥이부터 아작 내 주마]

    [할 수 있다면. 종]

    진호의 짧은 말을 신호로 바이슨이 종을 쳤다.

    동시에 훅, 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진호가 튀어나갔다.

    거의 무릎 아래로 내려가는 태클이었다.

    [난 레슬링도 했다고!]

    니어슨은 곧바로 무릎을 내밀며 니킥을 시도했다.

    체중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서브미션으로 들어오리란 건 예상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진호의 투법은 현대의 것과 궤를 달리했다.

    달려가던 자세를 옆으로 틀어 니킥을 피하고는 손을 갈고리처럼 말아서 니어슨의 다리를 당겼다.

    이미 한 발로 중심을 잡던 그는 ‘엇!’하는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빠악—!

    무너진 니어슨의 후두부로 주먹 한 발.

    글러브를 끼고 있긴 하지만 절대로 가볍지 않았다.

    컥, 소리를 내며 황급히 몸을 구르며 후속 타격을 피했다.

    [쥐새끼가!]

    [물려봐. 얼마나 아픈지]

    황급히 자세를 가다듬고 일어났을 때.

    니어슨이 본 건 허공에 뜬 채 몸을 돌리고 있는 진호였다.

    동작이 커서 잘 사용하지 않는 돌려차기.

    양 손을 전면으로 올려서 방어를 시도했다.

    묵직한 충격에 몸이 밀리긴 했지만 그것뿐이었다.

    ‘건방진 새끼! 날 무시해!?’

    큰 동작은 무시의 상징.

    니어슨이 이를 악 다물며 앞으로 돌진했다.

    돌려차기 같은 기술을 사용하고 나면 착지 후의 빈틈이 크니까.

    [······?]

    하지만 손에 닿는 사람이 없었다.

    시야에서 진호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마술도 아니고 이게 되는 건가 싶었다.

    [아래! 아래!!]

    그때, 매너지의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앞을 보던 시야가 내려가자 바닥에 닿을 듯 웅크린 진호가 보였다.

    돌려차기 이후 몸을 완전히 내린 것이다.

    쩌억.

    [커걱!]

    낮은 자세에서 몸을 튕기며 올라오는 숏 어퍼.

    턱이 끊어지는 고통에 니어슨이 비명을 토했다.

    보호 장구를 하고 있어도 턱은 여전히 약점이었다.

    골이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작은 걸 무시하지 말아야지]

    [끄으윽! 건방진 새끼가!]

    진호는 타격을 한 번으로 멈추지 않았다.

    짧게 사이드 스텝을 밟으며 연속해서 니어슨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왼쪽 숏 훅, 오른쪽 숏 훅, 잽, 잽, 스트레이트.

    비처럼 내리는 공격에 니어슨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체급 차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맞으면 아픈 건 여전했다.

    [으아아!]

    악에 받쳐 손을 풍차처럼 휘둘렀다.

    하나라도 걸리면 체급 차로 경기를 뒤집는 것 따위는 여반장이었으니까.

    콱.

    그리고 그 생각대로 손끝에 진호의 팔이 걸렸다.

    기회, 라고 생각한 니어슨은 그대로 팔을 당기며 버팅을 시도했다.

    반칙이든 뭐든 일단 충격을 줘 놓고 반격 할 심산이었다.

    [와!!]

    [말 도 안 돼!]

    하지만 그런 시도는 주변의 감탄과 함께 무위로 돌아갔다.

    버팅이 들어가기 전, 진호가 잡힌 팔을 부드럽게 돌리며 공중으로 뛰어 오른 것이다.

    디딤판이 되어 준 건 니어슨의 몸.

    마치 뜀틀처럼 앞으로 숙인 그를 타고 넘어갔다.

    워낙 그 동작이 유려했던 터라 니어슨은 또 다시 진호가 눈앞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커, 커억!!]

    그 결과는 조르기였다.

    진호는 니어슨의 후위에서 완벽한 초크를 시도했다.

    팔이 완전 밀착해서 들어 간 채 체중을 이용해서 조르는 터라 힘은 무용지물이었다.

    체급이 높아도 조르기는 기술의 영역이다.

    숨 막힌 니어슨의 얼굴이 점차 창백해져갔다.

    [끄······끄으으으]

    [스톱! 스톱! 그만하게!]

    바이슨의 달려와 손을 잡아 때려 했음에도 진호는 쉽사리 풀지 않았다.

    아슬아슬한 순간까지.

    니어슨이 눈을 까뒤집고 전기 먹은 개구리마냥 푸들푸들 떠는 수준이 되어서야 잡았던 손을 풀었다.

    [케에에엑! 켁! 켁!]

    그리고 손을 툭툭 털며 일어나 사색이 된 니어슨을 내려다 봤다.

    [심판만 없었어도]

    짤막한 한 마디.

    니어슨은 몸을 움찔 떨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

    그 날 이후로 니어슨은 진호에게 시비를 걸지 않았다.

    몸에 각인된 두려움이 행동을 제약한 것이다.

    센 척 하고 남을 깔보기 일쑤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배역에서 나오는 자신감.

    실전에서 사람을 숱하게 죽여 온 진호의 전생과는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흐흐. 그 놈 완전히 기죽었더라고. 아주 코를 제대로 눌러 줬어.”

    “언제 제대로 당해봤겠어. 얕보던 상대에게 그 정도로 당했으니 쪽팔려서라도 뭐라 못하지.”

    “잘 했다, 잘 했어. 근데, 그런 무술은 또 언제 익혔냐?”

    “너튜브. 요즘은 검색만 하면 다 나오는데.”

    대충 에둘러 답했다.

    송학도 꼬치꼬치 캐 묻지는 않았다.

    애초에 진호의 능력에 대해서는 상식으로 설명 안 되는 영역이 훨씬 많았으니까.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내일이지? 그거 대본 리딩하는 날.”

    “리딩이라고는 하는데, 우리랑은 방법이 좀 달라. 대본도 완전 대본이 아니라서 만나는 사람도 한정되어 있거든.”

    “부분 대본으로 연기를 하는 거야? 그럼 연기가 제대로 되나?”

    “상황 설명은 있으니까. 이쪽은 스포일러에 굉장히 민감하잖아.”

    배우들이 전부 모여서 하는 대본 리딩이 아니다.

    몇 몇 씬으로 분할된 부분 대본에 소수의 사람만 참석하는 방식이다.

    한국 같으면 인력 낭비 같겠지만 이쪽은 워낙 자원이 빵빵하다보니 이런 일도 문제가 없었다.

    “CG리허설도 한다며? 그건 또 뭐야.”

    “CG작업 전에 녹색 크로마키 대상으로 연기하는 건 알지? 그거 미리 연습 하게 해 준 거야. 이곳 사람들은 익숙하지만 난 좀 생소하니까.”

    “아, 그거. 대배우도 연기하다가 현타오던데. 넌 괜찮겠냐?”

    “익숙해져야지.”

    실물을 보고 연기하는 것에 익숙한 배우가 CG작업에서 혼란스러워 하는 건 흔한 일이다.

    괴상한 옷을 뒤집어 쓴 스텝 앞에서 감정 잡는 일이 어디 쉽겠는가.

    이 일도 전부 할리우드 진출을 위한 발판이었다.

    “새로운 경험은 언제나 환영이니까.”

    전생에 현생을 더해서.

    배우가 완성되는 것이다.

    #

    다음 날.

    수십 명의 스텝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장소로 진호가 도착했다.

    ‘이런 곳에서 리딩?’

    진호는 의아해 했다.

    한국에서의 대본 리딩과는 상황이 너무 달랐다.

    [아, 오셨군요. 디렉팅을 맡은 비숍입니다]

    꽤나 젊은 여자가 진호를 맞이했다.

    감독이 아닌 디렉팅 스텝 중 한 명이었다.

    촬영 규모가 큰 만큼 감독을 보조하는 인원도 상당했다.

    촬영, 사운드, 연출을 제외하고도 흔히 말하는 작가 진 내부에도 직함이 갈렸다.

    [이곳에서 리딩을 진행하는 겁니까?]

    [아, 오늘은 실제 촬영 분은 아닙니다. 임시 대본으로 상황을 맞춰보고 다시 정리를 해야 하거든요]

    [대본이 여러 개라 이거죠?]

    [네. 실 촬영도 몇 번에 걸쳐서 할 겁니다. 오늘은 적응하는 것에만 중점을 두죠]

    예산이 넉넉하니 이런 짓도 할 수 있다.

    씬을 머리에서만 굴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몇 개로 나눠서 촬영해 버리는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괜찮을 것을 꺼내 쓰면 되는 일.

    괜히 영화에 자본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절 따라오세요. 니어슨 씨가 미리 와서 준비 중입니다]

    [그래요? 의외로 일찍 도착했군요]

    [하하. 요즘은 군소리 안 하고 촬영에 협조하는 터라 저희도 편합니다]

    한 바탕 박살낸 효과가 여기까지 온 모양이다.

    진호가 가볍게 웃으며 여성 스텝의 뒤를 따라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와우. 이거 전부 세트인가요?]

    [네.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장소를 통째로 세트화 시켰어요]

    [이건 또 의외로 CG가 아니군요]

    [잘 섞어 쓰는 게 감독의 역량이죠]

    슈퍼 히어로 아지트라고 하면 좋을까.

    수백평 부지를 통째로 세트로 만들어서 꾸며 두었다.

    나무도 진짜고 벽도 진짜고 자동으로 열리는 문도 진짜였다.

    확실히 스케일이 남달랐다.

    [CG입히는 연기는 처음이라고 하셨나요?]

    [완전 처음은 아닙니다. 근데, 그때도 대상은 있어서 연기에는 문제가 없었죠]

    [하하. 처음에 고생 꽤나 하시겠네요]

    [보통 적응을 어려워하나요?]

    [처음에는 많이 힘들어 하죠. 특히 정극으로 연기를 해 온 사람들은 시간이 더 걸리곤 해요]

    진호가 세트장 한 곳에 도착했다.

    유리 건너편으로 니어슨이 보이고 꽤 많은 스텝들이 주변을 분주히 움직였다.

    [일단 준비부터 하시죠]

    [아. 모션 캡쳐를 위한 옷이군요]

    [앞으로 지겹게 보실 겁니다. 준비하고 나와 주세요]

    CG를 입히기 위해 마커가 달린 의상을 건네받았다.

    몸에 딱 붙는 쫄쫄이라 거울 앞에 비쳐 보이는 것이 영 어색했다.

    [흥. 쉽진 않을 거다]

    [니어슨. 나한테는 말 걸지 않는 거 아니었나?]

    [네놈이 주먹 좀 쓰는 건 알겠다. 하지만 연기는 다른 이야기라고. 변방에서 온 사람이 할리우드의 연기를 제대로 해 낼 수 있겠냐?]

    [끝까지 꺾이지 않으니 기쁘네]

    이죽 이는 니어슨에 진호가 미소를 보여 주었다.

    몇 대 맞았다고 끝까지 숙이고 있었더라면 실망 할 뻔 했다.

    아직 보여 줄 것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준비 됐습니다]

    니어슨을 스쳐서 녹색으로 물든 세트장에 섰다.

    스텝들도 모션 캡쳐를 위한 의상을 입고 저마다의 배역을 연기해 주고 있었다.

    말은 거창하지만 겉보기로는 우스꽝스러웠다.

    이걸 다 참고 연기를 해야 하는 것.

    [슈퍼 히어로라]

    진호가 천천히 배역으로 빠져 들었다.

    세상천지 죄다 우스운 것들뿐이지만, 그의 눈에는 완전히 다르게 다가왔다.

    [······뭔데. 처음 아니었어?]

    유리 너머에서 들리는 놀란 니어슨의 목소리.

    이것으로 시작이다.

    진호는 할리우드 연기의 첫 발을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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