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60. 차별 앞에서(1)
어색한 분위기에서 나선 건 드림의 디렉팅 이사, 제임스 쿡이었다.
[하하. 미스터 니어슨이 무언가 마음에 안든 모양이군요]
[늦은 시간이라 피곤한 모양입니다]
감독인 헨리 놀슨도 말을 더했다.
[두 사람 다 말 돌리지 말라고. 내가 분명히 경고를 했을 텐데? 내가 주연인 드라마에 아시아 변방 잡것하고 같이 출연하는 걸 용납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톰 니어슨은 둘의 노력을 무색하게 했다.
목소리조차 죽이지 않은 채 그대로 돌진했다.
표정들이 많이 어색해졌다.
“진호야. 지금 저 양키 새끼가 뭐라는 거냐.”
“형이 들은 그대로야. 내 우상이었던 사람이 저런 인물이었단 말인가. 하아.”
영어를 알아들은 송학과 진호의 표정도 가관이었다.
특히, 진호는 톰 니어슨을 우상과 같이 여겼었다.
훌륭한 배우에 좋은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 상상이 깨어지는 데는 1분도 필요 없었다.
[거기 쥐새끼들. 구석에서 떠들지 말고 우리말로 해라. 아니면 말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엉망인 것들이냐?]
한 술 더 떠, 톰 니어슨은 진호 쪽을 직접 가리켰다.
주변에서 만류하는 신호를 보냈지만 막무가내였다.
[누구보고 쥐새끼라는 거냐. 이름값 높은 배우라는 놈이 말 하는 버릇은 쓰레기가 따로 없군]
[뭐!? 어디서 원숭이 같은 새끼가!]
심지어 팔을 걷어붙이며 달려들려고 했다.
주변 사람들이 황급히 막은 덕에 미수에 그쳤지만 성격이 보통 불같은 것이 아니었다.
[톰 니어슨이 이런 배우였다니. 한때는 팬으로 존경을 했는데. 사람을 겪어봐야 안다고 실망이 크다]
[건방진 새끼. 나 톰 니어슨이 너 같은 쥐새끼의 인정이 필요 할 것 같냐? 좋은 말 할 때 드라마에서 손 떼. 난 너 같은 냄새나는 것들과는 함께 일 할 수 없어]
[냄새는 내가 아니라 그쪽에서 나는 거 같은데? 저녁이라고 술이라도 처마시고 왔나? 말끝마다 술 냄새가 나는 것 같군]
진호 역시 한 마디를 뒤지지 않았다.
실망감이 분노로 치환 된 듯 말끝마가 가시가 가득했다.
[자자, 두 분 진정하시죠. 이렇게 싸우려고 만든 자리가 아닙니다]
결국 제임스 쿡이 나서서 다시금 중재를 했다.
[두 분 모두 이번 드라마의 중추적인 역할입니다. 개인적은 감정은 드라마를 위해서 조금 사려주심이 어떨까 합니다만]
[이것 봐, 쿡! 나는 캐스팅 미팅 당시에 분명하게 못을 박았을 텐데? 나와 접점이 있는 주요 캐릭터에 아시아 찌꺼기들이 있는 꼴을 못 본다고]
[니어슨 씨. 니어슨 씨 한 명의 의견 때문에 드라마 전체의 캐스팅 플랜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 그럼 내가 그만 두어도 된다는 거냐!?]
이젠 드림의 이사에게까지 으름장을 놓았다.
주력 배우의 힘이 센 건 맞지만 이건 지나친 처사였다.
제임스 쿡의 표정이 변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합니다. 필요하다면 니어슨 씨를 배제하는 것도 고려 해 볼 수 있습니다]
[뭐!? 지금 저 아시아 쓰레기 하나 때문에 날 캐스팅에서 빼겠다고? 그걸 진담으로 하는 거냐!?]
[정 필요하다면요]
쿡은 단적으로 니어슨과 진호를 비교했다.
커리어는 니어슨 쪽이 좋을지 모르지만 현재의 인기는 진호 쪽이 압도적으로 높다.
드라마에서 한 명을 덜어내야 한다면 니어슨이다.
[이······이! 쓰레기 머니를 집어 쳐 먹더니 드림도 갈 때 까지 갔군! 이런 식으로 드라마가 성공 할 것 같아!?]
[니어슨 씨. 자꾸 선을 넘으면······]
[하. 하하하. 이거 죄송합니다. 톰이 술을 좀 많이 마셔서 실언을 하는가 보네요]
가열되는 분위기를 막은 건 톰 니어슨의 매니저였다.
발끈해 날뛰는 니어슨을 능숙하게 제압하더니 쿡에게 사과까지 건넸다.
[술이 깨고 나면 사과하러 갈 겁니다. 오늘은 미팅에 참석하기 힘들 것 같군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잘 좀 부탁드립니다]
덕분에 상황이 봉합되었다.
니어슨은 매니저에 의해서 끌려 나가고 시끄러웠던 현장은 이내 조용해졌다.
[일단. 자리를 옮기죠]
한참의 정적 끝에, 제임스 쿡이 입을 열었다.
반대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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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팅은 짧게 마무리 되었다.
분위기가 무거웠던 탓에 필요한 정보만 딱 주고받은 뒤 그대로 헤어졌다.
“그 새끼, 대체 뭐하는 놈이냐?”
오늘 길에서 송학은 톰 니어슨을 욕했다.
그만이 아니라 대동한 다른 일행도 니어슨을 욕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눈앞에서 노골적인 차별 발언을 들었으니 화가 안 나는 게 이상했다.
“팀장님. 찾아보니까 그 인간 이력이 있네요.”
“응? 있어?”
보조 매니저가 핸드폰을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전에도 한 번 아시아권 배우하고 트러블 있었어요. 주먹다짐까지 갔다가 겨우 무마됐다고 나오네요.”
“와. 완전히 미친놈이었네. 진호야, 넌 이런 거 몰랐냐?”
“전 몰랐죠. 영화만 보고 좋아했던 거니까. 에휴. 가장 존경하던 배우가 저런 사람이라니.”
기사를 곁눈질로 살피던 진호가 길게 한숨 쉬었다.
어릴 적의 우상이 무너지는 기분은 꽤 참담했다.
“아. 여기 보니까 이 양반 예전에 일본 배우한테 시상식에서 망신을 당한 적이 있네요.”
“일본 배우한테?”
“네. 일본의 국민배우라고 불리는 나시모토라는 사람에게 공개적 망신을 당했어요. 수상을 확신하고 나갔다가 이게 엎어지면서 곤욕을 당한 거죠.”
“아니, 스벌. 일본인한테 당했는데 왜 우리한테 지랄이냐?”
“글쎄요. 같은 아시아로 묶어서 취급하나 보네요.”
송학이 입술을 내민 채 투덜거렸다.
이유가 있다고 행동이 납득 가는 건 아니었다.
“근데 영화제 정도면 어느 정도 언질을 주지 않나? 어쩌다가 그런 망신까지 당한 거래?”
“자세하게는 안 나와 있어요. 근데 이 일 이후에 니어슨은 아시아의 검은 돈이 자신의 상을 박탈했다나? 굉장히 분개하면서 난동을 피웠다고 해요.”
“했으면 일본 돈이지. 왜 아시아 돈이냐. 하여튼 양놈 새끼들은 나라 구별을 못해요.”
“······아. 그래. 그건 기억나네. 당시에는 그냥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생각에 니어슨을 응원했었는데. 이런 일이었구나.”
어릴 적 기억 하나가 또 이렇게 망가졌다.
진호가 떨떠름함에 입맛만 쩝쩝 다셨다.
“그래서 드라마는 어떻게 할래? 분위기 보니까 드림에서는 둘 다 안고 가는 걸 선호하는 거 같던데.”
“나보다 먼저 캐스팅 된 게 니어슨이니까. 그쪽에서는 어떻게든 안고 가려는 거지.”
“니어슨 그 인간이 안 된다고 버티면?”
“그래도 상관없을 걸? 드림 이사 반응을 봤잖아. 포기 할 거면 내가 아닌 니어슨을 포기 할 거야.”
“하긴. 철 지난 스타 보다야 요즘 핫한 네가 더 몸값이 높지. 그럼 마음 편이 놓고 드라마 준비나 하자. 그 인간은 무시하고.”
주연과 서브 주연.
드라마 내용 상 같은 집단에 속하고 접점도 굉장히 많다.
무시하고 싶어도 무시 할 수가 없다.
“싸움을 걸어오면 싸우면 그만이야.”
어릴 적 우상 따위.
이제는 같은 배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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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스케줄은 드라마로 맞춰졌다.
잡다하게 들어와 있던 스케줄들을 모두 정리하고 드라마에 맞게 조정했다.
캐릭터 분석, 연기 연습, 액션 연습, 몸 관리 등.
팀, 진호가 전부 붙어서 이를 관리했다.
“역시 몸집을 조금 더 키우는 게 나을 거 같아요.”
“벌크업 하라는 거죠?”
“네. 아무래도 상대 배우들이 다 외국인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많이 왜소해 보이세요.”
“둔한 것 보다는 단단한 체형으로 가고 싶어요.”
“그건 피지컬 트레이너 분께 전달해 드릴게요.”
이제부터는 먹고 마시는 것들까지 전부 관리의 대상이다.
그 전 까지 진호 개인에게 맡겨져 있던 일들을 상당 부분 다른 사람들에게 양도했다.
“액션에 대한 건 어때요? 국내에서는 어렵죠?”
“아무래도 전체 스케줄이 미국 기준으로 짜여 있어서요. 이쪽 사정에 맞춰서 옮기거나 그러기는 힘들 거 같아요.”
“스케줄 표 온 거 한 번 봅시다.”
배우의 액션 역량은 둘째 치고 영화에 사용 할 정해진 합이 중요했다.
CG처리를 하더라도 필요한 동작을 숙지, 반복 연습을 시도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시설과 인력이 전부 미국에 집중되어 있었다.
“일주의 5일 정도는 미국에 나가 있어야겠네.”
“프로모션 행사도 상당히 많은 터라, 체류 기간은 그때그때 늘어 날 수도 있어요.”
“촬영도 안 들어갔는데 행사부터냐? 드림도 어지간하군.”
“벌써 이슈몰이를 하고 있으니까요. 한국의 슈퍼 스타 진호가 히어로로 돌아온다. 이미 상품화 계약으로 대표님하고 얘기 중이에요.”
돈 버는 일 만큼은 참 빠르다.
진호가 픽 웃자, 매니저가 이번에는 다른 스케줄을 폰으로 보여 주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이 스케줄은 빼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응? 아. 봉사 활동?”
“네. 취지는 좋지만 스케줄이 워낙 빡빡해서요. 무리하지 않는 편이 좋을 거 같아요.”
“아니야. 그건 그대로 내버려 둬요. 영화 찍을 때 약속해 둔 건데 사정이 생겼다고 미루면 안 되죠.”
고아원과 지적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
여러 곳에 봉사활동을 약속해 두었다.
바쁜 건 바쁜 거고 약속은 약속이다.
‘이런 핑계 저런 핑계 대면 니어슨하고 같잖아.’
우상에서 반면교사로.
“그럼 다음 스케줄 보여주세요.”
진호는 나름의 방식으로 그를 사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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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캐스팅 작업이 완료되고 미국 본토에서 프로모션 행사가 열렸다.
언론인들을 대거 초대해서 드라마를 먼저 알리는 형태.
미국의 내로라하는 언론들은 모조리 참석했다.
[드디어 얼굴을 보게 되는군요! 아시아의 용! 슈퍼스타! 홍 진호!]
사회자 역시 굉장히 유명한 인물이었다.
미국 심야 시간을 주름잡는 토크쇼의 왕.
과장된 말투와 광대 같은 제스쳐지만 그의 입 하나로 시청률이 파도를 친다.
[이런 자리에 제가 서게 되다니. 대단히 영광입니다]
[이미 10억 불을 돌파한 대작의 주연 아닙니까. 겸손은 필요 없지 않을까요?]
[하하. 현지에서 작업하는 건 처음이라서요. 겸손이라기보다는 떨림이라고 봐 주세요]
[이런 슈퍼스타를 떨게 하다니! 감독님의 부담이 만만치 않겠군요! 소개합니다, 헨리 놀슨!]
자연스럽게 감독 소개로 넘어갔다.
하지만 언론의 카메라는 여전히 진호를 향하고 있었다.
관심의 차이.
애초에 행사에서 감독보다 진호를 우선 소개하지 않았는가. 그것부터 다루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나타내는 바였다.
[쯧. 할 거면 감독을 먼저 하든가. 순서가 이상하게 돌아가는군요]
이를 달갑지 않게 보는 한 사람.
바로 톰 니어슨이었다.
그는 주머니 한 쪽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중얼거렸다.
마이크를 타고 소리가 전부 새어나가고 있음에도.
[하하. 이거 주연 배우님을 먼저 지나치고 말았군요. 오랜 공백을 깨고 돌아온 톰 니어슨입니다]
사회자는 그 목소리를 캐치하고 바로 순번을 넘어갔다.
[이야. 주연배우라고 할 수 있습니까? 조연에게도 밀리는 형편인데]
[하하. 제가 실수를 하고 말았군요. 사과드립니다]
[됐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사과 따위]
[······]
두 번 웃으며 무마하려던 사회자의 얼굴이 굳었다.
아무리 톰 니어슨의 이름값이 높아도 이건 지나치게 무례했다.
[어이, 팩튼. 지나치잖아]
그 순간, 진호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뭐?]
[그러니까 항상 네가 실수를 하는 거라고. 앞으로는 무슨 말 하기 전에는 내 허락을 받아. 그게 우리 유니티를 위해서도 좋을 테니까]
[너, 지금 뭐라는 거냐?]
[불같은 팩튼. 그 성격을 버리지 못하면 넌 언젠가 외로이 죽고 말 거야. 내가 그것 하나만큼은 장담하지]
톰 니어슨은 당황한 나머지 일시적으로 굳었다.
팩튼이라면 극중 캐릭터의 이름.
지금 상황에서 나올 단어가 아니었다.
[하하하. 저 얼빠진 얼굴 하고는]
[아, 저기. 진호? 지금 이게 무슨 대화죠?]
[이거 실례했습니다. 니어슨이 캐릭터를 보여주고 싶다고 한 걸 제가 좀 가로챘습니다. 불같은 팩튼. 많이 놀라셨죠?]
[아! 그게 전부 극중 캐릭터였다 이거죠?]
그럴 리 있겠는가.
사회자는 한 톨도 믿지 않았다.
다만, 이 상황을 무마하기에는 그편이 나을 것 같아 순발력으로 입을 맞출 뿐이다.
[서프라이즈였는데 제대로 안 먹힌 거 같네요]
[하하. 아닙니다. 제대로 놀랐는걸요. 그 연기력이면 드라마 기대해도 충분 할 거 같습니다]
그제야 굳어있던 방청객들도 박수를 쳤다.
‘진호, 진호.’ 이름을 외치며.
[자, 그럼 다음 순서로······]
덕분에 톰 니어슨만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다.
끼어들지도 나가지도 못하는 어중간한 상태로.
행사의 마지막까지 쭉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