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130화 (130/178)

Chapter58. 한 만큼(2)

서훈은 고민했다.

과연 이 대결이 시청률에 도움이 될 것인가.

후에 시청자들의 질타를 받지 않을 것인가.

결정권자가 그인 만큼 생각이 많아 질 수밖에 없었다.

“적당히 제어가 되겠어? 중간에 욱해서 프로그램 때려 치고 그러면 우리도 곤란하단 말이야.”

“자기도 간절하니까 나온 거야.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운이 좋다면 대결로 부족함을 느낄 거고 아니면······그냥 그렇게 사라지는 거겠지.”

채소정 프로필을 손으로 탁 치며 진호가 답했다.

성격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누군가 망가지는 건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근데 저 우희 씨는 정말로 가능성이 있는 거야?”

“승부? 글쎄. 그건 우희 씨 하기 나름이지. 어차피 승패는 중요하지 않아. 여기서 뭘 배워가는가가 중요하지.”

“당사자들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걸?”

“하지만 어쩌겠어. 한 번의 승부로 앞일이 정해 질 만큼 인생은 쉽지 않잖아. 받아들이고 나아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인생은 장기 레이스라고 하지 않는가.

한 번의 싸움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건 아니다.

‘그걸 납득해 주면 좋겠지만.’

진호 역시 걱정은 됐다.

“형이 편집 좀 잘 해 줘.”

“나한테 떠넘기기냐?”

“형이 책임자니까.”

시청자들이 보는 모양새의 결정은 서훈의 몫.

적어도 덜 다치는 쪽으로 그려주기를 바랐다.

#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참 짧았다.

채소정에게도 우희에게도.

두 사람은 잠을 못 자 퀭한 얼굴로 펜션에 나타났다.

“소정 언니 괜찮아요?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아. 연습 때문에 잠을 설쳐서 그런 거니까.”

“힘들겠다. 그렇게까지 해서 우희랑 싸워야 해요?”

채소정이 다른 출연자를 휙 돌아봤다.

그 눈빛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상대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말이라고 해? 난 납득 할 수 없어. 내가 우희보다 못하는 게 뭔데? 처음부터 시시덕거리더니 사전에 모의 된 게 분명하다고.”

“그, 그럴까요. 서훈 님도 진호 님도 그럴 사람으로는 안 보였는데.”

“흥. 네가 아직 어려서 그래. 방송국 놈들은 죄다 똑같다고. 저들 시청률만 잘 뽑을 수 있으면 출연자가 망가지는 건 신경도 안 써.”

채소정은 많은 걸 경험했다.

방송가의 쓴 맛과 친한 척 인사하던 후배들의 매몰찬 반응까지.

순진해 보이는 우희의 모습도 믿지 않았다.

“내가 이 방송을 어떻게 잡았는데. 여기서 재기하지 못하면 내 연기 인생은 끝이라고. 난 질 수 없어. 어떻게 해서든 뜨고 말 거야.”

“······네.”

독기 넘치는 말에 다른 출연자가 거리를 두었다.

절실함은 그녀도 마찬가지였지만 채소정 같은 수준은 아니었다.

“출연자 분들 1층으로 모여 주세요.”

때 마쳐 조연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채소정이 입술을 깨물며 나아가고 그 뒤를 다른 출연자가 따랐다.

‘지면 사단 나겠는데?’

불안함을 감추지 못한 채.

#

일주일 만에 출연자들이 다시 모였다.

짧은 인사말을 주고받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번 주에 끝내지 못한 일이 하나 있죠? 채소정 씨. 우희 씨. 준비는 잘 하셨나요?”

“네.”

“······네.”

느낌은 다르지만 같은 답이 돌아왔다.

진호가 뒷짐 진 채 서서 퀭한 얼굴의 두 사람을 돌아봤다.

“오늘 심사는 다른 출연자 분들이 대신 해 줄 겁니다. 결과는 군말 없이 수긍하는 것으로 하되, 피드백을 받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평가 방식이 어떻게 되나요?”

“전문적일 필요는 없어요. 곁에서 지켜 본 만큼 여러분이 두 사람의 실력을 가장 잘 알겠죠. 누가 더 많이 발전했는가. 이것만을 평가해 주세요.”

“실력이 아니라, 누가 더 발전했는가를 보는 거죠?”

“네. 우리는 오디션을 하려고 모인 게 아니잖아요. 그럼 두 분은 준비해 주시고 남은 사람들은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간단하게 문답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채소정과 우희는 공연을 위한 장소로, 나머지는 심사를 위한 장소로 이동했다.

펜션 1층은 공간이 꽤 넓어 분리가 쉬웠다.

“저기, 진호 선생님.”

“말씀하세요.”

그렇게 자리를 잡았을 때, 출연자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이 평가에서 진다고 불이익이 있거나 하는 건 아니죠?”

“그런 건 없어요. 애초에 동기부여를 위해서 1등을 뽑았을 뿐, 혜택 같은 건 전혀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소정 언니는 지나치게 진지해요.”

“절실함이죠. 하지만 지나침은 때론 독이 되곤 해요. 이번 기회로 그 사실을 알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진호는 과한 집착으로 패망한 군주들을 여럿 안다.

나아감과 멈춤을 아는 것이 현인의 도리.

그런 거창함을 제외하더라도 채소정과 우희, 두 사람이 무언가를 얻길 바랐다.

“준비 됐습니다.”

무대를 나누는 간이 커튼이 열렸다.

#

주제가 하나로 정해진 자유 연기였기 때문에 채소정과 우희는 알아서 시간을 분배해야 했다.

마치 프리스타일 랩 배틀을 하는 것처럼.

“우희야. 그거 알아? 변하지 않고 멈춰있는 생물은 결국 도태되고 만데.”

시작은 채소정이었다.

그녀는 곧바로 우희를 응시하며 준비해온 대사를 늘어놓았다.

“그, 그럼 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우희도 곧바로 반응을 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떨리고 동작이 경직되어 있었다.

심사를 겸하여 자리한 출연자들이 안타까운 신음을 흘렸다.

“변화는 말이야. 절심함이 동반되어야 해. 반드시 해 내겠다는 마음. 나는 시골에서 올라 올 때부터 생각했거든. 꼭 변하기로. 이곳에 맞는 사람이 되기로.”

시골에서 올라온 여자라는 설정.

능숙하게 설정을 풀어내며 자신의 캐릭터를 구축했다.

“꼭 그래야만 하나요? 이곳에 맞추는 것만이 변화인 건가요?”

“생물은 환경에 적응하잖아. 그게 현명한 방법이니까 그러는 거 아니겠어?”

“그건 그렇지만······전 그렇게 꽉 막힌 방식으로 변하고 싶진 않아요.”

우희가 의외로 강단 있게 나갔다.

채소정의 캐릭터를 정면에서 반박하면서 자신의 캐릭터를 구축했다.

희미하던 입지가 올라갔다.

“철없는 소리하지 마렴. 세상에 마음대로 해도 좋은 건 없어. 변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해. 자신을 알지 못하는데 변화가 있을 수 있겠니?”

말투가 지적하는 식으로 바뀌었다.

“아니에요, 언니. 전, 저 자신을 잘 알아요. 못나고 잘 하는 것도 없는 반 푼이. 하지만 그래도 꿈은 있는 걸요. 비록 그것이 이룰 수 없는 것이라 해도.”

이에 우희는 꿈꾸는 소녀로 반격했다.

손을 모으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녀는 전형적인 꿈 많은 소녀였다.

“바보 같은 소리! 이루지 못하는 꿈같은 건 아무런 의미도 없어! 꿈을 쫒다가 남겨진 자의 허무함을 네가 알아?”

“그래서 자신을 버리며 변화하겠다는 건가요? 허망한 꿈 대신 성공을 위해서?”

“너······! 철없이 늘어놓기만 하면 뭐든 될 거라 생각하지 마. 꿈을 위해 자유롭게 변한다는 건 그저 입 발린 말이야. 무엇도 도전해 보지 못한 어린 아이의 헛소리.”

두 사람의 연기가 조금씩 격해졌다.

어디가 연기이고 어디가 진심인지 모호해 지는 순간이었다.

“아파도 괜찮아요. 아파해도 계속 꿈꿀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해요. 세상에 꼭 똑똑한 사람만 있을 필요는 없잖아요. 전 그저 모자란 사람으로 원하는 길로 가고자 해요.”

“결국 후회 할 거다. 내가 해 봤으니까 알아. 변화라는 건 결국 나만의 것이 아니야. 널 정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변화를 불러오는 거라고.”

“전 제가 변하는 모습으로 시선을 변하게 하고 싶어요.”

“그게 꿈이라고!”

“알아요. 그래서 제가 바보인가 봐요.”

채소정을 대사를 이어가지 못했다.

주먹을 꽉 쥔 채 몸만 부들부들 떨었을 뿐이다.

“그만. 여기까지.”

이 대결을 멈추게 한 건 진호의 목소리.

그제야 무거웠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

진호는 두 사람이 감정을 수습하기를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표정이 돌아왔을 때 입을 열었다.

“두 사람 모두 연기 좋았습니다. 자유연기라 쉽지 않았을 텐데 수준 높은 연기를 보여 주었어요.”

진심이었다.

프로그램 동안 보였던 그 어떤 연기보다 훌륭했다.

물론, 이건 진심이 섞인 연기였기에 그렇게 보인 거긴 하지만.

“결과는 다른 분들이 내 줄 겁니다. 결정 났나요?”

“아, 네. 일단 의견은 정리 됐습니다.”

“확인 가능할까요?”

“여기요.”

다른 출연자들의 의견이 종이 한 장에 모였다.

진호는 종이를 위에서 아래로 쭉 훑은 뒤 가볍게 웃었다.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네요.”

“누가 이겼나요?”

“소정 씨는 누가 이겼을 거 같나요?”

질문에 질문으로 받았다.

채소정이 입술을 잘근 씹으며 잠시 말을 아꼈다.

“우희 씨가······이겼을 거 같아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연기가 많이 늘었더군요. 직접 상대를 해 보니까 알 것 같았어요.”

“전에는 수긍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수긍하시는 건가요?”

“여전히 제가 더 잘 해요. 하지만 많이 늘었다는 걸 부정하지 못할 뿐이죠.”

채소정은 분해하면서도 말은 제대로 했다.

제작진과의 커넥션이나 시청률을 위한 조작이 아니었다.

진짜로 실력이 오른 것이다.

“그럼 우희 씨는요? 어떻게 생각해요?”

“저, 저는 소정 언니가 이길 거 같아요.”

“어째서죠?”

“연기가 굉장했어요. 엄청난 박력. 전 엄두도 못 내는 연기였어요.”

우희가 힐끔 채소정을 돌아보다 중간에 눈이 마주쳤다. 깜짝 놀라 ‘흡!’하고 숨을 멈추는 모양새가 작은 동물을 보는 듯했다.

“결과를 발표 할게요.”

진호가 종이를 뒤집어서 카메라 앞으로 내밀었다.

“결과는 2:2. 동점입니다.”

정확하게 우희 두 표에 채소정 두 표로 기록되어 있었다.

“어때요. 결과에 승복 할 만 합니까?”

“······네.”

“네, 네!”

서로가 서로에게 놀랐으니 무승부에 태클 거는 사람은 없었다. 다른 출연자나 서훈을 비롯한 제작진들도 만족한 얼굴을 했다.

“그럼 여기서 간단하게 피드백을 하도록 할게요.”

결과보다는 이쪽이 본론이었다.

“채소정 씨. 우희 씨 연기를 보면서 뭘 느꼈습니까?”

“많이 늘었다는 거?”

“아뇨. 그런 거 말고, 어떤 형태나 습관 같은 거 보셨나요?”

채소정이 고개를 흔들었다.

감정적 표현을 제외하고 우희의 연기는 어설펐다.

발음도 많이 세고 동작도 두서없었다.

“솔직히 어설펐죠? 소정 씨 상식에서는 이해 안 될 정도로.”

“네. 솔직히 그랬어요.”

“근데, 잘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거죠.”

“······그러게요.”

“그게 우희 씨와 소정 씨 차이에요.”

진호가 두 사람을 손으로 가리켰다.

“한 명은 학습으로 고정된 연기. 다른 한 쪽은 내 마음대로 연기. 두 사람은 너무 극단으로 갈리고 있습니다.”

“극단으로?”

“소정 씨는 조금 더 풀어 질 필요가 있어요. 틀에서 어긋나도 좋아요. 발음이 좀 뭉개져도 괜찮습니다. 때로는 그편이 더 강한 생동감을 자아내곤 하니까요.”

채소정은 처음으로 납득하는 얼굴을 했다.

아무리 설명해도 와 닿지 않던 것이 우희와의 합으로 수긍되기 시작한 것이다.

“반면에 우희 씨는 체계를 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자유분방함은 독이 되기 십상이에요. 절제가 필요 한 곳에서는 절제를 할 수 있는. 그런 틀이 필요해요.”

우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본 채소정은 확실히 틀이 잡혀 있었다.

발성이나 눈빛. 손동작 같은 것들 말이다.

“다들 분들도 잘 들으세요. 연기에 정답은 없습니다. 곁에 선 사람을 보고 배우고, 꾸준하게 탐구하세요. 멈춰 있는 사람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 갈 수 없습니다.”

“지, 진호 선생님도 그런 건가요?”

우희가 손을 번쩍 들고 물었다.

어떨까.

진호가 잠시 생각하다 웃으며 답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건 또 다른 배움이라고 들었습니다. 저도 여러분들을 통해서 많은 걸 배우고 있죠. 여기에 못나고 잘남은 없습니다. 무엇을 얻고, 무엇으로 변할지는 모두 자신에게 달렸을 뿐.”

우희와 채소정의 눈이 번쩍였다.

다른 출연자들 역시 표정이 달라졌다.

‘이제야 프로그램이 제대로 돌아가는구나.’

진호가 흡족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오늘은 춤으로 표현력을 연습 할 겁니다. 지원자 받겠습니다.”

“저요!”

“제가 할게요!”

너나 할 것 없이 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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